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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최 씨 일가, 박근혜-근령 자매 떼어놓으려 미국행 부추겼다”

박 대통령 제부 신동욱 공화당 총재 인터뷰 1

2016.11.04(Fri) 14:58:52

“박근혜 대통령은 평생을 최태민, 최순실의 산을 양지에서만 바라봤다. 박근령 전 이사장, 박지만 회장은 평생을 최태민, 최순실의 산을 음지에서만 바라봤다. 양쪽 다 맞다. 그런데 국민들은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는가.”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대중으로부터 괴짜 취급을 받는다. 14세 연상의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결혼한 이후 명예훼손, 마약, 사기 등 각종 송사에 휘말렸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 전 이사장의 남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아무래도 최태민, 최순실 씨 등과 박 대통령의 관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박 전 이사장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9일 ‘비즈한국’은 부산에 내려가 지낸다는 신 씨와 두 시간가량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를 그는 격정적으로 털어 놓았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지난 2005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26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올케 서향희 씨, 동생 박지만 EG 회장,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사진=비즈한국DB

 

―최순실 씨 이름이 나오고 있다. 혹시 알고 있었나.

“모 언론과 인터뷰 하면서 정윤회가 아니라 그 배후가 최순실이라고 말했었다. 내가 가장 먼저 이야기를 했고 그 예측이 맞았다.”

 

―그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내가 아내(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를 만난 지 근 10년이 됐다. 최태민 씨는 돌아가셨지만 어쨌든 그동안 최태민, 최순실 그 세 사람과 관계된 자료들을 수집했고, 특히 최순실, 정윤회와의 관계를 많이 파헤치려고 노력을 했다.

 

―그렇게 노력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최순실, 정윤회가 없어지지 않으면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이 3남매가 하나가 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때 수집했던 특별한 자료가 있었나.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구전으로 들었다. 최순실, 정윤회의 사진이라도 구해 보려고 굉장히 애를 썼는데 그게 잘 안됐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어 그걸 구하려고 했는데 안 주려고 하더라. 그때 ‘이 사람들도 그쪽(최순실 쪽)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 삼성동에 계실 때 그 집을 출입할 수 있어서 사진으로 찍었다고 했었다.”

 

―근데 끝까지 안 줬나. 

“주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박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빠진 이유가 무엇인가.

“빠졌다…. 나는 이렇게 표현을 하고 싶다. 어찌됐든 간에 최태민과 박 대통령 관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내 아내일 것이다. 지금까지 최태민 씨 등장 시점은 육영수 영부인 서거 이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최태민의 등장은 육영수 영부인 생전이라고 한다. 생전에 등장했다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최태민 씨가 등장한 게 육영수 영부인 생전이냐, 서거 이후냐에 따라 이야기 결말이 완전하게 달라진다. 그런데 세간에 알려지면 좋지 않은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의 첫 번째 실마리가 만남 아니겠나. 그 만남의 이야기는 왜 하지 않았을까.

 

―최태민 씨의 등장 시점이 왜 중요한가.

“육영수 영부인 서거 이후라면 그래도 조금 낫다. 그런데 서거 이전에 등장했다면 문제가 있다는 거다. 내 얘기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접근이라는 거다.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접근을 감추기 위해서는 서거 이후가 돼야 한다. 만약 (세간에 알려진 ‘육영수 여사의 현몽을 꾸었다’는) 그 편지를 통해 등장했다고 하면 의도적 접근이란 게 좀 희석된다. 그런데 서거 이전에 등장했다 하면은 확연하게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접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태민 씨가 이름을 7번 바꾸고 경찰, 승려, 목사 등을 거쳤다는데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지 않나. 최 씨는 이름을 7번 바꾸고 직업을 여러 번 바꿨다. 시대에 굉장히 빠르게 적응한다고 봐야 한다. 본인의 성공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 하는 것마다 실패한 거다. 나는 그가 1973년(육영수 여사 사망 1년 전)부터 등장했다고 본다. 1973년부터 최태민 씨는 박근혜 영애에 비공식 행사장에 나타나 연결되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을 것이다. 아마 그는 포스트 박정희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을 누가 받을 것인가를 생각했고, 본인 입장에서는 그게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봤던 거다.

