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당초 교체가 예정됐던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자리를 지키게 됐지만 여전히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 탄핵, 새누리당 분당, 황교안 국무총리와 야당 간 갈등 등으로 경제 정책이 표류하는 상황에 경제 컨트롤타워를 이끄는 유 부총리마저 쏟아지는 악재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조류인플루엔자(AI) 대응책들은 현실성 없다는 비판에 휩싸였고, 경기 둔화 속에 각종 생활 물가가 오름세를 보이면서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속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또 추가경정예산 등 정부의 재정 정책을 두고 여당과의 혼란은 더욱 확대됐다.
11월 박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제기됐을 당시 국정쇄신 차원에서 황 총리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유 부총리는 임종룡 금융위원장으로 교체하는 인사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론 악화로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인사 교체는 없던 일이 됐다. 유 부총리는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황 총리의 재신임을 받고 다시 경제 사령탑을 맡게 됐지만 올 1월 부총리 취임 이후 구조조정 혼선 등 잇단 헛발질로 잃어버렸던 시장의 신뢰는 되찾지 못하고 있다.
AI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뒤에야 내놓은 각종 대응책은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는 23일 기재부를 중심으로 ‘범정부 비상경제대응 TF’회의를 개최하고 AI에 따른 달걀 수급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정부는 이 회의에서 이찬우 기재부 차관보 등을 팀장으로 하는 관계부처 합동 TF를 구성하는 한편 해외 달걀 수입 관세를 0%로 하고 수입에 소요되는 운송비를 지원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면 수입시 개당 392원인 달걀 가격을 240원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200원 안팎인 국내 달걀 가격에 비해 비싼 데다 국내 소비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달걀 전용 비행기를 매일 10대 정도 띄워야 해 책상머리 대책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설을 앞두고 물가가 들썩이고 있지만 제대로 된 대응을 찾아보기 힘들다. 라면 1위 업체인 농심은 20일부터 28개 라면 품목 중 18개의 가격을 평균 5.5% 올렸다. 지난 11월 1일 OB맥주가 맥주 출고 가격을 평균 6% 올리자 하이트진로도 오는 27일부터 6.33% 인상키로 했다.
배추와 한우 등의 가격 오름세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배추 상품 도매가격은 23일 1kg에 900원을 기록해 평년 가격(412원)에 비해 2배 이상 올랐다. 한우(1등급 불고기 기준) 가격도 100g에 4575원으로 평년(3430원)보다 1000원 이상 뛰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기재부는 내년 1월 중순에야 설 민생대책을 내놓는다는 입장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로 국제 유가가 오름세여서 그 사이 물가 상승 압력은 더욱 높아질 것이 뻔하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입물가마저 오를 분위기여서 기재부의 대응이 지나치게 안이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추경안을 둘러싼 혼선도 더욱 커지고 있다. 그동안 정치권의 내년 조기 추경안 편성 주장에 유 부총리는 내년 경제 상황을 보고 추경안 편성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이견을 좁히기 위해 정부와 새누리당은 23일 당정협의에서 추경안 입장을 조율하기로 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키웠다. 당정협의 이후 새누리당이 “내년 2월 추경 편성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 반면 기재부는 “추경을 적극 검토하기로 한 것은 맞지만 2월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는, 엇갈린 입장을 내놓으면서 안 하느니만 못한 당정협의가 됐다.
경제계 관계자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 AI와 물가 급등, 유가 상승, 미국 기준금리 인상 등 국내외 악재가 쏟아지고 있는데 경제 사령탑인 유 부총리는 계속해서 뒷북만 치고 있다”며 “2월 추경은 1998년 외환위기 때나 있었던 일인 만큼 내년 2월에 추경안을 편성하면 자칫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경제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정치권의 2월 추경 주장은 경제보다 내년 조기 대선을 고려한 것인데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유 부총리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논란이 더욱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승현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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