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 일대 사건
이 글을 마칠 시점인 2016년 11월 초 대한민국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분노, 절망과 함께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나는 이 글 모두에서 ‘왜 정권은 매번 실패하는가’의 문제를 세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첫째 대선자금과 친인척 문제, 둘째 권력의 사유화, 셋째 권력의 오만과 독선.
나는 내 글에서 주로 이명박 정권의 경험을 토대로 역대 정권이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과 몰락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가급적 박근혜 정권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갔다. 현재진행형이기도 했지만, 박 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 이 세 가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정권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이 미루어 짐작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 자신도 이 정도까지인 줄은 정말 몰랐다.
이 글을 통해 고백하는데, 나는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면서도 대선 투표에서 박근혜를 찍지 않았다. 그리고 대선 과정에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선대위에서 아무런 직책을 맡지 않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측의 모질고 모진 네거티브 공세를 견디면서 나는 박근혜 후보의 검증 책임까지 맡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집권을 하면 나라가 어찌될까 심각하게 걱정을 했다. 오죽하면 그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가 드러나면 온 국민이 경악할 것이고, 박근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을 것”이라고 얘기했겠는가. 그리고 그가 집권 후에 보여준 정윤회 사건, 권력 사유화의 모습, 그리고 오만과 독선의 자세 등을 보면서 많은 지인들에게 “이 정권이 과연 제대로 끝을 내겠는가”라며 수없이 의문을 표시하곤 했다.
불행히도 이 정권은 내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흘러왔다. 나는 이 과정에서 간간이나마 내 목소리를 내보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15년 11월 13일자 ‘중앙일보’ 인터뷰 “벌거벗은 왕에 ‘옷 아름답다’만 연발, 국가적 위기상황”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권력도 이상하게 유승민만을 타깃으로 삼아 두들겨 패면서도 나는 마치 유령 취급을 했다. 아마도 권력은 내가 자신들을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섣불리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2016년 총선에서 독자 공천자인 나를 무리하게도 살생부에 올렸다. 나는 투쟁 끝에 공천과정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결국 엽기적인 공천파동으로 낙선하고 말았다. 차라리 그때 살생 당했더라면 나는 총선에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권력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수없는 기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야기 좀 해달라고. 아니, 내가 그렇게 오랜 세월 그렇게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제 와서 왜 이 난리들인지. 어이가 없고 허망했다. 이 황당한 사태가 도대체 당사자들만의 책임일까. 분명히 말하지만, 벌거벗은 임금님을 그냥 지켜보며 아무 말도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나는 이런 얘기도 했다. 박근혜가 우리 정치사에 엄청난 반면교사의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이제는 우리가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 이 위기를 국가 대개조의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지지부진하기만 한 우리나라를 새롭게 세울 절호의 기회로 삼자는 얘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려시대 때 묘청의 서경 천도의 실패를 ‘조선 역사 일천 년래 제 일대 사건’이라 주장했다. 나는 감히 주장한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조선 역사 일천 년래 제 일대 사건’이라고. 아니, 이어야 한다고. 내가 상상하건대, 박근혜 드라마는 앞으로 100년 후, 500년 후, 1000년 후 각종 영화나 연속극의 소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드라마를 즐기는 우리 후손들은 어떠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통렬하게 고민해야 될 지점이 바로 여기다. 우리 모두는 이 끔찍한 비극의 드라마를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희극으로 바꾸어야 할 역사적 사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개헌 논의가 다시금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개헌 논의의 핵심은 역시 권력구조 개편이다. 권력구조의 개편, 즉 우리 정치체제의 틀을 바꾸면 지지부진하기만 한 우리 사회의 모든 적폐가 해소되기 시작할까?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주로 하드웨어에만 관심을 가지는 우리의 촌스러움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본격화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산업 분야는 물론 정치 분야에서도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이 연재의 모두에서 지적한 세 가지 문제의 답을 제시할 차례다.
