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때로는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다. 스마트폰이 똑똑한 비서 역할을 하는 요즘 세상에 누가 종이 수첩을 쓰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 종이 수첩은 아직도 건재하다. 적어도 ‘전설의 수첩’이라고 불리는 ‘몰스킨(Moleskin)’이라면 말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고급 노트 브랜드인 ‘몰스킨’은 역사로 보나 브랜드 가치로 보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어니스트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수첩이란 점을 생각하면 ‘전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반 고흐의 스케치가 담겨 있는 몰스킨은 현재 일곱 권 정도 전해지고 있으며,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뜬다’를 파리의 카페에 앉아 몰스킨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몰스킨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토니 어워즈 역대 최다 수상작인 ‘해밀턴’의 작곡가인 린-마누엘 미란다 역시 몰스킨 마니아다. 그는 뮤지컬 아이디어와 구상을 몰스킨에 기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에어비앤비의 창업자는 처음 사업 아이디어를 몰스킨에 스케치했으며, ‘스타워즈: 에피소드 8’의 아이디어도 가장 먼저 몰스킨에 작성됐다. 이 밖에 소설가 데이비드 에거스,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도 평소 몰스킨을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첨단제품에 둘러싸여 지내는 IT 스타트업 CEO들도 몰스킨 없이는 못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처럼 몰스킨이 작가, 화가, 시인 등 창조적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아니,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일반인들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까닭은 뭘까. 실제 몰스킨에 대한 마니아들의 애정은 판매량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몰스킨은 매년 전 세계에서 1000만 권 이상이 팔려나가고 있다.
몰스킨의 특징은 일일이 실로 꿰맨 두꺼운 미색 속지, 둥글게 처리된 모서리, 두툼한 두께, 검정색 하드 커버, 신축성 있는 고정밴드 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품격과 묵직한 무게감, 이것이 바로 몰스킨만의 매력이다. 특히 줄이 없는 텅 빈 여백으로만 이뤄진 매끄러운 감촉의 속지는 무엇인가를 기록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월별 달력이나 시간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여백의 미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여백에 자유롭게 끄적이도록 유혹할 뿐이다.
또 몰스킨 가장 앞면에는 혹시 분실했을 경우 돌려받을 수 있도록 연락처와 함께 사례금을 적는 칸이 마련되어 있다. 그만큼 몰스킨 안에 담긴 내용의 가치를 스스로 매김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가치도 덩달아 매기도록 하는 것이다.
몰스킨이라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흥미로운 점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200년이 넘는 역사야말로 몰스킨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다. 사실 몰스킨은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200여 년 전 파리의 작은 문구점에서 판매되던 이름 없는 수첩이 몰스킨의 전신이다.
파리에서 판매되던 이 작은 검정색 수첩에는 원래 아무런 이름이 없었다. 그저 파리 사람들 사이에서 ‘르 까르네 몰레스킨(les carnets moleskines)’, 즉 ‘인조가죽 수첩’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름 없는 이 수첩을 생산하던 파리의 제조사는 1986년 돌연 폐업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의 여행작가인 브루스 채트윈은 여행기인 ‘송라인’에서 그때의 아쉬움을 이렇게 적었다. “여행 중 여권을 잃어버리는 건 걱정도 아니었다. 수첩을 잃는 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5년, 로마의 교사인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채트윈의 여행기를 읽다가 문득 이 수첩이 어떤 수첩인지 궁금해졌다. 수첩의 정체를 찾아 추적한 끝에 그는 피카소 박물관에서 스케치가 가득한 작은 검정색 수첩을 발견했고, 헤밍웨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일기장 역시 그 수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도 알게 됐다.
아직도 이 수첩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 착안한 밀라노의 작은 출판사 ‘모도 앤 모도’는 1997년 ‘몰스킨’이란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한 후 수첩을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10년 만에 재탄생한 몰스킨은 이탈리아를 넘어 점차 인지도를 높여가면서 세계 각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지난 2013년에는 이탈리아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기도 했다.
몰스킨이 스스로 ‘국적이 없는 브랜드’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 시작은 프랑스였지만, 이탈리아에 본사를 두고 있고, 현재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몰스킨이라는 브랜드의 발음과도 연관이 있다. 몰스킨은 딱히 정해진 발음이 없기 때문에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된다. 가령 ‘몰레스킨’, ‘몰레스카인’, ‘몰레스키네’ 등 뭐라고 발음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현재 몰스킨은 수첩 외에도 다이어리, 플래너 등 635가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베스트셀러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하드커버 수첩. 이 밖에 만년필, 배낭 등 문구제품도 판매하고 있다.
무엇보다 몰스킨이 디지털 시대에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디지털 브랜드와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협력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스마트펜 제조사인 ‘라이브스크라이브(Livescribe)’와 함께 협력해서 개발한 노트는 ‘종이 아이패드’라고 불린다. 전용펜인 스마트펜을 이용해 노트에 메모를 하면 블루투스를 통해 태블릿 PC에 저장된다. 또 메모 어플인 에버노트와 함께 출시한 ‘에버노트 스마트 노트북 바이 몰스킨’, 어도비와 협력한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는 몰스킨 수첩에 손으로 적은 메모나 그림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후 스마트 기기로 전송해 추가 작업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몰스킨의 200년 역사가 다소 과장됐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헤밍웨이가, 또 반 고흐가 사용했던 수첩이 사실은 몰스킨과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예술가들이 ‘모도 앤 모도’의 ‘몰스킨’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때문에 몰스킨이 주장하는 ‘전설’은 사실 지어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도 앤 모도의 공동 회장인 프란체스코 프란체스키 스스로도 “‘전설의 수첩’이라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마케팅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몰스킨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역사야 어찌 됐든 몰스킨 마니아들은 지금의 몰스킨의 디자인을, 품격을, 그리고 품질을 사랑한다. 몰스킨은 지금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민주 외신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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