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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사건, 한국에서 전문가란 무엇인가

고작 수천만 원 때문에…독성검사 보고서를 조작한 교수를 보며

2016.11.16(Wed) 10:15:15

2011년 8월의 일이다. 연이어 보고된 원인미상의 폐질환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착수했고, 연구팀은 가습기 살균제 사용집단이 대조군에 비해 47.3배 높은 발병률을 보인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실험을 통해 명확한 인과관계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질병관리센터의 발표 이후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안전성 논란은 거세졌고, 11월에는 6종의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수거명령까지 발동됐다. 인과관계가 증명된다면 막대한 손해배상은 물론 관계자에 대한 형사 처벌까지 가능한 사안이었기에, 다급해진 옥시레킷벤키저는 2012년에 저명한 독성학자인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교 조명행 교수에게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검사’를 의뢰하게 된다. 

 

질병관리센터의 역학조사와는 달리 조 교수의 연구팀은 ‘가습기 살균제에 문제가 없다’는 보고서를 내놨고,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2013년,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며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즈음, 정말 충격적인 소식들이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판매를 지속했으며,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위험성이 나타난 연구보고서를 조작하기도 했다는 것.

 

2012년에 조명행 교수팀이 내놨다는 그 독성검사 보고서도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연구용역비를 유용하기까지 했다니, 처음에는 정말 믿기가 힘들었다. 조명행 교수가 그런 ‘급 떨어지는 일’을 할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의 학문적 성취를 평가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그 연구자가 작성한 논문의 ‘피인용 횟수’를 살펴보는 것이다.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료 연구자가 본인 논문에 인용하는 횟수가 많다면, 해당 논문이 훌륭한 성취를 담고 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까. 

 

지난 8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마련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모습. 사진=박은숙 기자


조명행 교수의 논문들은 구글 스칼라를 기준으로 피인용 횟수가 200~300건 되는 꽤 견실한 것들이었다. 그는 학술적 성취를 바탕으로 한국독성학회 공식저널의 chief-editor와 해외 SCI급 저널인 의 editorial board에도 속해있던 분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한국독성학회 회장, 국립독성과학연구원 원장까지 역임하신 분인데, 이런 분이 기업용역과제 데이터를 조작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분노한 언론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비운의 학자라고 생각했고,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용역비’ 관련 건수로 재수 없게 걸린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지난 15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환희와 분노가 공존하는 피해자들의 반응을 보니, 문득 조명행 교수가 떠올랐다. 

 

과연 그가 정말 실험결과를 조작했던 것일까 싶어 찾아봤더니 웬걸, 이미 법원에서 실형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한국 독성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 연구용역비 수천만 원을 유용하고, ‘개인계좌’로 1200만 원을 받은 대가로 연구보고서를 기업에 유리하게 조작을 해줬단다. 

 

그까짓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을 했던 건지, 계좌로 입금된 1200만 원에 마음이 혹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본인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간 사람도 저런 행동을 한다면, 도대체 한국에서 ‘전문가’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의 몰락을 보면, 전문가란 그저 양심 값을 조금 더 후하게 쳐주는 품질보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참담하기 그지없다. ​ 

한설 약학을 전공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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