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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24] 외고와의 전쟁과 원전 미스터리

‘그래도 MB가 일은 열심히 하잖아’라고들 했지만 일이 많아 잘 모르고 결정하니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

2016.12.16(Fri) 09:59:07

# 외고 개혁 추진과정

 

사교육 개혁 문제는 MB(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에 딱 맞는 정책 과제였다. 서민들의 삶에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주범이 바로 사교육이기 때문이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정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처음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이 사교육 문제였다. 나는 학원 심야 교습시간 규제를 사교육 개혁의 첫 번째 과제로 하자고 곽승준 위원장, 이주호 교과부 차관과 합의했다.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임태희였다. 그즈음 임태희 정책위의장도 미래기획위원회를 방문해 곽승준으로부터 사교육 개혁 문제와 관련해 브리핑을 받았다. 곽승준은 내게 임태희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자 여러 곳에서 반대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임태희는 말을 바꿨다. 당시 이주호는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하다 그만두고 있다가 교과부 차관으로 갔는데, 그는 잠시 그만두게 된 것을 굉장히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육계에서 자신을 비판해서 그렇게 되었다면서 반대가 나오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그래서 반대에 직접적으로 맞서지 않으면서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니 일이 되겠는가. 임태희와 이주호가 주춤하니 곽승준과 내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 시행되는 학원 심야 교습시간 규제(밤 10시까지만 교습 가능)가 확정이 됐다. 결과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교과부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정두언과 곽승준이 정책을 추진했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민심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일반 서민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덜어주는 문제가 나오면 적극 찬성한다. 당시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도 찬성했다. 교육 이슈는 항상 생각보다 반향이 크다. 언론에서도 대중의 반응이 크다보니 크게 다루었다.

 

2009년 6월 26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주최한 사교육 관련 토론회. 사진=비즈한국DB


학원 심야 교습 규제가 이슈가 된 것을 계기로 한나라당에서는 사교육개혁 TF팀을 만들었다. 나는 사교육비 절감 7대 방안을 만들어서 발표했다. 한나라당이 만든 TF팀은 내가 발표한 7대 방안을 그대로 받았다. 최구식이 위원장이었는데 내용을 잘 모르니까 내 안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그런데 이 안에 외국어고 개혁 문제가 들어있었다. 나는 7대 방안 중에 외고 개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원 종사자 간담회, 교사 간담회, 학부모 간담회, 학생 간담회 등을 가지며 줄기차게 이슈제기를 하던 차였다. 그렇게 군불을 땠는데도, 마땅한 터닝포인트가 안 나왔다. 그러던 중 국정감사가 시작되었다. 

 

2009년 10월 6일이었다. 국감 첫날 오전 질의에서 외고 개혁과 관련해 주로 질의를 한 사람은 이철우 의원이었다. 수학 교사 출신인 그는 현장을 잘 알고 있었고 준비도 많이 해왔다. 외고 개혁이 파장이 큰 이슈인 만큼 교과부장관은 이 의원의 질의에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검토해보겠다며 답변을 얼버무렸다. 나는 오후 질의 시간에 보좌진들이 준비한 내용은 뒤로하고 안병만 교과부 장관에게 외고 문제에 대해 주로 물었다. 

 

정두언: 장관님, 오전 질의 때 이철우 의원이 외고 개혁에 요구한 내용을 검토해보겠다고 하셨죠? 

안병만: 그렇습니다.

정두언: 그럼 언제까지 검토하실 겁니까? 

안병만: 네? 무슨 뜻이신지?

정두언: 아니 그럼 검토만 하다가 말 겁니까? 검토를 하면 끝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를테면 연말까지라든가.

안병만: 네, 연말까지 하겠습니다. 

정두언: 그러면 장관님, 검토를 어떤 방식으로 하실 겁니까?

안병만: 네? 그것은 또 무슨 뜻이지요?

정두언: 검토를 그냥 머리로만 합니까? 흔히 용역도 주고 그러지 않습니까?

안병만: 알겠습니다. 용역을 주겠습니다.

 

결국 교과부 장관을 상대로 ‘외고개혁에 대해 용역을 줘서 연말까지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낸 것이다. 이 장면을 마침 백승규 MBC 기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백 기자는 한나라당을 출입하다가 사교육 문제, 특히 외고 문제에 열을 받아서 일부러 교육팀으로 옮긴 상태였다. 그날 MBC는 외고 개혁 문제를 톱뉴스로 보도했다. 그때부터 외고 개혁에 불이 붙었다. 이철우 의원 혼자서 그렇게 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실세라고 알려진 내가 이슈를 제기했기에 뉴스 가치가 높아졌을 것이다.