첫째, 우리 정치의 ‘흑역사’를 만들어온 원인 중의 하나인 정치자금 문제를 풀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의 정치자금 제도는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정치인을 잠재적인 범죄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만든다. 특히 대선에서 ‘대선자금의 위험성→친인척이 관리→견제 받지 않는 권력 실세로 등장→호가호위 세력의 국정농단’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까지 이런 시행착오를 반복할 것인가. 이제 우리도 정치선진국처럼 정치자금의 한도를 없애야 한다. 거기에는 물론 투명성의 강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정치자금의 한도를 없애려면 정치자금의 상한선을 철폐하고 정당후원회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 소위 ‘오세훈법’이라는 현행 정치자금제도는 정치자금의 입출입에 대한 투명성을 강화했다는 면에서 평가받아야 하지만, 반면에 많은 폐해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당하다. 후원금의 한도를 낮게 정하고 정당후원회제를 폐지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재력이 풍부한 사람과 정당의 경쟁력이 부당하게 높아진다. 더구나 당초 법 취지와는 달리 정치자금의 한도와 정치현실과의 괴리가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커지면서 모든 정치인을 잠재적인 범법자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따라 정치인들은 늘 전전긍긍 수사당국의 눈치를 보면서 점점 자율성마저 잃어가는 것이다.
둘째, 권력의 사유화는 어찌할 것인가. 우선 시급한 일이 각 부처 장관이 청와대에 빼앗긴 인사권을 돌려받아야 한다. 이 글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청와대의 장관 인사권 침해는 명백한 위헌 위법 행위이다. 나는 또 우리나라는 이미 군정은 종식되었으나 왕정은 종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 국민들의 상당수는 대통령을 군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제도적인 면보다는 우리 국민들의 이러한 의식수준에서 기인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작금의 경악할 만한 사태는 이를 겪는 우리 국민들에게 뼈아픈 반면교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또 그리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왕정종식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길은 역시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 그동안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대체적인 중론은 분권형 대통령제로 압축되는 듯하다. 대통령제를 하되, 대통령은 외교 안보 국방 등 외치를, 그리고 국회에서 선출되는 국무총리는 국정의 내치를 맡는다. 현행 대통령제에 내각제적 요소를 강하게 혼합하는 방식이다. 아무래도 국무총리의 권한이, 즉 국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방식이라 국민들이 거부감이 강한 것이 큰 걸림돌이다. 국민들은 국회의 존재에 매우 부정적인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가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셋째,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권력의 오만과 독선 문제는? 권력이 오만해지고 독선에 빠지는 것은 권력의 횡포가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힘의 원천은 군사력이었다. 그러면 민주화가 진행된 이후 권력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바로 공천권과 검찰권력이다. 이 둘을 손에 쥐고 있는 한 여야 모두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이 둘을 권력에서 분리 독립시켜야 한다.
정치선진국의 예를 들면, 오바마, 캐머런, 트뤼도 등은 개인적인 자질과 매력과 능력으로 국민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 일국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것들보다는 공천권이라는 공식적인 폭력을 가지고 지도자가 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의 바탕을 이루었던 군대라는 폭력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 권력의 후진성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징표 중의 하나다. 친이, 친박, 친노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이 공천권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래서 선진국의 국민과 정치인들은 자국의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지도자를 무서워하는 쪽이다. 공천권이 권력의 손아귀에 있는 한 정치인들은 국민보다는 권력을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또 다른 전가의 보도가 검찰권력이다. 우리나라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지고 있어 소위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대통령은 인사권을 손에 쥐고 이들을 사병처럼 부려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런 검찰이 단임제 대통령제하에서 임기말 레임덕 시기만 되면 권력 주변을 향해 칼을 들이댄 것도 우리가 늘 보아온 장면이다. 이런 검찰을 제도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인력을 모아 국가수사처를 신설해서 수사는 국가수사처가, 기소는 검찰이, 치안은 경찰이 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아울러 각 지검장의 선출제도 검토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대안은 지극히 단순화시킨 결론이다. 따라서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것들이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정밀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 난세에 희망을 품다
