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범적인 가장이 중년에 들어 애인이 생겼다. 두 사람 사이가 깊어지면서 심각한 내적 동요가 발생하자 장성한 아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야속하게도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았다. 가장은 고심 끝에 애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이 분야의 베테랑인 소설가와 시인에게 최적의 이별 통보 방법을 물었다.
먼저 소설가의 처방은 돌직구였다. “진지하게 설득하라. 이미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니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반면 시인은 감성적 변화구였다. “그저 아무 소리 말고 울어라. 왜 우느냐고 물어도 답하지 말고 마냥 울기만 해라.”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은 남자가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있는 눈물”이라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던 해에 태어난 68세의 노학자가 동서양의 명저를 두루 섭렵해 한국판 ‘남성학 개론’을 펴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헌법학자의 저서라 믿기지 않을 만큼 초반부터 농익은 성적 담론을 길게 풀어놓았다. 아마도 ‘남자란 무엇인가’는 그가 지금까지 출간한 52권의 책 중에서 가장 ‘튀는’ 물건으로 남을 듯하다.
사람의 성격은 유년기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서울 태생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경남 밀양에서 다녔다. 얼마 전 그가 살았던 밀양의 광주 안씨 종택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벼슬보다 지조를 중시하는 재야 선비의 가풍이 완연했다. 저자는 ‘남자란 무엇인가’의 행간 곳곳에 자신의 몸에 체화된 ‘양반’의 자부심을 복선으로 깔아두었다.
‘남자란 무엇인가’는 남자의 생물학적 본성에서 시작해 성, 결혼, 사회를 거쳐 남자의 눈물로 이어진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한 X-Y 염색체 품평처럼 들리지만, 저자의 광범위한 독서량과 인맥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비화들도 적지 않다. 재벌가의 금수저가 첫 사랑 여인의 이름을 어떻게 간직하는지까지 저자는 영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고급스런 문장으로 버무렸다. 그는 섹스나 불륜 같은 소재조차 인문학의 관점에서 수려하게 해석하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저자는 분명 이 책을 통해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노렸다. 제목과 소재 모두 그동안 구축해온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담장을 살짝 넘어간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내용을 차근차근 뜯어보면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운동장을 성찰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하고 모병제 도입 필요성을 역설하고 세월호 참사에 분개하는 장면에 이르면, 그가 지향하는 남성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인권 사각지대 중에 정신장애인이 있다. 장애인 중에서도 지체장애인은 자체 동력이 있고 우호세력도 강력하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은 가족마저 외면하는 고립무원에서 편견과 싸워야 한다. 수년 전 현직 부장판사가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에 기고하고 ‘커밍아웃’을 선언해 파문이 일었는데, 저자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사자에게 직접 연락해 격려하고 국제정신건강 법률가단체의 자문위원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저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그만두기 직전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일도 정신장애인 국가보고서 발간 사업이었다.
인권문제에 관한 한 저자는 거대담론보다 일상의 변화에 더 관심이 많다. 그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여학생 비율이 20%를 넘어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여교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대 법대 제1호 여교수 채용을 밀어붙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봄 여성단체가 주는 ‘여성인권 디딤돌상’을 받았다.
저자는 20세기까지가 ‘남자의 시대’였다고 간주한다. 먼 훗날 전쟁, 약탈, 경쟁, 폭력이 지배하는 승자독식의 우울한 그림자가 걷히고 나면 ‘여성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남녀를 구분하기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공감과 소통 능력일 것이다. 타인의 상처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남자, 꺼지지 않은 연탄재처럼 온기를 품고 사는 남자, 저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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