 

사진=MBC 뉴스데스크 캡처


 

# 사교육 기득권의 반발

 

그 후로 좌충우돌 노이즈 마케팅을 하면서 외고 개혁 이슈가 점점 커졌다. 그런데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또 외고 쪽과 이른바 SKY 대학에서 반발이 나오면서 기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소리 큰 극소수는 반대했으나 일반인 대부분은 당연히 지지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난다. 하루는 아침에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외고가 사교육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사교육의 주범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뭐냐”라는 질문이 나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제 여의도에 전국학원연합회에서 5만 명이 모여 데모를 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증거 아니냐. 사교육이 어려워지니까 반대하는 것 아니냐.”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교총에서 반대하고 나선 점이다. 교총 회장이 TV토론에서 외고개혁에 반대하는 쪽 패널로 나왔다. 교총은 일반 교사들이 주축인데 그들을 대표하는 교총 회장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중·동은 교총 회장 말을 인용해 마치 전 교육계가 반대하는 것처럼 1면에 기사를 올리곤 했다. 당시 교총 회장이 서울시 교육감 출마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주호에게 얘기해서 교사들 자료를 달라고 했다. 교사들을 상대로 1000만 원가량의 비용을 들여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교사들은 외고 개혁에 90% 이상이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보다도 찬성비율이 더 높았다. 

 

내가 외고 개혁에 대해서 토론회를 하면 교총에서는 가급적 사람을 안 보내려고 했다. 토론회 모양을 갖추기 위해 억지로 오게 하면 와서 엉뚱한 소리를 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내 방에서 간담회를 하던 중 교총에서 온 실장에게 물었다. “여론조사 했더니 교사 대부분이 찬성인데 왜 교총은 반대합니까?” 교총 실장은 “저희들 조사 결과는 안 그렇습니다”라는 했다. 그래서 “무슨 조사냐, 언제, 어느 기관에서 조사를 한 것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대답을 못 했다. 자료도 못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럼 돈은 내가 낼 테니 공동으로 조사하자. 조사 기관도 교총에서 정하라”고 해도 대답을 안 했다. 

 

결국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언론에 알렸다. 외고 개혁과 관련해 이철우 의원이 준비를 많이 했는데 나만 부각됐기 때문에 그를 배려하기 위해 이철우 의원 명의로 발표했다. 그럼 왜 교총은 외고 개혁에 반대를 할까? 그것은 교총과 사교육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교총 회장으로 출마할 때 주로 어디서 지원을 받을까. 그리고 그가 교육감으로 출마할 때 주로 어디서 후원을 받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자료=(주)리서치앤리서치, 2009. 10. 28~30일 전국 16개 시·도 중고등학교 교장, 교감, 일반교사


 

# 편견과 고정관념의 반발

 

외고 개혁과 관련해서는 ‘조선일보’ 칼럼도 생각난다. 조선일보는 2009년 12월 24일자 1면에 외고 문제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나를 비판했다. 그 기사에 동의할 수 없는 나는 조선일보에 전화를 해서 내게도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더니 결국 ‘편집자에게’라는 난을 내줬다. 나는 조선일보에 2009년 12월 29일 ‘외고 독점체제가 교육시장을 왜곡한다’라는 칼럼을 썼다. 

 

마침 그날 저녁 양상훈 정치부장의 상가에 가서 문상하고 앉아 있는데,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들어왔다. 방 사장과 내가 마주앉게 됐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이 다 있었는데, 방상훈 사장이 “외고 때문에 정두언 의원을 욕하고 다녔는데, 오늘 칼럼 읽어보니까 정두언 의원 말이 맞던데요?” 그랬다. 나는 기자들에게 “여러분 지금 사장님 말씀 들었죠?”라며 쾌재를 불렀다. 