최근의 박근혜 최순실 사태가 우리 사회에 순기능을 보인 첫 사례가 등장했다. 대한민국 검찰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거다. 지금까지 권력의 시녀로 치부되어 왔던 검찰이 이젠 권력 그 자체를 향해 돌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래서 세상일은 다 명암이 있는 법이다. 권력 사유화의 극치로 인한 국정농단 사태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쌓이고 쌓인 적폐를 해소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주말마다 커져가는 촛불시위가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의 원천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피플 파워는 전 세계적으로 봐도 막강하다. 멀리는 3·1 운동부터 4·19, 6·3, 5·18, 6·10 항쟁까지 우리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빠질 때마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바로 잡아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작금의 국가적인 누란의 위기에서 희망을 본다. 결국 지금의 혼란은 시간의 문제이지 정리가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제도적, 또 의식적인 개선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수차례 얘기한 ‘군정은 종식됐으나, 왕정이 종식되지 않은’ 우리나라도 이제 왕정이 종식될 것이다. 희대의 시대착오적인 여군주가 물러가면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던 황국의 신민들도 거개가 사라질 것이다.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수준이 선진화되면서 이제는 그럴듯한 정치꾼들이 설 땅도 점차 좁아질 것이다. 난세에 영웅 난다고 이런 기반 위에서 괜찮은 지도자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를 살면서 세상사 만고풍상을 겪으며 동화 속 ‘큰 바위 얼굴’처럼 내적 성장을 충실히 이룬 사람이다. 당연히 명철하면서도 겸손하며, 온유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넓은 포용력을 갖추고 늘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일 테고. 주변에는 그를 따르고, 또 그가 따르는 괜찮은 사람이 많이 있어 풍족한 인재풀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언행일치, 시종일관, 선공후사가 분명한 늘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더구나 그는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문화적인 소양을 풍부히 갖춘 채 항상 자기다운 삶을 추구해온 사람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만 천재가 아니라 정치도 천재였다. 그는 갈리아에서 몇 년을 전쟁을 치르다가 로마로 돌아와 잠간 지내는 동안에 제국의 운영에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조치들을 취하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가 취한 조치들은 제국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에서 통용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쓰고 있는 달력이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다. 우리의 새 지도자도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여느 지도자들처럼 만기친람을 하지 않는다. 웬만한 일들을 적재적소의 인재를 뽑아 그에게 전권을 주고 맡긴다. 그는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지 않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묵상과 대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특히 그는 지금 지구촌을 휘몰아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정통하다.
그가 집권하면, 그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보다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능력과 소신이 있는 사람 위주로 내각을 꾸릴 것이다. 심지어는 반대파 중에서도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설득하여 국정에 참여시킬 것이다. 그가 주재하는 국무회의 등 각종 회의는 늘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격한 언쟁도 벌어질 수 있다. 지금처럼 회의에서 받아 적기만 하는 장관이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받아 적기만 할 거면 차라리 대신 누굴 대참시키고 그 시간에 자기 일을 하시라고.
그는 가끔 불시에 어느 장관 집을 저녁에 찾아가 술잔을 나누며 반대 의견에 대해 설득을 시도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 장관의 의견을 흔쾌히 수용도 한다. 그는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왕다운 왕은 항상 자기를 낮춘다. 왜냐, 아무리 낮추어도 자기는 왕이니까. 그러나 왕답지 왕은 항상 자기를 높인다. 왜냐, 아무리 높여도 자신이 없으니까.’ 그는 야당의 지도자뿐 아니라 평의원과도 수시로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 국정의 협조를 구한다.
그는 과거의 정부를 부정하지 않는다. 역대 정부에서 잘한 일들은 적극 수용하여 계승하고, 잘못된 일들은 비난하지 않고 겸허하게 반면교사로 삼는다. 그리하여 역대 지도자들과의 화해는 물론 그 경륜들을 국정에 긍정적으로 활용한다.
