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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21] 나는 왜 2010년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졌나

MB가 ‘정두언은 뭐해? 전당대회도 안 나가고’라고 했지만 방해공작은 상상을 초월했다

2016.12.06(Tue) 11:24:33

# 전당대회에 출마하게 된 경위

 

청와대, 이상득, 이재오로부터 삼중 견제를 받은 나는 옴짝달싹 못했다. 정치적으로 움직이거나 뛸 공간이 없었다. 타이틀도 없이 혼자, 정책적인 측면에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언론이 많이 도와줬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실 내가 정부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당·정·청 관계나 여러 가지 역학구도 상 당에서 사무총장을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당에서는 전혀 사무총장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당시 당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이 마음대로 당을 쥐락펴락해야 하는데 내가 사무총장을 하면 녹록지 않다고 보고 내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사무총장이 되지 못한 데는 내 귀책사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권을 같이 만들었으면서 그 한자리도 주지 않고 내팽개쳐둔 것은 심했고 옹졸했다. 내 입장에서는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하는데, 때로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에서 내게 지방선거기획위원장을 맡으라고 했다. 물론 선거기획위원장은 소위 ‘끝발’이 있는 자리가 아니다. 책임만 있고 아무 권한도 없는 자리가 아닌가. 지방선거 공천은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당청 지도부가 알아서 했다. 나는 공천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했고 큰 틀에서 선거 분위기를 조성하고, 전략만 짰다. 그 당시 박형준, 김해수를 수시로 만나면서 긴밀하게 선거를 끌고 나갔다.

 

역대 선거 중 그때처럼 여론조사와 현장이 다른 적도 없었다. 여론조사 상으로 서울,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 다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나는 시종일관 지지도에서 10% 정도는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계속 경고를 주었더니 인천시장에 출마한 안상수 후보는 “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사기를 떨어뜨리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바닥 민심은 지고 있는데 이기고 있다는 판단 하에 선거를 치르니 당연히 질 수밖에 없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당시 개표 모습. 사진=비즈한국DB


지방선거가 끝나고 한 달여 뒤에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전당대회에 나갈지 말지 고민했다. 정권을 잡은 지 2년이 넘어가는데 아무 자리도 없이 있으려니 힘들었다. 뭔가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 핵심부에서 줄 생각을 안 하니 내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전당대회 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목디스크가 심해서 팔에 마비가 올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주말에 신재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통화 중 전당대회 얘기가 나왔다. 그 당시 전당대회에 나가는 사람들 중 친MB(이명박)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MB가 신재민과 얘기하다가 “정두언은 뭐해? 전당대회도 안 나가고”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목디스크 수술을 하기 위해 보라매 병원에 입원하기 전이었다. 신재민의 얘기를 들은 나는 ‘아, MB가 나에게 정부에 자리를 만들어 줄 생각이 전혀 없구나’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대를 버리고 바로 보라매 병원으로 가서 목디스크 수술을 했다. 2010년 6월 5일이었다. 수술 후 입원 중에 찾아온 김효재 전 의원이 전당대회 출마를 적극 권했다. 그는 후보자 중에 제대로 일할 사람이 전혀 없다고 애통해 했다. 그리고 퇴원한 직후인 6월 15일 나는 7·14 전당대회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출마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전당대회에 출마하며

 

지방선거가 끝난 지 10여 일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민심이 등을 돌렸는지, 우리는 왜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는지 아직도 멍합니다. 하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위기가 곧 기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내후년 총선에서 벌어졌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하면서 새롭게 태어난다면 우리는 다시 민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 정치사를 보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한나라당은 지금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변화를 한다면,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함께 내후년 총선의 승리와 정권재창출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참여정부가 2006년 지방선거 후에 걸어간 길을 그대로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한나라당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너무 ‘낡은 이미지​요, 또 하나는 기득권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보니 지난 대선 때 표를 주었던 중도세력과 젊은층들이 등을 돌려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변화의 방향은 마땅히 세대교체​와 보수혁신이 되어야 합니다. 