 

개혁이라는 게 결국 기득권과의 싸움인데, 개혁이 어려운 것은 기득권의 반발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개혁의 장애는 잘못된 편견과 고정 관념이다. 그게 기득권의 반발보다 더 싸우기 어렵다. 외고가 교육 경쟁을 위한 학교라는 편견 때문에 조선일보 기자라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외고를 두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고는 경쟁을 저해하는 학교다. 경쟁은 전체 학생들이 경쟁해야지 왜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아서 경쟁을 시키는가. 그것은 독과점이다. 더구나 학교와 교사들은 경쟁하지 않으면서 학생들만 경쟁시키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일 것이다. 외고 같은 학교는 역사상 없었고 지구상에도 없는 해괴망측한 학교다. 경쟁도 교육 경쟁이 아니라 선발 경쟁을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2009년 12월 29일 29면

당시 조선일보 교육팀장이 선두에 서서 나를 비판했다. 그런데 2014년 그가 특목고에 대해 칼럼을 썼다. 외고가 잘못된 학교고, 그 후에 외고입시 학원이 한산해졌는데, 이주호가 만든 자사고가 외고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며 자사고를 비판하는 내용의 칼럼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해서 기사 잘 봤다고 했더니, “그때 사실 정 의원 말을 이해를 잘 못했는데, 정 의원 말이 맞고, 열심히 잘 싸우셨어요”라고 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수월성 교육이지, 수월성 선발이 아니다. 당시 내가 외고 개혁을 앞장서서 주장하니 야당에서 굉장히 곤혹스러워했다. 자신들의 아젠다를 내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국 서울대 교수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쓴 ‘진보집권플랜: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책에는 ‘수구·보수 세력의 정치적 집합체인 한나라당 소속의 정두언 의원도 외고 폐지를 과감히 주장하는데, 스스로 진보·개혁 세력이라고 여기는 386 정치인이나 386 생활인들은 그것에 대한 목소리를 뚜렷하게 내지 못했다. 상상력이 빈곤해지고 관리자 모드로 들어가면 당연히 의제 설정의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라고 나와 있다. 

 

 

# 질시에 의한 반발 

 

이런 과정에서 한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다. MB가 외국 방문길에 올랐을 때다. MB가 박형준과 통화를 하던 중 “외고 문제가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박형준이 “사실 외고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친서민입니다”라고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MB가 “그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야지 왜 끌려가듯이 하느냐”면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MB가 귀국한 후 외고 개혁 관련 서별관 회의가 열렸다. 교과부도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리가 되고, 서별관 회의 내용이 어느 매체에 보도됐다. 다음날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MB가 ‘​이왕 할 것이면 정부가 주도적으로 하라’​고 정리를 했다. 

 

그런데 L 수석이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전혀 엉뚱한 얘기를 했다. MB가 포퓰리즘을 경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서별관 회의 기사와 L 수석발 기사가 상충됐다. 그래서 뭐가 맞느냐 하면서 오전 내내 청와대가 시끄러웠다. 확인을 해보니 L 수석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결국 오후에 L 수석이 스스로 나와서 바로잡았다. 개혁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기득권의 반발, 두 번째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세 번째는 개인적인 질시 때문이다. 누구의 정치적인 성과가 부각되면, 배가 아파서 일이 안 되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법이다. 

 

 

# 외고 최후의 저항으로 인한 절반의 성공

 

드디어 정부의 입장이 확정이 되고 이주호 차관의 주도로 외교 개혁을 위한 정부 용역이 발주되었다. 그런데 막판 걸림돌이 안병만 장관이었다. 외국어대학교 총장 시절 외고를 만든 안병만 장관은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의 후배인데, 정 실장은 안 장관에게 오더를 내려서 외고 폐지를 막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주호가 트릭을 썼다. 안을 두 가지를 만든 것이다. 

 

하나는 외고를 포기하고 자사고나 일반고로 전환하는 안, 두 번째는 외고를 살리는 대신 내실화하는 안이었다. 두 번째 안이 트릭인 것이 외고를 내실화하는 방안으로 학급당 학생 수를 3분의 2로 줄여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학교 운영이 안 되니, 일반고로 가든지 자사고로 가든지 해야 한다. 내용상으로 본다면 둘 다 없애는 방안이었다. 왜 차관이 트릭을 썼겠나. 장관의 반대 때문이다. 장관은 뭔지도 모르고 결국 2안으로 정리가 됐다. 발표가 되니까 외고에서 난리가 났다. 

 

한나라당 TF팀에서 회의를 하는데 이군현 의원이 오더니 학급당 학생 수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원래 교총 회장 출신이다. 이상하게도 대부분 의원들도 그에 동조를 했다. 결국 학급당 학생 수를 다시 올리게 됐다. 나는 이왕이면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결론이 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일대일로 만났다. 