국정운영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먹고사는 문제’다. 경제란 얘기다. 우리 경제의 본질적 과제는 민생회복과 성장을 위한 산업의 구조조정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상황이다. 소득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의 12%, 소득 상위 10%가 국민소득의 48%를 가져간다. 즉 소득 상위 10%가 국민소득의 반을 가져가고, 90%의 국민이 그 나머지 반을 나누어 가진다. 그나마 성장이 지속될 때는 경제의 파이 자체가 커지니 그만큼 견딜 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성장이 멈추어 가는 요즈음은 서민의 삶이 갈수록 각박해진다. 우리의 새 지도자는 이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주목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성장이 정체되면 가진 사람들은 별 문제가 없으나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된다. 이럴 때 정부가 할 일은 서민가계의 생활비용을 줄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가계비용 중에 가장 부담이 큰 사교육비, 주거비, 의료비 등을 줄이는 데 집중한다는 말이다. 가계의 생활비가 줄어들면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생겨 생계로 겪는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우리의 새 지도자는 말뿐이 아닌 진정한 서민대통령으로서 이 문제의 해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일찍이 박정희 대통령은 전통적인 농업국가로서 최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를 공업국가와 무역대국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선발 중진국의 앞 대열에 서게 했다.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부터 시작하여 발 빠르게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등 국가의 산업구조조정에 선견지명을 가지고 임했다. 우리의 새 지도자도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온 경제 역량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산업구조 조정에 쏟아 부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oT), 로봇, 드론, 신서비스 산업에 국가 R&D 역량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해내지 못한 공공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 재벌개혁을 완수해야 한다. 그는 이 일들이 우리나라의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인 일자리 창출과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의 새 지도자는 이 모든 일을 자기가 친히 하려 나서지 않는다. 널리 인재를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에게 전권을 주어 책임 있게 일을 하도록 한다. 단지 지도자가 도와줄 일이 무엇인지 잘 살펴서 음으로 양으로 밀어주고 조정해준다. 사실 국정운영의 성패는 관료사회를 여하히 잘 통제하고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부처의 책임자는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조직의 장악력이 매우 긴요하다. 그래서 그는 청와대가 부처 인사에 개입하여 장관을 무력화시키는 그런 권력남용을 절대 금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대 지도자들은 거의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였다. 집권과정이 정치투쟁의 연속이었고 그 과정에 정치적 역량만을 집중하다보니 국정과제나 그것을 담당할 팀워크가 준비되지 않은 채 국정을 시작함으로써 당일치기식의 국정운영에 급급하다가 시행착오만 되풀이 하곤 했다. 우리의 새 지도자는 진정한 준비된 지도자로서 당선 직후부터 취임 전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서 국정을 시작할 것이다.
무릇 모든 개혁이 어려운 것은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민생개혁과 구조개혁은 결국 엄청난 기득권과의 싸움이다. 우리가 번번이 개혁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것은 우리의 정치권이 소득순위 10%의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박으로 대표되는 수구우파들은 기업의 기득권을, 친노로 대표되는 수구좌파는 귀족노조의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양당구도로는 사회의 양극화와 산업의 구조조정을 개선하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역할만을 해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의 새 지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되돌아보면, 우리나라는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 있다. 바로 대통령당선자다. 대통령은 투표자의 과반수를 조금 넘는 지지를 받고 당선되지만, 당선이 된 직후에는 일시적이나마 온 국민의 새로운 기대 덕분에 압도적인 지지도를 구가한다. 우리의 새 지도자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한다. 열렬한 국민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고, 여야 지도자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위에서 언급한 국가적 난제에 대해 정치적인 합의를 도출한다. 겸허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또 타협적인 그의 자세는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을 것이고, 그는 마침내 새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에 대한 대타협을 이끌어낼 것이다.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은 결국 인적 자원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인적자원의 개발에 달려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은 어떤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런 식의 교육이면 우리의 현재와 앞날은 암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새 지도자는 스스로 교육혁명가로 자처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문제 만큼은 지도자의 어젠다로서 직접 관장하여 임기 내에 교육혁명의 완수에 전력을 다 한다. 그가 우리의 교육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처방은 다음과 같이 매우 근본적이고 구체적이다.
# 교육혁명의 길
우리가 몸이 아프다 치자. 일단 왜 아픈지, 즉 문제가 뭔지 알아야 한다. 우리 교육이 아프다. 그럼 왜 아픈가, 즉 문제가 뭔가. 거두절미하고 바로 들어가자. 우리 교육은 가르쳐야 할 학교나 선생은 경쟁이 없고, 배워야 할 학생만 경쟁을 그것도 지독한 경쟁을 시킨다. 한참을 자유롭게 뛰놀며 자라야 할 아이들을 말이다.