 

세대교체는 단순히 연령의 교체가 아닐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사고를 하는 것이 세대교체요, 젊은 층과도 소통이 되는 것이 세대교체입니다. 산업화시대의 사고방식과 꽉 막힌 행동양식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으며, 젊은 세대의 언어와 문화를 모르고서는 그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의 적당한 관리형지도체제가 자유롭고 유연한 자세와 함께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가진 자율적인 지도체제로 바뀌어야 진정한 세대교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수는 의무이행보다는 편법이 더 많고, 양보보다는 독식이 성행하며, 절제보다는 과시가 많아 보이고, 희생·봉사·기여보다는 외면과 회피가 엿보이며, 사회적 책임의식보다는 개인적 특권의식의 모습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한나라당이 이러한 기득권적 보수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나라당은 보수의 기본 가치인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바탕으로 앞으로 의무, 절제, 양보, 희생, 봉사, 기여, 책임을 실천하는 보수 혁신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장과 효율의 이면에 가려진 낙오되고 소외된 우리 이웃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이번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이 세대교체와 보수혁신으로 거듭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반(反) 대한민국 세력과는 강력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일부 사회의 진전도 있었지만 사회의 적폐가 심화되었습니다. 국가 안보의 해이, 떼법과 무법질서, 사회 부패세력의 만연 등이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선거에 졌다고 대한민국과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와 원칙마저 흔들릴 수는 없습니다.

 

한편, 한나라당은 이번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정·청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재정립하여야 합니다. 당은 정부를 지원하되 견제할 것은 확실히 견제해야 합니다. 당은 청와대의 의견은 존중하되 청와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정권 재창출은 정부가 아니라 당이 하는 것입니다. 임기 후반기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한나라당이 반드시 국정운영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2010년 7월 14일 열린 11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상득 의원이 정두언 의원의 정견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비즈한국DB


저 정두언은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간 자리(職)보다는 일(業)에 충실하며 늘 당당하고 떳떳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존심과 의리를 지키는 정치의 모범을 보이고자 애도 써 보았습니다. 정치에 대한 딱딱한 이미지를 바꾸고자 무대에 올라 파격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워치독(Watch dog) 역할을 하며 할 말을 하느라 애써 양지를 피해서 고단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저의 길을 분명하게 걸어가려 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에 일조를 한 저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에 무한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성패가 걸린 이번 전당대회에 나가 한나라당이 세대교체와 보수혁신 그리고 당 중심의 국정운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데 앞장서고자 합니다.

 

아직 50대 초반 재선이고, 부족한 게 많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역사 앞에 정면 승부한다는 마음으로 당대표 경선에 나섰습니다. 노·장·청의 조화를 이루면서 한나라당을 젊고 활력 있는 정당으로 만들 열정과 자신이 있습니다.

 

따뜻한 관심과 따끔한 질책 모두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 6. 15.

국회의원 정두언 올림

 

 

# 사면초가에서 치른 전당대회

 

나는 거론되던 후보 중 제일 먼저 출마를 선언했다. MB가 신재민에게 한 말도 있고 하니 적극적인 지원은 아니더라도 방해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전당대회가 시작되니 이재오, 이상득, 박영준 등이 다 방해하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였다. 대통령선거와 총선 등을 거치며 내가 많이 챙겨주고 아껴준 후배들이 내게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 

 

거기에 더해 내 주요 득표 거점 지역 중 하나였던 호남표를 분열시키기 위해 호남 출신에 선진국민연대의 핵심이었던 김대식까지 출마시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나는 이상득을 만났다. 김대식 문제를 얘기하면서 “김대식을 주저앉혀라. 김대식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 대통령 뜻이겠냐? 누구 뜻이냐?” 하면서 강하게 따졌다. 우리 캠프에 국회의원이라고는 정태근과 김용태, 두 명밖에 없었다. 직간접적인 온갖 압력으로 사람이 붙지 않으니 무슨 수로 전당대회를 치르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루는 내가 캠프에 나가기 싫어서 꾸물거렸더니 아내가 “​당신 왜 그러냐?”​라고 했다. 그래서 “​진짜 선거 운동 하기 싫다. 때려 치고 싶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생각해보라. 우리가 정치 시작할 때 뭐가 있었냐. 배경, 돈, 조직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고 했다. 그즈음 정태근과 박재성이 이런 식으로 하면 도저히 안 되니 남경필과 단일화를 하자는 얘기를 할 때다. 

