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려내는 일은 기술이지만,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은 예술이다. 그릴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그리기 어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슬픔, 기쁨, 분노 같은 감정이나 기억이나 꿈 같은 생각이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다.
이걸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상상력을 동원하면 가능한 일이다. 이를 통해 예술가들은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세상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하는 일을 ‘창작’이라고 부른다.
유진실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도전해 당당한 성과를 보여주는 작가다. 그는 유년 시절 기억을 그린다. 생각 저 밑바닥에 숨어 있어 쉽게 그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운 세계를 끌어내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것도 아주 친숙한 모습으로. 나무나 집, 의자, 전등 혹은 체스판 같은 익숙한 대상이 등장하는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공간의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흡사 뫼비우스의 띠를 보는 듯한 유쾌한 혼돈 속으로 이끈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오즈의 마법사’나 ‘헨젤과 그레텔’ 같은 환상적 분위기의 동화책을 보는 느낌이 든다. 공간은 서로 겹쳐 있고 그 사이에 나무가 있는데, 문양처럼 얽혀 있다. 그런가 하면 지붕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달린 그네가 있기도 하다. 안락한 소파와 식탁, 침대, 테이블도 보인다.
익숙한 대상이지만 상식에 맞지 않는 배치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한다. 공간에서는 두께나 입체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집 같은 공간을 형성하는 여러 개의 평면(이를테면 지붕이나 벽, 바닥 등)에는 마치 그림처럼 실내 풍경 같은 것이 담겨져 있다. 평면화된 물체들이 연결돼 공간을 이루고 있는 꼴이다.
작가는 이처럼 상식에 어긋나는 구성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행복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 기억을 불러 올려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유년 시절 기억의 파편들은 질서 정연할 수 없다. 상식을 빗겨가는 생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으며, 앞마당에 있던 나무가 자라 내 침대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기도 한다. 혹은 회랑을 가로 지르던 격자 문양의 타일은 어느새 지붕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중 행복했던 이미지는 삶의 활력소가 된다.
유진실이 그림 속에다 심는 것은 바로 이런 이미지들이다. 유년의 행복했던 기억이 오늘을 살아가게 만드는 에너지 충전소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경쾌하다. 밝은 색채와 섬세한 선묘로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전준엽 화가·비즈한국 아트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