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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민주주의가 아닌 ‘쟁취’ 민주주의의 시대

미 군정이 설계한 민주주의는 우리 것이 아니었다

2016.12.22(Thu) 10:36:49

최장집 교수와 유사한 학문적 흐름을 보여주는 박찬표 교수가 쓴 책, ‘한국의 48년 체제’를 보면 해방 직후 이승만 등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 주도로 ‘보통선거권’이 도입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2, 3’을 통해 미국이 했던 나쁜 짓만 주로 공부했었던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엔 매우 놀라운 ‘팩트’였다.

 

“와, 전 세계적으로도 그 속도가 결코 늦지 않았던 ‘한국의 보통선거권’은 ‘미 군정’이 우리에게 줬던 선물이었구나”

 

탄핵안 가결 이후인 지난 10일 제7차 촛불집회가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이를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 유럽의 경우, ‘보통선거권 쟁취 투쟁→민주주의 도입 참여의 확대​→(노동자 계급을 주된 지지기반으로 하는) 대중정당 강화’의 경로를 밟았다.

 

한국은 대중적 투쟁, 참여의 확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없었던 상태에서, 해방직후 ‘미 군정의 선물로’ 보통선거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최 교수는 이것을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표현했고,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과 구분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규정했다. 유시민은 이를 약간 패러디해서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표현했다. 맥락은 같은 것이었다.

 

보통선거권, 참여, 헌법, 공화국. 이런 것들은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시민들 다수는 ‘내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누가, 언제, 왜 선물을 해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그냥, 원래,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연인원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한, 11월 12일 서울에서만 130여만 명이 참여한 박근혜-최순실의 헌정유린 사건, 그리고 촛불시위, 그리고 탄핵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모든 게 바뀌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연예인 김제동은 ‘헌법’을 달달 외우고, 촛불시위에 참여한 초등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을 ‘구호처럼’ 외치고 있다. 87년 6월 항쟁의 구호가 ‘독재 타도, 쟁취 직선제’였는데 지금은 아예 헌법 제1조가 구호 대신 쓰이고 있는 셈이다.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반 아이들의 1/5~1/3 정도가 ‘촛불시위’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그래서 ‘자신의 참여를 통해+헌법을 위반한+대통령을 쫒아내는’ 경험을 초등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만 존재하던 헌법이, 교과서에서만 존재하던 민주주의가, 교과서에서만 존재하던 국민권력이 거리로 나와, 그 실체적 힘을 행사하는 경험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를 ‘정치적 효능감’이라고 표현했다. 촛불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2040세대가 참여를 통해 현실정치를 바꾸는 경험을 하고 있고 그에 대한 만족감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다’라는 자긍심,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도 했다.

 

정한울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러한 정황을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 논증하고 있다. 중앙선관위가 지난 4월 공개한 유권자는 2040세대가 2316만 명으로 5060세대 1818만 명보다 500만 명이 더 많다. 정 연구교수가 설계하여 한국일보-한국리서치와 함께 진행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20~40대의 경우 ‘대선에 대한 관심도’가 91%에 달한다. 반면, 50대는 83.6%, 60대 이상은 76.8%에 그쳤다.

 

놀라운 것은, (그냥 ‘​관심이 많다’와 구분되는) ‘매우 관심이 많다’​는 답변의 비율이다. 2012년 대선의 경우, ‘매우 관심이 많다’는 응답률은 2030세대 모두 ‘30% 미만’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20대는 70.4%, 30대는 73.6%가 응답했다. 2012년 대선과 비교할 때 2030세대는 ‘매우 관심이 많다’는 비율이 무려 40% 이상 급증한 것이다. 2012년 대선 투표율은 약 76%였다. 87년 6월 항쟁이 있던 그해 12월 대선의 투표율은 89%였다. 2017년 대선의 투표율이 80%대를 돌파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이유다.

 

한 가지 불안한 것은, ‘대중의 에너지’는 87년 6월 항쟁보다 훨씬 더 강력한데 야당에 대한 신뢰감은 87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객관적 정세’는 따봉 곱하기 따봉 수준인데 (대선 후보들의) 주체적 능력이 불안 곱하기 불안인 형국이다.

 

어쨌든, 최장집 교수가 말했던 조숙한 민주주의, 그리고 유시민이 말했던 후불제 민주주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조숙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조건이 성숙한’ 민주주의가 돼가고, 후불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비용과 참여를 지불한’ 민주주의가 우리 곁으로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들은 이후 한국정치의 주역이 돼 본인들이 항쟁과정에서 익숙했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20여 년간 주도했다. 2016년 11월~12월 촛불항쟁의 주역들도 이 에너지를 통해 한국정치의 주역이 될 것이다. 이들은 헬조선과 양극화 등 ‘사회경제적 구조개혁’의 과제들을 향후 20여 년간 주도하게 될 것이다.

 

87년 6월 항쟁세대가 장강의 뒷물결이 되어 장강의 앞물결이었던 4.19 세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듯이, 이제 다시 2016~2017년 촛불항쟁 세대가 장강의 뒷 물결이 되어 장강의 앞 물결이었던 6월 항쟁 세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게 될 것이다.  

최병천 정책혁신가(전 국회의원 정책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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