 

박근령 육영재단 전 이사장의 남편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제부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 그는 최태민 씨의 등장시점이 지금까지 알려진 육영수 여사의 서거 후인 1975년이 아니라 1973년이라고 주장했다. 사진=비즈한국DB

 

―그래서 의도적 접근을 했다는 건가. 

“접근을 한 거다. 당시 육영수 영부인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박근혜 영애에게 ‘그런 사람은 안 만나는 게 좋겠다’ 이런 식으로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건 아내가 기억을 하더라. 얼마 후에 영부인께서 서거를 하셨다. 방송 패널이나 기자들이 육영수 영부인 서거 이후에 1975년에 최태민이 최초로 등장한다고 하고 그게 정설이 돼 있던데 나는 그게 도저히 맞지 않다고 본다. 1974년 8월 16일 육 여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편지가 전해진 게 1975년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1975년에 편지가 전해지고, 같은 해에 최태민 씨가 구국봉사단을 만들 수가 있나. 구국봉사단을 만들고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명예총재로 추대할 수가 있나. 논리적으로 전개해보자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편지 하나를 받고 순식간에 급속하게 전개되는 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훨씬 더 이전에 등장했다고 봐야 한다. 그 당시에도 영부인이 주의를 한번 줬다는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태민 씨가 어떻게 접근했다고 보나. 

“최태민 씨가 영생교 교주라는 전제 조건을 갖다 붙인다면, 교주나 무당은 예언적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본인이 예언을 했는데 못 맞히면 따르는 사람들이 있겠나. 옛날 잘 맞히는 점쟁이가 하도 예언을 잘해서 모두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복종했는데, 알고보니 어떤 사람이 예약을 하면 그 사람을 뒷조사한 거였다. 뒷조사를 배경으로 말하니 절대적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고 예언을 했다면 당시로서는 박지만, 박근령이 가장 큰 경쟁상대다. 태양이 세 개면 안 된다. 가장 돋보이는 태양 하나만 필요하다. 그래서 두 개의 태양을 어둠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지 않았겠나.”

 

“그렇다면 지금 박지만 회장은 어떤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일어설 수 있나? 그 이유가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마약 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마약이 박지만 회장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만들어진 공작일까. 거기에 합리적 의심을 해볼 수 있지 않나. 마약쟁이가 되는 순간 경쟁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혼은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박근령 전 이사장은 풍산금속 장남과 결혼한 후 6개월 만에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하고 미국을 갔다. 아내는 이혼을 하게끔 부추긴 사람들을 최태민 일가로 기억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게 된 것도 최태민 일가가 부추겨서 간 거라고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최태민 일가라는 것은 누구인가. 

“최태민, 최순실 그리고 그 인척들을 말한다. 그게 바로 1981년도 성북동 시절이다.”  

 

―박근령 전 이사장이 기억하는 최태민 씨는 어떤 사람인가.  

“당시에는 최태민, 최순실 등 이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할 때 최태민 일가는 본인과 언니(박근혜 대통령)를 챙겨줘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부추김을 더욱 신뢰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도 봐야 한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부추겼다는 건가. 

“아내가 결혼을 한 뒤 굉장히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시집살이가 고됐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 남편의 자가용을 직접 닦았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살았으니 그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지 않는가. 그렇게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을 때 주변에서 이야기를 해주면 흔들려서 결정하기 쉽지 않나. 그렇게 보시면 될 것 같다.” 

 

“어찌됐든 간에 1982년도에 결혼을 하고 6개월 뒤 이혼해서는 곧 미국으로 떠난다. 박지만 회장은 당시 육사를 졸업하고 군에서 근무를 할 때다. 군인 신분이 됐다. 그러면 성북동 그 집에는 누가 남아 있나.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 혼자만 남아 있었다. 그러면 혼자 남아 있는 박 대통령은 본인 혼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당시에 우리 아내가 시집 가기 전까지 성북동에서 했던 것이 박 대통령의 운전기사, 코디네이터, 집사, 비서 등 1인 4역을 했을 때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거다. 그렇다면 그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군가? 최태민, 최순실 등이 그때부터 완벽하게 에워싸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선 직후 캠프에서 언론에 제공한 옛 가족 사진. 왼쪽부터 박근혜, 박근령, 박정희 대통령, 박지만 씨.