 

그래서 그날 결심을 하고 밤에 남경필을 만났다. 남경필에게 단일화하자고 했더니, 그는 “​형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때는 단일화를 하면 무조건 내가 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은 나도 내심 포기하려고 단일화 시도를 한 측면이 있다. 2010년 7월 9일 나는 남경필과 후보를 단일화를 하기로 하고 합의문을 발표했다. 정태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전반적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은 2009년 벽두부터 미디어법을 국회에 기습 상정했다. 언론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했고 여야는 미디어법 처리를 놓고 7월 중순까지 갈등을 계속했다. 7월 22일 이윤성 국회부의장은 미디어법을 직권 상정해 표결 처리했다. 이에 반발한 민주당은 미디어법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장외 투쟁에 돌입했다. 민주당은 헌법재판소에 미디어법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 및 국회의장에 대해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

 

MB는 2009년 정운찬 총리를 임명하는 개각을 통해 국면 전환을 꾀했다. 그러나 정운찬의 등장과 세종시 수정안 논란으로 여야 간, 또 여권 내 MB세력과 박근혜 세력 간 대립은 점차 격화됐다. 2009년 10월, 다섯 곳에서 실시된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 참패했다. 그 해 12월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며 민심은 더욱 싸늘해졌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패배는 이런 민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지방선거 직후 치러진 2010년 7월의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무언가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열렸다. 정두언은 이런 흐름을 읽고 변화와 쇄신, 화합을 주장했다. 

 

당원과 일반 국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일반 국민 대상 여론조사는 남경필이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내가 계산을 해보니 당원 여론조사에서 정두언이 4%만 앞선다면 최종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론조사가 이루어지던 날 오전 누군가 조해진, 권택기, 김영우 등이 10시쯤에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말을 해줬다.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 전당대회에 나가서는 안 된다. 즉 정두언은 지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그래서 권택기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도 연락을 받았는데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배후에 이상득이 있다고 보고 이상득에게 전화를 했다. 이춘식에게도 전화했는데 역시 안 받았다. 결국 박형준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큰 소리로 이럴 수 있냐고 따졌다. 만약 이 움직임이 그대로 진행이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 공개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춘식이 전화를 해왔다. 이춘식한테도 한바탕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효과가 있었다. 성명을 내려던 국회의원들의 움직임은 중단됐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 나고 분위기 안 좋을 때 평소 내가 아끼던 한 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와 프라자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형님 좀 참으시고~” 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데 참을 일이 아니다, 앞으로 큰일이다”라고 격앙해서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가 “형님! 계속 그러시면 우리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에요” 그러는 것이다. 이상득측에서 보낸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봐! 어떻게 되나.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당장 안하면 내가 너부터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랬더니 아무 소리를 못했다. 

 

2010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두언(왼쪽), 남경필은 후보 단일화를 선언했다. 사진=비즈한국DB


어쨌든 남경필과의 후보단일화에서 내가 이겼다. 그날 오후 박형준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박형준 정무수석은 “형, 더 이상 청와대를 공격할 필요도 없어요, 박영준을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국정농단에 대한 문제제기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더 뭘 하겠냐”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박영준은 지경부 차관으로 영전을 했다. 박형준 수석이 내게 허언을 했을 리는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퍼져있을 때였다.

 

 

# 우여곡절 끝에 지도부에 입성하다

 

전당대회 기간 중에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다. 민주당은 박영준, 이영호 등 선진연대 핵심 인물들이 호텔에서 비밀리에 상시 모임을 갖고 국정을 농단했다고 주장했다. 국정농단이 이슈가 되니 우리 집 앞에 기자들이 뻗치기를 했다. 밤늦게까지 뻗치기 하던 동아일보 기자가 애처로워 “​차나 마시고 가라”​고 했는데, 그 기자가 내 속을 긁었다. 그래서 내가 흥분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다음날 그 내용이 아침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나는 졸지에 또 트러블 메이커가 돼 버렸다. 정태근은 나 때문에 못 해먹겠다며 소리를 높였다. 할 말이 없었다. 

 

한겨레 자리

 

전당대회 기간 중에 민주당은 박영준, 이영호 등 선진연대 핵심 인물들이 호텔에서 비밀리에 상시 모임을 갖고 국정을 농단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이를 보도한 한겨레 기사.


집 앞에서 뻗치기 하던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다음날 아침 그 내용이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전당대회 전날 연설 연습을 하는데, 정태근, 김용태는 내가 연설을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전날부터 와서 나를 달달 볶았다. 그래서 원고를 써서 밤 10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원고를 읽으니까 내용은 좋은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정태근, 김용태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웅변조의 통상적인 스피치는 잘 못하지만 행사장에 다니면서 하는 즉석연설은 나름 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통상적이지 않게 말하고, 알맹이 있는 얘기만 한다. 그게 보통사람이 보면 연설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내 고집대로 한다. 

