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늦은 당선 축하금
“식사나 합시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서 촛불정국의 혼돈이 정리되어 가던 2008년 추석 무렵, MB(이명박 대통령) 원로그룹의 한 분인 C 씨의 전화를 받았다. 2008년 9월 8일, 조선호텔에서 C 씨와 조찬. 보통 호텔에 가면 종업원이 메뉴판 들고 와서 “특별히 필요한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는데, 이 당시 조선호텔에는 ‘C 씨의 메뉴’가 따로 있었다. 매일 아침 거기서 운동 후 아침 먹고 출근하는 것 같았다. 그날 C 씨는 내게 대략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정신 차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헤맨 이유가 당선 축하금을 안 받아서 그렇다. 당선 축하금을 받아 뿌렸어야 이런 일이 있어도 지지자들이 총대 매고 나서서 적극적으로 수습을 하는데, 통치자금을 안 걷고 안 뿌렸더니 불만이 많다. 인사에 소외당한 사람들을 돈으로라도 무마를 했어야 했다. 이런 불만이 누적돼서 촛불 사태를 막지 못하고 곤욕을 치렀다.”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 축하금이라니! 사안을 보는 인식이 너무 군사정권 식이었다. 조찬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그분은 “차에 뭘 좀 실었다”고 말했다. 추석도 다가오고 하니 과일 상자를 실었나 보다 생각했다. 의원회관으로 돌아와 트렁크에서 박스를 내려 확인해보니 과일상자가 아니고 현금 상자였다. 현금 20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돈을 모두 돌려보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정태근, 김용태도 액수는 나보다 작지만 그분으로부터 돈봉투를 받았는데 돌려보냈다고 했다.
#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음모
‘C 씨 돈 상자’ 같은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던 2008년 하반기, 청와대는 권력기관장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정가에는 청와대가 권력의 기강을 잡기 위해 권력기관장 세 명 중 하나만 남기고 교체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소위 ‘사정라인 빅3’는 MB 정권이 출범한 뒤에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A 청장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B 청의 고위 인사가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청장이 이상하다. 멘붕 상태인 것 같다”는 것이다. 뒤이어 B 청장이 아웃될 것 같다는 얘기가 다른 라인을 통해서 들려왔다. 나는 B 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두언: 청장님,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B 청장: 그 XX가 권력기관장 한 명 남기고 교체한다고 하니까 나를 씹었어요.
정두언: 그 XX가 누군데요?
B 청장: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하겠어요? 다 알잖아요.
B 청장이 얘기한 인물은 A 청장이었다. 권력기관장 교체설이 나오니 A 청장은 박연차를 잡으면 노무현을 잡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박연차가 회장으로 있는 태광실업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선제 대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실마리가 나오니 대통령한테 일정을 잡아달라고 해서 단독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한다. ‘조사를 대강 해봤더니 노무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B 청장도 나왔다’는 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밝혀지기 전에 B 청장을 미리 사퇴시켜야 하니 ‘빨리 사표 내!’ 이렇게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S 은행장이었던 S 씨가 동향 출신인 가까운 한 인사에게 한 이야기가 있다. “정두언 의원에게 전해라. 내가 권력실세에게 돈을 줬다. 그런데 검찰에서 그것을 무마시켰다.” 내막은 이렇다.