 

―그럼 박근령 이사장을 미국으로 보낸 것도 ​일부러 ​박근혜 영애를 혼자 고립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봐야 하나. 

“그렇게 봐야 한다. 그래야 퍼즐이 다 맞춰지지 않나. 그렇게 아내가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 가서 1년 동안 생활비가 정확하게 매달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1년이 경과된 이후 생활비 입금이 들쑥날쑥해서 심리적으로 불안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돈이 다 떨어져 패스트푸드점의 쓰레기통을 뒤져 햄버거를 주워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이 울었단다. 미국 생활이라는 게 불안하고. 그렇다면 미국에 돈을 송금해주는 사람은 누군가.”

 

―그게 누군가.  

“최태민, 최순실 혹은 그 일가 중에 누군가가 붙였다고 한다. 틀림없는 건 그쪽 사람들이 보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은행에 갈 수가 없으니까. 본인이 은행을 가본 적이 없다.”

 

―박 전 이사장이 미국에 간 목적은 뭐였나.  

“당시에 이혼을 했다는 것은 굉장히 창피하고 힘들었다고 본인은 얘기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보려고 했다. 돈으로 굉장히 심리적 압박을 한 거다. 비자 문제로 한국에 두 번째 올 때도 돈 문제로 굉장히 힘들었다. 아내의 기억으로는 그렇게 한국에 와서 최태민 씨 일가친척 한 명이 집을 계약하러 가자고 했다. 그 사람을 따라가서 강남 아파트를 아내 명의로 하나 계약했다.”

 

“아내가 최초로 본인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반포동에 샀다고 한다. 근데 그 집을 보러가고 매매 계약서를 쓰러 가는데 그게 최태민 인척이였다는 거다. 최태민 인척이 우리 아내의 아파트를 구해주고 사준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래서 그때까지는 최태민 씨가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나가서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막판에는 비행기티켓도 살 돈이 없어 하숙집에서 빌려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돈을 또 안 보내준 건가. 

“그렇다. 아내는 ‘최태민 일가가 나한테 했던 일들을 언니는 지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후 한국에 숭모회(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지지하는 모임)가 만들어지고 육영재단의 최태민 고문을 들어내야 된다고 결정한 거다. 그런데 그 단체는 재단하고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영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재단에 들어가서 ‘최태민 나가라’ 하는 명분이 약했다는 거다. 그 명분을 찾다 보니 박지만 회장은 군인 신분이라서 안 되는데 때마침 비자를 연장하러 아내가 들어왔다. 그래서 아내를 몇 날 며칠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동안에 미국 생활의 서러움, 이상한 느낌들을 생각하니 ‘언니 곁에서 최태민을 몰아내자’는 데 동의를 하게 된 거다. 그렇게 해서 숭모회에서 최태민 씨를 나가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 입장에서는 자기 측근인 최태민 씨를 나가라고 한 것은 본인을 나가라고 한 거라고 오해할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오해다. 

 

―그럼 첫 번째 오해는 무엇인가.  