 

늘 그렇지만 대통령을 만나면 얘기가 산으로 간다. 대통령 얘기를 다 들어주다가 시계를 보니까 면담시간이 10분 정도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 내가 “외고 이것은…”이라고 했더니 “외고? 그것 천천히 해도 되잖아?” 이러고 끝났다. 외고를 없애는 대신 입시를 없애고 중학교 1, 2학년 영어 내신만으로 선발하도록 해 특목고 입시학원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외고개혁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이 났다. 그리하여 외고는 막판에 간신히 살아났다.   

 

이명박 정부 때 사람들은 “MB가 문제다”고 하면, “그래도 대통령이 일은 열심히 하잖아”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다들 “그건 그렇지”라고 했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이 일을 열심히 하면 절대 안 된다. 대통령이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이다. 일이라는 게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대통령이 그 내용을 다 알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정보를 얻으려면 두세 시간씩 몇 번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한 안건으로 그렇게 오래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대통령은 대부분 내용을 잘 모르는 가운데 결정한다. 잘 모르고 결정하다 보니까 엉뚱한 방향으로 결정하기 십상이다. 나는 대통령에게 교과부의 외고개혁안은 외고 측으로부터 로비 받은 사람들 때문에 왜곡된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그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대부분의 정책 결정은 대통령이 아니라 장관, 차관, 국장이 해야 한다. 위임전결 규정이 왜 있나. 우리나라는 위임전결 규정이 다 형식적이다. 모든 것을 장관, 대통령이 결정한다. 그러니 아랫사람들이 책임을 안 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 다 보고했잖아요’ 이런 식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MB 정부 들어서 학자금 융자 정책을 의욕적으로 내놨는데, 활용이 저조했다. 그때도 몇 차례 개선을 하자고 해서 한나라당에서 조찬을 하며 당정회의를 했다. 다른 회의 때문에 늦게 참석해 결론을 들어보니 학자금 융자를 받으려면 B학점 이상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이 융자지 장학금이 아니지 않나. 나중에 갚으라는 돈인데 왜 학점을 따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금을 내기 힘든 학생들은 알바 몇 개씩 해야 하니 학점이 좋을 수가 없다. B학점으로 하면 정작 힘든 애들은 제도를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C학점으로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교과부 실장으로 있는 선배에게 “학자금 융자 왜 이렇게 됐어요?” 하고 물었더니 귓속말로 “대통령이 그대로 하라 그랬어요”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지시를 해요?”라고 소리치니 모든 사람이 쳐다보았다.

 

우리나라는 그런 것까지 대통령이 결정하는 나라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시간이 걸리는 것뿐 아니라 왜곡된다. 대통령이 일을 많이 하면 절대 안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장관, 차관, 국장이 결정하면 된다. 국장은 파악할 시간이 많다. 대통령은 어떤 일에 도사리고 있는 암수를 모른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외고개혁 문제도 “천천히 하지 뭐’ 이러고 끝내버리는 것이다. 정태근도 이렇게 평가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과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노무현 때부터 그것이 발동되기 시작해서 MB, 박근혜 정부로 오면서 대통령이 해야 할 큰일은 안하고 대통령이 하지 말아야 할 소소한 일, 특히 대통령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대통령이 되고 나니까 모든 일에 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보고받고 체크하고 하니까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국민들이 보기엔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 많다. 

 

 

# 행정고시 폐지 철회

 

2010년 8월 12일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행정고시 폐지를 들고 나왔다. 공직사회의 진입장벽을 무너뜨리고, 공직 문호를 열어놓는다는 취지였다. 발표당시 맹형규는 마치 한 건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행시폐지 철회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유명환 외무부 장관 딸 특채 사건이 터지면서 한방에 정리가 됐다. 그것 봐라, 폐지하면 저렇게 된다는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이후 정부는 당정회의를 거친 후 행시 폐지안을 백지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행정고시 폐지안에 대한 의견(2010. 8. 19)

 

행정안전부가 2010년 8월 12일 발표한 행정고시 개선안의 요지는 ‘행정고시’라는 명칭을 ‘5급 공채’로 변경하고 내년부터 선발 정원의 30%(2011년)를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전문가를 채용하며 이를 2015년에는 50%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전문가 채용시 자격증, 학위, 전문분야 경력을 고려해서 선발하게 됩니다. 

