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준금리 인상과 미·중 보호무역 전쟁,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등으로 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졌지만 ‘한국호’는 최순실 게이트의 후폭풍에 휘말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안정되는 듯했던 정치권이 친박(친박근혜)계 새누리당 원내대표단 등장으로 다시 혼란으로 접어든 탓이다. 이러한 정치권 혼란에 정부와 여당 간 주요 경제 정책을 논의하는 당정 협의가 제대로 가동하지 못할 기미를 보이면서 주요 경제 정책 결정이 모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그동안 정부와 여당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당정 협의를 거쳐서 세부안을 확정한 뒤 정책을 추진해 왔다. 당정 협의에는 정부에서는 각 부처 장관이 나오고 여당에서는 원내대표나 정책위의장이 참석한다.
당정 협의는 각종 정책에 대해 정부가 입장을 설명하고, 여당이 이에 대한 여론을 전해 정책을 최종적으로 조율하는 자리다. 당정 협의에서 정부와 여당이 의견 조율이 마무리됐다는 것은 정책안이 결정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정 협의 결과는 업계에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처럼 중요한 당정 협의가 최순실 게이트에 따른 후폭풍 때문에 공전하고 있다. 지난 13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박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후 정책 공백을 막기 위해 여당과 야당, 정부가 함께 하는 여·야·정 협의체 구성을 요구했고 새누리당도 찬성했다.
하지만 합의안 발표 직후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원내지도부가 탄핵안 가결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여·야·정 협의체 구성은 첫 출발부터 난항에 빠졌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황교안 국무총리도 여당이 빠진 여·야·정 협의체에 부정적 의사를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 새로운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에 친박계인 정우택 의원과 이현재 의원이 각각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이 선출되면서 여·야·정 협의체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황이다. 야당이 최순실 게이트 공범인 친박계 원내 지도부와는 여·야·정 협의체를 논의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탓이다.
게다가 친박계 원내 지도부 선출로 인해 새누리당의 분당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면서 당정 협의가 의미를 상실한 상태다. 당정 협의를 벌일 여당이 지리멸렬한 상태인 데다 설령 당정 협의를 해도 여당 내 의견 일치가 어려운 상황이다. 야당이 정부와 친박 새누리당 원내 대표단 간에 이뤄진 정책 협의 결과에 손을 들어줄 리도 만무하다.
문제는 각종 대내외 악재로 인해 정부와 여당이 결정해야 할 경제 현안이 산적해 있다는 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12월에 기준금리를 인상한 데 이어 내년에 세 차례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막대한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한국은 서민 금융 안정 마련이 시급한 상태다.
또 미·중 간 보호무역 전쟁과 중국의 한한령 등으로 대책 마련과 수출 기업 지원책 등도 필요하다. 경기 악화 지속 시 내년 초에 당장 편성에 들어가야 하는 추가경정예산 문제 역시 공전할 가능성이 크다.
2년간 끌어오던 건강보험료 개편도 자칫 좌초될 위기를 맞았다. 그동안 건보료는 직장 가입자와 지역 가입자 간 격차, 고액 자산가 회피 등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보건복지부는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안을 올해 안에 마무리 짓는다는 방침이지만 당정 협의 부재로 실제 시행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미래 먹거리인 ‘제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정부 부처 간 혼선 정리와 정책안 마련도 불투명해졌다. 4차 산업혁명은 올해 초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언급된 뒤 국제적 화두가 됐지만 정부는 정책 컨트롤타워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래창조과학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교육부 등 7개 정부부처가 제각각 연구 용역을 준 상태다.
경제계 관계자는 “한국 경제를 둘러싼 외부 및 내부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면서 정부와 여당의 긴밀한 정책 대응이 시급한데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당정 협의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며 “친박과 비박 간 갈등으로 당정협의가 어려워졌고, 여당과 야당·야당과 정부 간 냉전 등으로 이를 대체할 여·야·정 협의체마저 물 건너갔다. 다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러한 혼란이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여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이승현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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