연말에는 재즈가 흐릅니다. 최근 화제인 영화 ‘라라랜드’에서는 시종일관 재즈가 들리는데요. 그 외에도 ‘러브 액츄얼리’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 크리스마스를 다뤘던 많은 영화에서 재즈가 흐르지요. 자유롭고 복잡 미묘하면서도 부드러운 재즈가 겨울의 미묘한 감성과 잘 어울리기 때문일까요?
수많은 재즈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앨범을 꼽으라면 엘라 피츠제럴드의 ‘Ella Wishes You a Swinging Christmas’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도 엘라 피츠제럴드의 재즈 캐럴이 들립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재즈. 그 중에서도 유독 엘라 피츠제럴드는 대중과 접점이 많은 뮤지션이지요.
엘라 피츠제럴드는 수많은 재즈 보컬리스트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재즈의 중흥기에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재즈가 상업적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1990년대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사연 많은 음악계에서 이렇게 꾸준한 음악인도 드물 테지요.
엘라 피츠제럴드는 1917년에 태어났습니다. 흑인에게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녀는 시대에 풍파를 제대로 맞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혼모였습니다. 엘라가 15세 때, 그녀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엘라는 어머니의 새 남자친구와 배다른 동생을 피해 이모의 집으로 도피했습니다.
환경이 흔들리면서 그녀의 인생도 망가졌습니다. 사창가에서 직원 생활을 하거나 마피아와 연루된 삶을 살았다는 기록도 있지요. 그녀는 고아원과 직업학교를 거쳐 할렘가에서 노숙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이 시절에 대해서 엘라는 평생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17세에 그녀는 우연히 뉴욕의 아폴로 극장에서 개최된 음악 경연 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원래 그녀는 경연에서 춤을 추려 했는데요, 그녀 전에 춤을 췄던 댄스팀이 너무 춤을 잘 춰서 풀이 죽은 그녀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노래를 한 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던 그녀는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이후 그녀에게 음악인의 삶이 열렸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는 드러머 칙 웹을 소개받습니다. 칙 웹은 엘라 피츠제럴드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몇 번의 시범 공연 끝에 칙 웹은 엘라를 자신의 밴드에 보컬로 고용했습니다.
엘라는 칙 웹의 밴드에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A-Tisket, A-Tasket’, ‘I Found My Yellow Basket’ 등 히트곡을 발표하기 시작했지요. 칙 웹이 사망한 이후로는 밴드의 리더가 되어 밴드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밴드를 나와 솔로 가수로 자립합니다. 마침 재즈의 유행도 바뀌고 있었습니다. 빅밴드 스윙 음악에서 소규모 음악가의 비밥의 시대로 말이죠. 엘라도 부드러운 스윙 음악에서 벗어나 연주자들 못지않은 화려한 즉흥연주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상징이자 재즈 보컬의 상징이 되어버린 ‘스캣’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는 당대 미국을 지배했던 고전 뮤지컬 음악들을 재즈로 편곡하여 부르기도 했습니다. 바로 ‘Song Book’ 시리즈입니다. 송북 시리즈는 뮤지컬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대표곡들을 작곡가 단위로 모아 재즈 스타일로 바꿔 부른 리메이크 앨범들입니다. 그녀가 발표한 8장의 리메이크 앨범은 그 자체로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재즈 스탠더드 음악에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그녀의 송 북 시리즈에 나온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록의 등장 이후 재즈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엘라 피츠제럴드는 이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을 내고, 백인의 컨트리 음악을 부르고, 모타운 알앤비를 부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말이죠. 노년에 당뇨로 쓰러질 때까지 그녀는 음악 활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재즈 하면 엘라 피츠제럴드가 떠오릅니다. 그녀에게는 가창력을 뛰어넘는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재즈의 전성기인 스윙 시절부터 1960년대까지 재즈와 생로병사를 함께했습니다. 누구보다 장기간 대중과 함께하며 활동하기도 했지요. 심지어 ‘송 북’ 프로젝트 등으로 재즈 스탠더드 음악을 집대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바로 재즈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녀의 인생은 그 자체로 지난했던 흑인 여성의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흔히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마을 전체가 가난한 흑인들은 모두의 지원이 부족해 망가지기가 너무도 쉽습니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이를 잘 보여주지요.
시대도 문제였습니다. 그녀의 개인사는 불행했습니다. 커리어의 성공으로 가난에서는 벗어났지만 당시 흑인이, 그것도 여성이 가수 생활을 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세 번 결혼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모두 불행하게 끝났지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부두 노동자이자 마약상이었습니다. 첫 결혼은 얼마 못 가 취소되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은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이였지요. 둘은 바쁜 투어 스케줄 속에서도 엘라의 여동생의 자녀를 입양하는 등 가족을 이루려 노력했지만 결국 헤어졌습니다. 세 번째 남편은 젊은 노르웨이 남자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전 약혼녀의 돈을 훔치다 투옥되었습니다. 자연스레 결혼도 파경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고난을 뚫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럽인의 음악을 재해석해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즉홍연주(스캣)야말로 흑인의 영혼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원래 아프리카 인의 언어는 한 음에서 바로 다음 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꼬부라지는 특성이 있다고 하는데요, 엘라의 보컬은 이런 흑인 문화에 정수를 담았습니다.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있던 흑인의 영혼을 담아 유럽인인 작곡가의 뮤지컬 음악을 뼛속까지 바꿔놓은 셈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재즈가 미국을 상징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불행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긍정적 에너지가 가득 담긴 그녀의 음악은 그대로 미국을 상징하는 음악인 재즈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가장 흑인다운 방식으로 백인의 음악인 뮤지컬을 재해석해서 말입니다. 노예가 만든 백악관에 오바마가 들어서기 전에, 엘라 피츠제럴드가 먼저 있었습니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재즈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였습니다.
김은우 아이엠스쿨 콘텐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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