 

공직사회에 만연한 무사안일주의라는 고질적 병폐를 해소하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 충원방식을 다원화함으로써 전문인력을 간부 공무원으로 충원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 이 개선안의 취지입니다. 

 

하지만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정원의 절반(시행 첫해인 내년에는 30%)을 선발하는 개선안은 약 50 대 1이라는 치열한 시험경쟁을 통해 선발되는 일반 공채 선발자들과 형평성 문제가 야기됩니다. 

 

최대의 문제점은 이 같은 전문가 선발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자격증, 학위, 전문분야 경력 등을 기준으로 전문가를 채용할 경우 해외학위 취득자,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등 일부 전문직종의 공직 독점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같은 개인적 스펙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유층 출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저소득 서민출신의 공직진출 문호를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무시험에 의한 전문가 채용은 선발과정에서 학벌, 집안배경, 연줄 등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소수특권층의 위한 공무원 특채로 비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부모의 경제적 능력의 차이로 자식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등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이 점차 경직되어가는 상황에서 소수 상류층 자녀들의 공직진출이 유리한 행정고시 개편안은 행시를 통해 고위공직에 진출하려는 서민 자제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린 것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친서민 정책은 이번 행시 개편안으로 진실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밝힌 공정한 사회 구상과도 상치하는 부분입니다.

 

공정한 사회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습니다. 이번 행정고시 폐지안은 간부 공무원 채용의 절반을 무시험 전형으로 선발하겠다는 것으로 불공정한 공무원 선발 방식입니다.

 

전문가 공채는 현행 제도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특히 공무원 인사제의 개선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이 같은 행정고시 폐지안이 발표된 이후 인터넷 누리방에서는 현대판 ‘음서제도’의 부활이며 계층재생산구조의 완결판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분출하고 있습니다(음서제도는 고려, 조선시대에 실력이 없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고위 관리들의 자식들을 무시험으로 특별채용했던 방식으로 세도 정치가 창궐한 요인이 됐음).

 

행정고시 폐지안은 당정협의를 통해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합니다. 당의 친서민 정책에 배치됨은 물론이고 공무원이 되려는 많은 젊은층을 분노케 하는 행정고시 폐지안을 당정협의와 공론화 과정도 생략한 채 졸속으로 시행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에서는 행정고시뿐만 아니라 공직자 선발제도 전반을 전면 재검토한 개선안을 만들어 제시함으로써 친서민 정책정당으로서의 당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동남권 신공항 문제 또한 대통령 공약 사항이라 정부에서 외부용역을 통해 검토한 후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내가 대정부질문 때 신공항 공약의 철회를 주장하겠다고 했더니 보좌진이 다 반대했다. 대통령 공약 사항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앞으로 전당대회 치를 경우 영남의 지지도 받아야하는데, 표 다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대정부질문에서 질의를 했고, 역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결국은 정부는 나의 주장대로 신공항 백지화를 공식화했다.

 

□ 정두언 의원은 대정부질문에서 동남권 신공항 건설 문제 원점에서 재검토 해 볼 필요성 제기 (2011. 02. 28. 대정부 질문)

- 공항전문가들은 우리나라는 국토규모가 작고, 국내 실비행시간이 1시간 전후이며, 경쟁교통수단인 고속철도와 도로의 확대로 인해 새로운 공항의 국내선 수요는 제주노선을 제외하고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음.  또한  국제선수요는 부산 신항만을 연계한 물동량만으로는 동남권 신공항이 국제허브공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문임.  현재 인천국제공항이 국제허브공항으로서의 충분한 위상을 다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존의 인천공항마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큼. 더구나, KTX의 부산개통 이후 김해공항의 수요는 20%가량 감소한 것을 볼 때 이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음. 

 

□ 동남권 신공항 건설 사실상 백지화 (2011. 3. 27) 

- 정부가 최근 지역 간 마찰을 빚고 있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방안을 사실상 백지화하는 쪽으로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짐. 국토해양부 입지평가위는 그동안 동남권 신공항 후보지인 밀양과 가덕도에 대한 현장 실사 작업과 경제성 및 사회.환경 부문 평가 등을 벌인 결과, 두 후보지 모두 경제성이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임. 