 

사람들은 내가 연예인이란 것을 간과한다. 연예인은 사람들이 모이면 기분이 업(up) 된다. 가수들은 관객이 100명, 1000명, 1만 명일 때 노래 부르는 게 달라진다. 전당대회장에 가면 사람들이 꽉 찬다. 내가 생각해도 그날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진짜 잘했다. 분위기가 좋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평가했다. 전당대회를 치르며 의외로 전국적으로 내 팬이 많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서 김창균이 ‘조선일보’에 ‘정두언의 회생’이라는 칼럼을 썼다. 김창균이 나의 역정을 얘기하면서, 한편으로 가볍고, 즉흥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내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썼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조선일보’에 실린 ‘정두언의 회생’이라는 칼럼.

 

전당대회에서 안상수 대표는 대의원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총 4316표를 얻어 1위를 기록했다. 최고위원으로는 나와 홍준표, 나경원, 서병수 의원이 각각 선출됐다. 홍 의원은 3854표를 기록해 2위를 차지했다. 이어 나 의원이 2881표로 3위, 내가 2436표로 4위, 서 의원은 1924표로 5위를 각각 차지했다.

 

 

# 전당대회의 후유증

 

전당대회 때 당에서 도와준 사람이 김문수과 황우여다. 그 전 원내대표 선거 때 황우여를 안 되게 한 사람이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우여가 도와줬다. 그때 황우여는 앞으로 정국 흐름이 바뀔 것을 예상하고 나 같은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성공을 한 셈이다. 김문수는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에게 나를 도우라고 해서 차명진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김문수의 아내가 ‘가수 정두언’ 팬인 것도 작용했는지 모른다. 

 

나는 전당대회 중 후보들 간 토론회를 할 때 김대식에게 여러 차례 지명직 최고위원을 하지 왜 출마했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지명직 최고위원은 절대 안한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그런데 전당대회가 끝나고 지명직 최고위원 두 자리를 임명하는데, 안상수가 한 명은 박성효, 한 명은 김대식을 추천하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혀서 “제가 대표님 잘 도와드려서 일 좀 하시게 하려고 했더니 제 뺨을 때리시면 됩니까?”라며 항의했다. 

 

이에 안상수는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라며 곤혹스러워했다. 청와대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얘기였다. 기가 막혔다. 전당대회 중간에 그만둘 테니 청와대 수석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한 사람에게 최고위원직을 준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상수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김대식 최고위원 카드’​를 철회했다. 그때 안상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 내가 하고 싶어서 하자는 것 아닙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개표 당시 한나라당 상황실에 모인 사람들. 당시 한나라당은 참패를 기록했다. 사진=비즈한국DB


지방선거가 끝나고 일주일 만에 MB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에 양경자 전 의원을 임명했다. 장애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여의도에서 천막농성하고 단식하고 난리가 났다. 고려대 법학과를 나온 양경자는 MB의 서울시장 선거부터 대선까지 특보, 홍보 부위원장을 맡는 등 이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였다. 지방선거에 졌으면 총선, 대선을 생각해서 민심 달래기를 해야 하는데, 지방선거 이후 첫 번째 인사로 장애인 전체에 대해 뺨을 때린 격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7월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태까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거의 모든 장애인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들고 일어났다. 알다시피 장관 집에, 이사장 집에 공단을 찾아가서 천막 농성을 벌이면서, 선거에 지고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이 정부의 현실이다. 이 일은 반드시 바로잡아져야 하고 이 일이 바로잡아진다 한들 이미 상처받은 장애인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돌리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나. 그런데 이런 일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당 중심의 국정운영이 되어야지 우리가 이 정부를 성공시킬 수도 있고 정권재창출을 반드시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새삼, 재삼 강조한다. 앞으로 이명박 정부 임기 후반기는 반드시 당 중심의 국정운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경자 씨는 결국 5개월인가 끌다가 11월 18일 결국 사퇴했다. 양경자 씨는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나. 그런데 양경자 씨는 내가 검찰 수사를 받을 때에도 여러 번 전화를 했었고, 구치소에 갔다 와서도 만났다. 그래서 내가 “누님한테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고 그랬다. 그런데 양경자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문자로 ‘나는 누가 뭐래도 항상 정 의원 팬입니다’ 그러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장난하나, 놀리나 생각했다. 그런데 구치소에 갔다 와서 만나보니 그 말이 진심이었다. 본인도 모처럼 자리 하나 얻었는데, 내가 그걸 쫓아내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 팬이며,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다. 그분은 지금도 가끔 전화해서 격려해준다.