박연차를 조사했더니, S 금융지주 회장이 박연차에게 50억 원을 준 것으로 확인이 됐다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 기업을 하는 박연차가 S 은행의 회장에게 돈을 준다면 몰라도, 그가 박연차에게 돈을 주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안가는 일이다. 그 돈은 내용상 그가 권력자에게 준 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조사결과에서 뺐다. 당시 권력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을 때인데 왜 뺐을까? 불편한 사람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그때 발견된 전체 금액은 200억 원이었다. 한꺼번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50억 원은 권력자에게 갔고, 나머지는 상당 부분 소위 새로운 권력실세에게 갔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S 은행의 회장과 사장의 갈등이 시작됐다. 당시 S 은행 회장이 회장을 세 번 하고, S 행장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준다고 했는데, MB 정부 들어서면서 마음이 또 바뀐 것이다. S 행장이 보기에 회장이 계속할 것 같으니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한다. 이런 와중에 회장의 심복인 L 씨가 S 행장의 비자금 10억 원을 조사해서 검찰에 제보했다. S 행장은 “그 돈은 회장의 지시로 만들어 회장에게 줬다”라고 진술했다 한다. 이 돈 가운데 2억 원 정도가 새로운 권력실세들에게 갔다고 알려졌다. 원로인 C 씨가 당선 축하금을 운운하던 무렵이었다.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부 이후에 두 번의 권력 교체가 있었다. 야권으로 권력이 넘어갔다가 다시 여권으로 넘어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은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밟고, 탄압해야 한다는 기조로 바뀌었다. 선거 때는 국민 통합을 내걸었지만 집권만 하면 싹 잊어버렸다. MB 정부도 촛불 사태 이후 국민 통합이 아니라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갔다. 촛불사태를 겪고 난 뒤 저 사람들은 화해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 핵심이 노사모이고 친노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본질적으로 대통령 비자금의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YS나 DJ는 상대방의 비자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MB 정부는 수세에 몰리니까 상대방을 치기 위해 비자금 영역을 건드렸다. 그것을 기획한 인물이 A 청장이다. 그가 그렇게 기획을 했더라도 적어도 대통령이나 민정수석, 정무수석, 비서실장 정도는 이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판단을 해야 하는데, MB 정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소위 권력과 자금의 관계가 국정운영에 어느 정도 비중이 있고, 이것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이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 대한 국세청 조사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이 구명 로비를 했다. 추부길은 2007년 대선 직전 이상득과 노건평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내게 말한 인물이다. 추부길은 나를 찾아와 박연차가 억울하다는 듯 구명 비슷한 말을 했다. 2009년 4월 12일 ‘중앙선데이’ 기자에게서 “추부길 전 비서관이 정 의원에게 ‘대통령 패밀리까지는 서로 건드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 쪽 패밀리에는 박연차도 포함시켜 달라’는 노건평 씨의 부탁을 전했다는데?” 하고 취재가 들어왔다.
나는 “추 전 비서관이 북한 다녀온 소식도 전하고(추 전 비서관은 북관대첩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자격으로 2008년 10월 북한에 다녀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나온 말이다. 노건평 씨가 박연차를 그쪽 패밀리로 해달라고 했다는 말에 그냥 웃고 말았다”고 답했다. “나는 그때 고단한 처지에서 도를 닦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웃으면서 그런 얘길 한 것이다. 나는 그 당시에 로비를 당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고도 했다. 추부길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맞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힘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나는 당시 추부길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제정신인가 생각했다. 그 시점에서 박연차를 살려달라는 로비가 통하겠는가. 돌이켜보면 자신이 급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박연차로부터 자기 얘기가 안 나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기가 뭔가 하고 있다, 그를 위해 뛰고 있다는 것을 박연차에게 보여줘야 했던 것 같다.
다 알다시피 박연차 회장에 대한 수사는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사실 당시 권력 내부에서도 박연차 회장에 대한 수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다보는 이는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의 딸과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검찰에서 나올 때까지도 그랬다. 2009년 4월 보선에서 참패한 정부는 노무현에 대한 수사로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칼끝은 노무현을 향해 갔던 것이다.
# 쇄신정국으로 노무현 서거 파고를 넘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서거 정국’이 조성되면서 MB 정권은 제2의 촛불사태가 일어나지 않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말도 함부로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와 남경필-정태근 등 이른바 ‘정·남·정’은 노무현 서거정국을 이렇게 둬서는 안 된다, 반전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국정을 쇄신하는 길밖에 없었다. ‘박희태 당 대표 사퇴→청와대 개편→정부 쇄신’으로 이어지는 그림을 그렸다. 쇄신의 전제는 박희태 대표 등 지도부가 사퇴하는 것이라는 데 공감하고 남경필의 방으로 의원들을 불렀다.