입지평가위가 이 같은 결론을 내린다면 결국 현재의 두 후보지 모두 동남권 신공항에 부적합하다는 것인 만큼 이는 동남권 신공항을 사실상 백지화하는 수순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음.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무산될 경우 정부는 기존의 김해공항을 확장해 영남권의 공항 이용 수요를 충족하는 대안 쪽으로 선회한다는 입장임. 

 

당연히 부산과 대구에서 난리가 났다. 항의 버스도 올라왔다. 나는 그 전에 이미 대구 100인 포럼에서 강연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구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가기로 결심하고 대구에 가 택시에서 내리는데, 강연장 입구에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손보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강연을 시작했다. 

 

나는 정공법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동안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얘기부터 시작해서 내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를 소신껏 호소했다. 그리고 결국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강연을 끝냈다. 마침 ‘조선일보’ 기자가 따라와서 기사를 써서, 혈혈단신으로 적지에 들어가서 반발을 잠재운 얘기가 보도됐다. ‘매일신문’ 등 지역신문은 대구에는 정두언만 한 국회의원이 왜 없느냐는 사설도 썼다. 

 

조선일보 2011년 4월 12일 5면


 

#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파역을 하다

 

내가 MB 정권 때 정책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 중 하나는 원자력 안전성 문제였다. 2008년 하반기 원자력 전문가인 황주호 경희대 교수가 찾아와서 원자력의 이용 개발과 안전 규제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안 되어 있다고 했다. 국제규범에도 분리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바로잡아야지!” 마침 나는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2008년 10월1일 ‘원자력 사용의 미래, 과연 순조로운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그 후 의원실에서 외부에 용역을 줘서 12월에 ‘​안전 규제 체제 독립 방안’​ 정책보고서도 만들었다. 언론에 기고도 하면서 이슈를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됐다. 

 

그 이유는 주무부처인 교과부가 강력 반대했고, 곳곳에 반대 세력이 쫙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차례 세미나도 하고 간담회를 가지며 왜 반대를 하는지 들어보았으나 이해가 안됐다. ‘​이러이러해서 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꼭 지금 안 해도 됩니다’​가 반대하는 이유였다. 꼭 지금 안 해도 되는 것이 반대 이유면 지금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회에서 7월에 정태근과 함께 이에 관한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때 반대파들의 핵심이 교과부 원자력국장과 원자력안전기술연구원장이었다. 국회 국정감사 때 대덕 원자력안전연구원에 가 원자력 안전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 했으나 정부, 학계, 업계 모두가 완강히 반대를 했다. 그렇게 공전되다가 급기야 장관과 저녁을 먹으면서 설득을 했다. 내가 “결과적으로 공무원들 밥그릇 지키기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장관이 “교과부 일이 너무 많아서요. 더 줄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자기는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임위 때 얘기하면 다른 소리를 했다. 공무원들 얘기에 다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다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다. 청와대에서 난리가 나 2011년 3월 25일 당정협의를 했다. 대통령이 우리나라는 왜 안전에 대한 독립 기구가 없냐고 질타해서 결국 내가 낸 법안이 햇볕을 봤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정두언 최고는 선견지명이 있네요”​라고 했다. 이 법이 통과되고 2년이 지나 안전위원회를 신설하는데 듣자하니 위원장은 서울대 원로교수가 됐고, 부위원장에는 그동안 줄곧 반대하던 원자력안전기술연구원장이 내정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발생 이후 2011년 5월 17일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을 방문해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그해 국감에서 “원장은 2년 전 국감 때 분리하면 안 된다고 반대하더니, 이번에 원자력안전위의 부위원장으로 내정되었는데 맞습니까?” 했더니 자기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기록을 찾아봤더니 그렇게 얘기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도 자기는 그런 취지로 얘기 안 했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나 유명희 청와대 미래수석에게 전화해 그를 위증죄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미 내정을 한 상태라며 뛰어와 내게 참아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임태희 비서실장의 경동고 선배였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왜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당시에는 정말 미스터리였다.

 

그런데 2013년에 원자력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원자력 비리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왜 이제야 터졌을까? 안전위원회가 생기고 난 이후에 터진 것이다. 그동안은 정부, 학계, 업계가 모두 한 생태계 안에서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니까 서로 봐주며 쉬쉬하다가, 이용개발과 안전규제가 분리되니 이제야 책임 소재가 분명해진 것이다. 그제야 그동안 이들이 왜 그토록 반대했는지 이해가 됐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후쿠시마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고가 터지고 난 뒤에야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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