 

 

# MB의 개헌추진에 반대하다

 

전당대회 이후 청와대에서는 개헌을 추진했다. 이재오가 앞장섰다. 나는 민생이 실패했는데 무슨 개헌이냐며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홍준표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2010년 2월 20일 MB가 청와대에서 저녁 먹자고 최고위원들을 불렀다. 밥 먹으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결국 개헌 얘기였다. MB는 개헌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콧방귀도 안 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려고 내부순환로를 가고 있는데 홍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전 8시 반쯤이었다. “MB가 개헌 의지가 강하더라. 아무래도 내가 좀 도와줘야겠다”라고 했다. 내가 “그러세요. 도와주세요.” 했더니 “너, 나 씹지 마라.” 했다. 나는 “형, 내가 왜 씹어. 언론이 알아서 씹을 텐데”라고 답했다. 

 

홍준표는 그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마이크를 잡고 개헌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개헌을 반대하더니 어쩌면 저럴 수 있는가 싶었다. 그래서 최고위원 회의가 끝난 뒤 기자실에 가 개헌에 대해서 나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 하나도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 언론은 그날의 풍경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회의에서 개헌특위 설치가 의결되기 직전 정두언 최고위원은 "나는 개헌 논의에 끼지 않겠다"고 반대 의사를 확실히 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바로 뒤 정 최고위원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권의 개헌 추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 최고위원은 "과학비즈니스벨트와 동남권 신공항 입지 문제 등 국정혼선이 심각해지고 있다"며 "개헌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게 민심이고, 개헌이 비록 국가 백년지대계라고 할지라도 '안 될 것이 분명한데 무슨 꿍꿍이냐'는 것이 민심"이라고 말했다. 

 

정 최고위원은 이어 "개헌을 필요하지만, 아무리 옳아도 민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도리가 없는 법"이라며 갑신개혁(정변)이 옳았지만 민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안 되지 않았느냐"고 강조했다. 정 최고위원은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난다"며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많이 먹지 않았느냐)"라고도 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헌 논의가 친이계 일각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위한 일방적인 국정운영이라는 점에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이렇게 민심과 달리 가면 '딴나라당' 소리 들으면서 민심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분명한 저의 입장을 밝힌다"고 말한 정 최고위원은 '하루 전 대통령 만찬 이후 최고위원들의 입장 변화가 생긴 것이냐'는 질문에는 "모르겠다. 밥 한끼 먹었다고 입장이 바뀌겠느냐"고만 답했다.

 

MB 입장에서 보면 내가 정말 미웠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리석었다. MB가 그렇게 한다고 개헌이 되나. 어차피 안 될 것을 가만히 놔두면 될 텐데 왜 들이박고 그랬을까. 내가 스스로 매를 번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공식적으로 개헌이 추진되기 전 이재오가 난데없이 당이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범친이계를 불러 모았다.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의원들이 스물댓 명 가까이 모였는데, 나는 불러주지 않아 그 자리에 없었다. “세종시 수정안이 무산되고 지방선거에서 졌으니 우리가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게 개헌이다”라는 것이 이재오의 얘기였다. 어떤 경우는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개헌이라는 메시지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메신저를 잘못 쓰면 그나마 더 안 된다. MB가 개헌으로 정국을 주도하고 싶었다면 이재오를 메신저로 쓰지 말아야 했다. 전혀 전략적이지 않다. 훗날 이재오를 만나서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대표님! 진짜 개헌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대표님 빠지세요. 될 일도 안 됩니다”라고.

 

나는 어쨌든 최고위원이 되자마자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교체, 개헌반대 등 MB 정부의 잘못 가는 길에 제동을 거는 일에 앞장을 선 꼴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역할은 추가감세철회, 외고개혁, 원자력안전위원회 신설 등 MB 정부의 정책기조를 바꾸는 일로 이어졌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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