나와 정병국, 권영세, 주호영, 원희룡, 남경필, 정태근, 김용태 등이 모였다. ‘박희태 사퇴’에 공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실천에 옮기자”며 박희태 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김효재에게 전화를 했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즉시 당 대표실로 갔다. 대표실에 도착했을 때 정병국, 주호영은 보이지 않았다. 권영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표님! 빠른 시일 내에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얘기를 듣는 박희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쇄신을 몰고 가던 2009년 5월 30일, 나는 진수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재오가 저녁을 먹자고 한다는 것이다. 은평에서 차명진, 임해규, 김용태, 권택기, 진수희 등 7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재오는 강력하게 조기 전당대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기 전당대회를 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해야 한다, 보통 일이 아니다, 친박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하는 말들이 오갔다. 그래서 김용태가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김용태가 그 다음날 일련의 시나리오를 써서 참석자들에게 보내줬다. 그리고 그 다음주부터 지도부 사퇴 공세가 시작되는데 갑자기 엉뚱한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재오가 당권을 먹으려고 의원들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하니 조기 전당대회론은 친박은 물론이고 나머지 의원들에게도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급하게 모여 회의를 한 후 이재오를 찾아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을 하라는 뜻을 전하기로 했다. 정태근이 이재오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다. 행방이 묘연했다. 나는 번쩍 정신이 들어 저녁 모임 참석자들에게 확인을 했다. “그때 밥 먹을 때 이재오가 전당대회 나온다고 생각한 사람?” 아무도 없었다. 쇄신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또 사지로 몰아넣고 이재오는 사라진 것이다. 열 받은 김용태가 또 강경론자, 투사로 변했다. 그 다음날 김용태는 당·정·청은 오만과 독선을 버려야 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오만과 독선’ 성명서를 냈다. 지금까지 이상득을 향했던 공세가 처음으로 MB를 향했다.
나는 당시 송태영과 속리산 법주사에 있었다. 주지스님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주사로 내려가기 전 나는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청와대는 노무현 서거 정국을 뒤집으려고 개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형준은 내게 “입각이 될 것 같으니 (쇄신 서명을 하는데) 이번에는 빠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법주사에 있는데 김용태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2시에 기자실 가는데 형 이름 올려? 말어?” 하고 물었다. 차마 ‘나 이번에 입각하니까 빼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올려!” 하고 끊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두언, 너 후회하면 안 돼!’
정태근은 ‘오만과 독선’ 파동이 있기 하루 전날 MB와 폭탄주를 마셨다. 한·아시안정상회의를 앞두고 MB의 지시로 베트남 특사로 갔다 온 정태근은 5월 말 제주도에서 열린 한·아시안 정상회의에서 MB를 만났다. 정태근은 행사가 끝날 즈음 MB 수행비서인 임재현에게 쪽지를 넣었다. “혹시 행사 끝나고 대통령께서 의원들과 술 한잔할 수 있을까?” 했더니 금방 그러자는 연락이 왔다. 제주 하얏트호텔 바에 따로 모여서 술을 먹는데 정태근이 “오늘 고생하셨는데 폭탄주나 한잔 돌리시죠?”라며 분위기를 잡았다. MB는 바로 “폭탄 가져와!”라고 했다. 정태근은 MB와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다음날 김용태가 ‘오만과 독선’ 성명서로 MB에게 한 방 먹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나도 김용태가 오만과 독선 성명서를 내기 전날 맹형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맹형규를 만나기 전에 성명서 초안을 미리 보냈다. 사전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김용태 등이 성명을 발표하더라도 그 진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사전에 맹 수석에게 내용을 알려준 것이다. 맹형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당에서 총대를 메려고 하는 것이다. 분위기를 만들어 줄 테니 청와대도 쇄신으로 정국을 전환하라”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맹형규는 “알았다. 그렇게 해보시라”고 했다. 나는 당시 맹형규가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맹형규가 동의를 한 것으로 보아 대통령도 양해했구나 생각했다. 당시 맹형규의 속셈이 무엇이었을까.
그때 이상득은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자신이 주 타깃이 될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다. 63빌딩 거버너스챔버로 안국포럼 출신 의원들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이상득은 “2선으로 물러나겠다. 오늘 발표할 것이다. 앞으로는 자원 외교에 전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안국포럼 출신의원들을 불렀지만 실은 나와 정태근에게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상득의 말을 들은 나는 화가 치밀었다. “아니, 2선으로 후퇴한다고 하면 국민들이 누가 믿겠습니까. 의장님 측근들이 다 요직에 있는데, 측근들도 물러나야 실질적 2선 후퇴지, 의장님만 자원외교 한다고 하면 국민들을 우롱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들을 그렇게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고 따졌다.
백성운 의원이 “(이상득이) 그 정도 하면 됐지. 그렇게까지 할 것 있느냐”며 중재하려 했다. 나는 이참에 나에 대한 사찰이 진행된 것 등을 털어놓으며 “이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얘기냐. 이런 짓을 한 자들을 그대로 놔두면 되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성운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건 너무 심하다”며 태도를 바꾸어 이상득에게 그건 너무 심했다고 항의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속리산으로 갔다. 당연히 그 후 개각에서 내 이름은 빠졌다. 박형준 수석은 그런 나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정두언 전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