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초로 기억한다. 당시 삼성 전략기획실 김 아무개 부장은 나를 전경련 홍보실장(상무급)으로 추천, 이승철 전경련 전무와 면접을 보았다. 나는 홍보대행사 사업이 기울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도 고려하고 있었다. 전경련 박 아무개 인사담당 부장이 배석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 전무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기자를 몇 명이나 아느냐, 구체적으로 모 매체의 누구를 아느냐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면접이라기보다는 시비를 거는 것으로 느껴졌다. 삼성 김 부장이 사전에 충분하게 조율을 하지 않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경련은 예산의 상당부문을 삼성에 의존하고 있었고, 전경련 내 본부장급을 포함 상당수가 삼성경제연구소 등 삼성 출신이었다. 전경련은 김 부장이 좌지우지하는 모양새였다. 그 이전, 김 부장 소개로 삼성이 설립 및 운영에 상당히 관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민단체와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의 홍보를 수개월씩 맡아했다.
당시에도 삼성에 안티였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 대항해 양 단체의 논리를 언론에 확산시키는 게 나의 임무였다. 브랜드가 약했던 두 단체의 논리를 참여연대와 신문 지면에 동등하게 배분하는 결과를 거두었다.
# 국가적 재난의 중심에 선 삼성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최순실 씨가 개입한 것으로 확인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과 관련,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최초,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획이었다고 진술했다가 검찰 조사 전후 과정을 통해,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지시였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부장 시절부터 전경련을 담당해오고 있는 김 아무개는 여전히 삼성 미래전략실 소속 임원으로 최고경영진 반열에 올라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직접적으로 전경련을 통제할 수단은 없다. 전경련이 경제수석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 경우에 따르는 직접적인 반대급부는 없다. 그렇지만 삼성의 의향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산 출연 등에 불이익이 따를 것은 분명하다.
이승철 부회장이 말을 바꾸는 과정에서 사실상 상위 부서인 ‘삼성 미래전략실의 지시다’고 말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검찰 수사가 삼성과 전경련과의 특수한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최순실 게이트’ 수사의 방향이 다른 데로 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삼성은 11월 초부터 특검에 대비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에는 대외협력이라고 불리는 업무 영역이 있다. 과거에는 ‘섭외’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삼성의 상무급 이상 임원들은 자신이 속한 계열사나 수행 업무와 상관없이 그룹 공통 현안은 상시적으로 대외협력 업무를 하고 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이들 대외협력 조직은,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고 난 뒤 삼성가 이재용 3세 지배구조 완성을 위한 업무가 최우선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성사였다. 헤지펀드인 미국의 엘리엇펀드의 합병 반대 주장에 대응해,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녔고, 합병동의서를 받아냈다.
합병 통과의 결정적인 역할은 삼성물산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해냈다. 최순실 게이트의 확산으로 이때의 합병 건이 특검 대상이 될 전망이다. 삼성이 정치권력에 불법 로비를 했고, 정치권력이 국민연금에 합병을 종용토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이 수사를 통해 밝혀진다면 이재용으로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도 있다.
삼성은 금년 들어 엘리엇펀드의 주주 제안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하고 잉여현금흐름의 상당분을 주주에게 배당하는 안이다. 특검이 출범하는 시점에서 삼성전자가 지주사로 전화하는 배경은, 야당이 기업 분할시 기존 자사주에 대해 분할신주를 배정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상법개정안을 발의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은 국민연금 유착과 관련한 시민사회의 반발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12월 1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청원인을 모집해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고등법원 판결에서는 삼성물산의 주식매수청구 가격이 지나치게 낮게 평가됐다는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가격 선정 기준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발표 시점이 아닌, 그전 6개월 평균으로 봤다. 대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난다면 삼성은 대규모 손해배상 등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의 적용도 가능하다는 여론도 있다. 한편 이를 결정한 삼성물산 경영진은 배임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 이재용 체제가 지속될 것인가
삼성은 최근에 미국의 카오디오 회사 하만을 80억 달러에 인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해당 사업이 전장 사업이라고 주장하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더라도 하만은 해당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시장 점유율을 지니고 있어 의미는 있다. 그러나 인수 금액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수준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삼성전자의 지주회사 전환 추진, 하만 인수의 공통점은 ‘자산의 해외 이전’이다. 최순실 게이트 확산으로 삼성이 최순실 일가와 더불어 공범 수준을 넘어 주범으로 거론되는 상황에서는 적절한 조치들이 아니다. 삼성에 관한 국민들의 부정적인 프레임 포지셔닝을 이동하는 수단으로도 적절하지 않다. 특검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기득권 정치 세력과 같이 척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시점이다.
대기업에서 대외협력 업무를 하는 이들은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외환경 때문에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며 주말에도 쉬지 못해 만성 피로에 젖어 있다고들 한다.
기업의 대외협력은 민간 부문을 잘 이해 못하는 실무 공무원들에게 합리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쳐야 되나, 그 공무원이 가진 권한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용케 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하물며 국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의 비선실세의 영향력을 이용, 글로벌 기업의 지배구조 승계와 같은 대가를 얻어냈다면, 용서받기 힘든 국가적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 된다.
삼성의 주요 최고경영진들이 최순실 게이트의 주역으로 언론 지상에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최순실 게이트가 이재용 부회장에게 직접 불똥이 튀거나 삼성가 지배구조 완성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경우를 방어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주축이 되어 검찰 수사나 특검 수사를 왜곡하기 위해 또 다른 대외협력 업무를 하지 않기 바란다. 한국 언론계를 좌지우지 하는 삼성의 홍보 조직은 여전히 ‘최순실-박근혜-이재용 게이트’와 관련, 부정적인 보도가 나오면 기사의 축소, 삭제 등 구태의연한 행위들을 하고 있다.
아울러 삼성그룹 내에서조차도 이번 일을 초래한 미래전략실 조직의 무용론이 나오고 있다는 전언이다. 청와대 및 정부 요직의 관련자들이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삼성은 특검 이전이라도 주말에 190만 명이 시내 도심에 촛불을 들고 나오게 한,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 최고경영자의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제적인 사과나 해명, 관련자들에 대한 인사 조치가 필요하나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삼성은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야기된 조준웅 특검의 수사 발표 직후 그룹 혁신 조치들을 발표했으나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름만 바뀐 미래전략실 조직을 중심으로 유사한 잘못을 저질렀다.
여하튼 최순실 게이트 연관성 자체도 큰 문제지만, 이건희 회장 동영상 유포, 갤럭시 노트7 폭발 사고등도 경영전면에 나선지 3년여가 다 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로서 적합한지 판가름해야 될 때가 왔다.
심정택 ‘삼성의 몰락’ ‘이건희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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