학교나 선생은 왜 경쟁을 안 하나. 거두절미하면, 교육과정 즉 가르치는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딱 정해 있으니 학교가 어딘들 선생이 누군들 큰 차이가 없다. 그럼 우리는 왜 교실에서 획일적으로 같은 내용을 가르쳐야 하나. 거두절미 하면, 석차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걸 상대평가라 한다. 전교생이 다 90점 이상이더라도 90점 맞은 학생은 250명 중 250등이어야 한다. 전교 석차를 내려면 같은 시험을 봐야 하고, 같은 시험을 보려면 같은 내용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한 학년에도 영어 선생이 여럿인데, 가르치는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같은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 지나친 얘기인지 모르지만 선생이 노력할 일이 별로 없다. 같은 내용을 가르쳐도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학생들이 얼마나 학업성취가 향상되었는지 다른 학교와 비교하지 않는다. 같은 학교 내에서 등급과 석차만 따진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요즘 사교육의 핵심은 내신 선행학습과 시험문제 찍기, 그리고 자기소개서와 소논문 대필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정해져 있으니 학교 시험에 대비하는 내신 사교육이 가능하고 유용하다. 중학교 2학년 말에 학원엘 처음 다녔다. 그 학원에 우리 학교 국어 선생이 나오셨다. 다른 건 몰라도 국어시험은 거의 매번 100점을 맞았다. 대학교의 경우는 왜 사교육이 없을까. 민법총칙 과목을 보자. 교수들마다 교재가 다르다. 같은 교재를 써도 교수들마다 시험이 다르다. 그러니 사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마 모든 대학의 민법총칙 교재가 같고, 시험도 같다면 틀림없이 대학교에도 사교육이 창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당국은 사교육을 없앤다며 입시에서 내신 비중을 높인다. 내 참! 앞에서 보듯이 학교 시험을 중시하면 중시할수록 학생들은 학원으로 더 가게 되어있다. (그렇다고 창의력 등 고급사고력이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학교내신시험이 수능이나 논술보다 더 지식중심의 시험이다. 지금까지의 실증적 결과도 그렇다.) 그래도 교육당국은 학생부 내신을 높여야 공교육이 정상화된다는 이 잘못된 전제를 바꾸지 않는다. (심지어 비교과 중심이라는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을 계속 높여 대치동을 살찌우면서 학부모들을 괴롭히고 있다. 학생부종합전형의 확대로 대입에서의 부정의 가능성도 커지고 계층 간 불평등도 더 커지게 된다.) 왜냐? 잘못된 상식을 가진 윗분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교육과정을 자율화하고 절대평가(성취평가)를 도입하면 되겠네. 즉 선생마다 자기가 개발한 교재를 쓰고, 선생마다 자기가 낸 문제로 시험을 봐서 자기 학생들을 절대평가를 하면 되겠네. (여기서 절대평가란 학생들이 다 90점 이상이면 전원 다 ‘수’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 된다. 한마디로 결론을 지으면 교육과정의 자율화와 절대평가(성취평가) 도입이 교육개혁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걸 실행하는 게 지금 불가능하다. 왜냐?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교사들의 반발이다. 교사들의 본래의 순수한 교육 열의와는 별개로 지금의 획일적 교육과정이 자율적으로 바뀌면 교사들의 근무환경도 무경쟁체제에서 경쟁체제로 바뀐다. 이에 대해서는 교총이든 전교조든 좌우와 상관없이 반대한다. 즉 대부분의 교사가 반대한다는 것이다. 교사가 반대한다고 왜 못하냐고?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퇴출까지 가능한 중간 평가가 없는 집단이 딱 한 군데 있다. 그게 교사들이다. 그걸 조금이라도 가능케 하는 것이 학생·학부모가 참여하는 교원능력개발평가인데, 교원평가 관련 법률개정안은 야당의 죽기살기식의 반대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야당의 지지기반인 전교조가 절대 반대하기 때문이다.
