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검사로 살고 싶은데, 내 가치관하고는 안 맞는 것 같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이 최근 지인들에게 털어놓은 심정으로 알려진 말이다. 임명장을 받은 지 채 일주일도 안 된 최재경 수석은 이같이 토로하며 지난 21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 역시 20일 사의를 표명하면서, 청와대가 비상이 걸렸다.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입장이지만, 그 내막은 다르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두 사람 모두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검찰 관계자의 판단이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박근혜 대통령 대면조사를 재차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이를 단칼에 거절하자 중간에 끼인 두 사람이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최재경 수석은 지인에게 “사의를 표명한 이유는 딱 한가지인데 내 동료와 내 후배가 수사한 내용을 전면 부정할 수 없다”고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재경 민정수석은 사법연수원 17기로, 후배들에게 신망 높은 ‘특수통’ 출신 검사다. 2014년 ‘유병언 변사 사건’ 때 인천지검장으로 있으면서, 변사체를 찾지 못한 책임을 지고 검사직을 내려놨지만, 야인으로 있을 때도 검찰총장 후보에 물망이 오를 정도로 ‘인재’였다는 게 법조계 내 지배적인 평가다.
이번에 민정수석으로 공직에 다시 돌아올 때만 해도, 검찰과 청와대 사이에서 ‘조정’의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특수수사 흐름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 하지만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에 조사에 대한 방어를 총괄하면서, 후배 검사들이 박 대통령 수사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상황에 직면했고, 또 박 대통령이 ‘수사를 받겠다’는 말을 번복해 최 수석이 ‘낙담한 끝에 사표를 냈다’는 말이 나온다.
최 수석의 사람으로 불리는 한 특수통 검사는 “최재경 수석은 뼈 속까지 검사인 사람”이라며 “정치인으로 보는 게 마땅한 유영하 변호사(사법연수원 24기)를 박 대통령이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순간부터 최 수석 입장에서 ‘이건 아닌데’ 싶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최 수석이 보기에, 박 대통령의 대응은 너무나 정치적이었을 것이고, 법률가인 최 수석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결정들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 역시 최 수석과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책임감’을 더 많이 느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 내각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박 대통령 국정기조를 따라야 하지만, 검찰 지휘라인에 있는 법무부 수장으로서 진퇴양난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실제 법무부 고위 관계자는 “장관님이 이번 결정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며 혼자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내각의 구성원이자, 검찰의 지휘 역할을 담당하는 장관 입장에서 ‘특검’이 결정된 것은 검찰에 대한 지휘 체계에서의 책임도 있고 대통령을 피의자로 적시하게끔 만든 책임도 있다”며 “그 중간에서 홀로 그 무게를 지고 가려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또 다른 법무부 관계자 역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검찰 수사에 불만이 많고, 검찰 내부에서는 청와대(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황에서 딱 중간에 끼인 게 장관 아니냐”며 “그런 맥락에서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가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웅 법무장관과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이 일제히 사의를 표명하면서,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혹은 특검) 수사 압박을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더 궁지에 몰리는 모양새다. 특히 청와대 내에는 김현웅 장관보다는 최 수석의 사의 표명이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사실상 대응 책임자,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수석은 최근까지도 유영하 변호사를 박 대통령이 각별히 신임한다면서, 유 변호사가 박 대통령을 주로 방어하고 자신이 협조하는 방식으로 검찰 수사와 특검에 대비하고 있다고 주변에 밝혔는데, 법무장관과 민정수석 두 명의 동시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파국 상황에 직면했단 해석이 힘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일단 최 수석의 사의를 반려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법조계 내 분석이다. 임기를 1년 이상 채운 김현웅 장관보다, 임명장을 준 지 일주일도 안 된 최재경 수석의 사퇴는 청와대 내 장악력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
일각에서는 이번 검사 출신 법조인 두 명의 사의 표명이 단순한 ‘난파선 탈출’이 아니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지난 1960년 4·19 혁명으로 물러난 이승만 당시 대통령도, 내부인 경무대에서 허정 외무장관과 김정열 국방장관 등 장관들의 건의로 하야를 결심했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인데, 박 대통령은 장관과 수석의 거취를 놓고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윤하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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