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제도 도입 논의가 재점화됐다. 은행·보험 등 금융업계가 신입사원을 상대로 차등연봉제를 적용하려 하자 노동조합이 강하게 반발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노조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성과주의제 도입과 호봉제 청산은 한국 노동시장이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고 기업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지금의 임금구조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과주의제 확산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노사 간 첨예한 대립으로 좀처럼 속도는 나지 않는다. 한국의 연봉제는 어디까지 왔으며, 앞으로 어떤 해결할 문제가 있나.
성과주의제와 호봉제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 것은 20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성장률 고공행진의 시대가 마감하면서 ‘호봉제는 끝났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피어올랐고, 1997년 외환위기가 고용·급여 체제 변화에 불을 댕겼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연공에 따른 급여 체제는 한국 사회·경제에 자연스러운 문화였다.
호봉제는 기업이 사회와 근로자에게 빚을 진다는 일종의 ‘채무’의 개념을 담고 있다. 성장 초기 온 사회가 기업에 경제적 부(富)를 몰아주기 때문이다. 개발 초기, 부의 집중을 통해 파이를 키우고 파이가 충분히 커지면 이를 사회와 나누는 ‘선개발 후분배’의 맥락에서다. 가진 것은 사람과 땅밖에 없던 1960년대 한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투자 여력을 키우기 위해 이익잉여금을 충분히 남길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에 나섰다. 노동자로서도 당장은 임금이 낮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임금이 높아지는 호봉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자녀의 성장 등 씀씀이가 커지는 40~50대에 임금이 급격히 오르는 점도 매력이었다.
기업 입장에서도 숙련공을 장기간 근속시킬 수 있었다. 노사의 이해관계, ‘잘 살아보자’는 사회 분위기가 맞아떨어지며 호봉제는 자연스럽게 노동 시장에 안착했다. 다행히 국가 경제와 기업의 성장률이 임금인상률을 앞선 덕에 호봉제는 40년 가까이 큰 문제없이 작동했다.
문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여건과 환경, 사람들의 인식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경제성장률은 뚝 떨어지고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 체제에서 비효율적인 경영 관행을 제거해야 했다. IMF는 호봉제를 기업 경영에 부담을 주는 제도로 지목했다. IMF의 미국·유럽 출신 관료들로서는 한국과 일본의 호봉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호봉제 대신 능력과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서구식 연봉제는 빠르게 확산했다.
한국은 과거에 비해 먹고살 만한 나라가 됐기 때문에 종신고용과 연공 중심의 급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기업의 채무감도 많이 줄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통계를 보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1985년부터 1996년까지 12년간 연 평균 7.71% 상승했다.
산업계는 2000년대 들어 성과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기업으로선 직능·직무에 맞춰 임금을 지급하면 신규 채용의 부담을 낮추고 인건비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또 연공서열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건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기업이 성장 초기 단계인 1970~1980년대는 근로자를 마구 뽑았던 것과는 달리 2000년대 들어서는 선별적 채용에 나섰다. ‘사람이 돈’이라는 확률에 베팅하기보다는 인건비 등 리스크 요인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 정년 보장이 어려워지면서, 헤드헌팅 등 이직 시장도 열리기 시작했다.
다만 오랜 기간 누적돼 온 호봉제의 관성이 남아있어 국내 기업과 노조는 ‘호봉형 연봉제’에서 절충점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연공에 따라 임금이 오르지만 개인의 역량과 업무 성과에 따라 급여를 달리 책정하는 변화된 형태의 연봉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54.2%(2013년 6월 말 기준)가 직능·직무급을 시행 중이며, 이들 중 대부분은 호봉제와 연동한 시스템을 채택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성과연봉제 도입은 아직 미진한 편이다. 아직 국내에서는 이익을 나누고 고과점수에 따라 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 정도로 성과급 제도를 시행 중이다. 앞으로 우리사주제도나 세제혜택, 퇴직금 연계 등의 방법을 도입하면 성과주의제를 확산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김동배 인천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성과배분제도를 도입하면 노력 증진, 보상의 공정성을 올리는 한편, 조직 내 협력과 일체감을 증진시킬 수 있다”며 “신생기업의 경우 인건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성과배분제도를 도입할 유인이 크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1993년 연봉제를 도입한 이래 1999년에는 비간부 직급에도 확대 적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봉제를 시행해 왔다. 연봉제 도입과 상시 구조조정 시행으로 구성원들의 불만과 피로감이 쌓였으나, 초과이익분배금(PS)과 같은 성과급 정책을 시행하며 직원의 충성심과 근로의욕을 북돋았다.
한국보다 10년 정도 앞서 성과분배제도를 통한 호봉형 연봉제를 도입한 일본은 연봉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것으로 평가 받는다. 성과배분제도를 통해 일본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았던 연공서열·종신고용제가 깨지고 연봉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 시작은 1990년대 들어서다. 장기 침체에 시달리던 기업들이 비효율을 타파하기 위해 연봉제 카드를 조심스럽게 도입한 것이다. 과거 ‘연공-경험·지식 증가-직무능력 향상-승진-직능급인상’이라는 도식화된 고용·임금 체제에서 직원이 실제로 수행하는 업무성과와 창의성 등을 두루 따져 임금을 정하는 직무급 체제로 변화했다.
상여금의 경우도 정기적으로 지급되던 것과는 달리 개인의 인사고과에 따라 차등 지급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편했다. 미쓰비시전기의 경우 회사와 개인 업적에 따라 최고 50만 엔까지 격차가 벌어진다. 일본전기주식회사의 경우 상여금의 50%는 고정이지만 나머지 50%는 업적평가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도레이 역시 상여금의 15~20%는 업적평가에 의해 차등 지급하는 등 일본 대다수 대기업은 성과평가와 연동한 연봉체제를 갖추고 있다.
한국에서 연봉제가 안착하려면 해결할 과제가 있다. 먼저 직무에 맞춘 대대적인 임금 개편이 필요하다. 호봉제는 고위직 연봉이 많고, 하위직은 적은 ‘하박상후’ 구조다. 기업의 성장을 위해 당장 임금은 적더라도 향후 임금인상을 대가로 도입돼서다.
그런데 직무·직능에 따라 임금이 책정되는 연봉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직무·직급별 임금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사내 변호사나 변리사·회계사가 초임에도 높은 연봉을 받듯, 신입사원이라도 생산성 높은 업무를 맡았다면 그 업무의 종류와 성격·성과에 맞는 임금을 받아야 한다.
현재 신입사원 급여는 연공서열제에 맞춰 책정된 금액으로, 이 상태에서 전면 연봉제를 도입하면 자칫 노동시장 전반의 임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기업과 노조가 신입사원 임금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또 직무에 맞춰서 동일임금을 지급한다는 연봉제의 기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연봉제는 같은 가치를 가진 일을 할 경우 나이·성별·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갖고 있다.
이 방향을 맞추기 위해선 자동차 조립공이나 은행 텔러 등 비정규직 근로자에게도 정규직 근로자와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는 연봉제 도입을 두고 노사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로, 아직까지 뾰족한 대안이 나오진 않은 실정이다.
특히 공기업·은행·보험 등 공공기관의 경우 과도한 영업경쟁에 의한 금융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 금융업의 호봉제가 63.7%로 전체 산업 평균(36.3%, 2013년 6월 말 기준)보다 2배 가까이 되는 점도 이 때문이다.
서정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직원 고령화와 비대면 거래 비중 확대, 정년 연장 등으로 은행의 인적자원 관리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성과주의제 도입을 위해 노사 간에 적극적인 대화 채널을 열고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