둘째, 소위 SKY 등의 일류대학들의 방해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벌사회의 표상이 소위 SKY다. SKY는 왜 일류인가. 학생을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잘 뽑아서다. 그동안 이들 대학은 전국의 우수한(학교 석차가 상위인) 학생들만 잘 선발하면서 일류대학의 지위를 고수해왔다. 그리고 이 일류대학 출신들이 우리 사회의 상류 기득권층을 형성해왔다. 그런데 초중등학교에서 상대평가를 없애고 절대평가를 하면 일류대학들은 그동안 손쉽게 우수학생을 선발하던 우월적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이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
교육부는 그동안 초중등교육을 왜곡시키는 일류대의 입시제도를 바로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대학자율화라는 명분을 앞세운 이들 일류대학들의 반발 때문이다. 더욱이 대학자율화를 앞세워 학생부종합전형(종전의 입학사정관제)을 확대함으로써 객관성과 공정성은 포기하면서 특목고·자사고 등의 상류층 자녀들을 더 뽑아가고 있다. 교육부가 일류대학에 진다고? 일류대학과 묵시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는 일류대의 위기에 맞서 조직적인 거부감을 암암리의 방해행위로 표출한다. 그래서 원래가 한통속이기도 한 교육부가 지는 것이다.
셋째, 우리 국민의 잘못된 선입견이다. 유교전통의 사회는 서열구조에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별 이유도 없이 모든 일에 순위를 매겨야 속이 편하다. 공부는 물론 싸움도, 잘생긴 것도 심지어는 인간성도 ‘짱’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개성보다는 일등에 집착한다. 소위 일등병이다. 학교에서 성적을 안 매긴다고? 그럼 누가 열심히 공부하겠어? 일류대는 여기를 파고든다. 학교에서 상대평가를 않고 절대평가만 하면, 우리 같이 ‘좋은 게 좋은’ 문화에서는 대부분의 선생들이 다 ‘수’나 ‘우’를 줄 거 아닌가.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든지 가려낼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의 전국적인 학력평가 시험을 거치면 각 학교가 정실평가를 하는지 여부가 이내 드러난다. 물론 학력평가의 개별적 결과는 본인 이외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그 결과를 가지고 자신들의 교육성과가 적나라하게 비교될까봐 두려워하기에 전국적인 학력평가 시험을 절대 반대한다. 특히 전교조의 반대가 더 심하다.
교육 개혁을 가로막아온 3대 요인을 살펴보았다. 이들 모두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이 견고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교육 개혁이 안 된 것이기도 하다. 이 걸림돌들을 없애고 교육 개혁의 핵심인 교육과정의 자율화와 내신 절대평가(성취평가)에 성공하면 우리 교육의 그림이 달라진다.
학교 현장이 바뀌면 학교와 선생들의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결국 학생들은 국어, 수학, 영어 성적을 위한 무한 경쟁에서 해방되고 자기 삶에 진정으로 의미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래야 사교육은 설 땅을 잃는다. 사교육을 해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교육이 가능하다. 대학은 선발 경쟁이 아닌 교육 경쟁으로 일류대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대학의 서열화가 깨지고 대신 전공별, 학과별 우수 학교가 나타날 것이다. 아울러 학벌 사회의 폐해가 줄어들 것이다.
위의 3대 걸림돌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적 인식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엄청난 의지와 노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늘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더 중요한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정도가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국민적 신뢰가 두둑한 대통령이.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다. 기껏해야 50%를 상회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 있다. 대통령당선자다. 대통령당선자는 일시적이나마 보통 70~80%의 지지도를 구가한다. 이때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고나서 대통령 임기 내내 이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성공할 때 그는 역대 대통령들이 그렇게 갈구해 마지않던 ‘역사에 남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이의 성공은 사회의 전 부문에 긍정적인 여파를 미쳐 우리나라가 비로소 선진 사회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새 지도자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박수 받으며 떠나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전임 지도자는 퇴임 후에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권위 있는 국가의 원로로서 우리 사회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은가.
내 글이 언론에 연재되는 동안 많은 지적과 충고를 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이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받은 질책이다. “아니, 무슨 참회록을 쓴다더니, 결국은 자기가 잘났다는 거네.” 뭐라 변명하려다 말았다. 그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아울러 나의 글로 인하여 상처를 받은 사람도 꽤 있었으리라 본다. 물론 최대한 줄여 보려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줄이고, 또 고쳤는데도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사죄와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이 잘난 글에 도움을 준 수많은 지인들에게 한꺼번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특히, 이 글의 탄생에는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낸 영원한 청년기자 소종섭 님의 도움이 절반 이상이었음을 밝힌다.
※ ‘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비즈한국’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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