“첫 번째 오해는 아내가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간 것이 첫 번째 오해다. 언니 입장에서는 동생이 시집을 가서 잘 살기를 바라지 않겠나. 그러니 이혼 자체가 조금 못마땅한 거다. 근데 이혼을 했으면 옛날처럼 나하고 같이 살면서 운전기사도 해주고 코디네이터도 해주고 집사도 해주고 비서도 해줘야지, ‘왜 미국을 가는 거야’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니깐 그게 첫 번째 오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너무 창피하고 한국에 있기 너무 싫은 거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녀 중 첫 번째 결혼식이어서 화려했는데 (6개월 만에 이혼하니) 얼마나 창피했겠나. 그걸 감내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거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서운한 거고, 오해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공간을 메워준 최태민, 최순실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과거 인터뷰 등에서) 본인이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자기 옆을 지켜준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동생도 나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는데, 이들은 끝까지 나를 지켜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겠나. 내 혈육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관점에서는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고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그들이 떠나게끔 부추겼기 때문에 아내가 ‘속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최태민에게 철저히 속고 있다고. 아내는 지금도 ‘최태민을 나가라고 한 거지, 언니는 계속 재단 이사장을 하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최태민 씨만 나가면 다 해결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사임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날 밤에 삼성동 자택으로 아내를 불러서 이사장 직인을 인수인계를 해줬다더라. ‘그동안은 내가 육영재단을 경영했으니 이제는 동생이 잘 운영하기를 바란다고 넘겨줬다’는 거다. 아내는 순수하게 언니로부터 승계 받았다고 믿고,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내는​ (최태민 씨를 공격했는데)​ 언니를 괴롭힌 사람이 되지 않았나. 그러니깐 언론에서 여동생이 언니를 쫓아내고 육영재단을 찬탈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지 않나. 그게 잘못된 보도였다는 얘기다. 아내는 ‘먼 세월이 지나 내가 죽고 나서라도 당신이 그것만은 바로 잡아주세요’라고 말했다. 

 

신동욱 총재는 아내 박근령 육영재단 전 이사장이 미국에 가게 된 것은 박근혜-근령 자매를 떼어놓으려는 최태민 일가의 부추김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사진=비즈한국DB


―그 이후 박근령 이사장이 탄원서를 내면서 대통령과 사이가 완전히 갈라졌다. 탄원서를 낸 배경은 무엇인가. 

“1990년에 탄원서(박지만 EG 회장과 박근령 전 이사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로 ‘최태민 씨가 순수한 저희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 이번 기회에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 씨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를 넣는다. 그 탄원서 때문에 결정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동생들로부터 가장 큰 배신을 당한 거다. 최태민 씨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가서 오해를 푸시고 형제분들을 안으세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두 동생은 당신이 가는 길에 전부 걸림돌이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끊어야 합니다. 형제가 아니고 원수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면? 완전히 형제지간에 마음의 문이 닫힌다. 그리고 최 씨는 가장 고마운 사람이 된다. 나는 그때가 최태민 일가가 박근혜 영애의 ‘오장육부’가 된 시점이라고 본다. 그전까지는 ‘피부’였다. 박관천 경정의 표현에 따르면, 피부에 불과했는데 1990년 탄원서 때문에 오장육부가 됐다고 본다. 믿을 수 있는 건 이 사람들밖에 없다, 내가 함께 평생을 가야 될 사람들이다, 그렇게 봤을 거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었더라도 형제가 감옥에 가면 면회를 간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그렇다. 지금까지 박 회장의 6번의 마약 사건에서 아내는 박지만 구명 운동부터 시작해서 옥바라지까지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단 한 번도 면회를 간 사실이 없다. 왜 면회를 가지 않았을까. 면회를 가지 못하게 누군가에 의해서 차단됐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내 동생이야’라고 챙기는 순간 그들은 끝나게 된다.”

 

―편지까지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뭔가.

“당시 편지 내용의 90%는 팩트다. 아내는 본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가감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최태민, 최순실이라는 사람을 산이라고 표현해보자.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 최순실의 산을 ​평생 ​양지에서만 바라본 거다. 양지에서만 바라본 산의 모습은 어떤가. 따뜻하고 평온하고 희망적이다. 박근령 전 이사장, 박지만 회장은 평생 최태민, 최순실의 산을 음지에서만 바라본 거다. 음지에서 산을 바라보면 서늘하고 두렵고 무섭다. 박근령이 바라본 최태민, 최순실 산의 평가는 정확한 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바라본 최태민, 최순실의 평가도 맞다. 양쪽 다 맞다. 그런데 국민들은 최태민, 최순실을 ​음지와 양지에서 모두 보게 됐다. 그리고 음지 쪽에 훨씬 더 무게 중심을 둔다. 그게 지금의 공분 아닌가. 대통령 하야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신동욱 공화당 총재와의 일문일답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김태현 기자

toyo@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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