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서울 중심가는 웃대, 아랫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로를 완충지대로 하여 서촌과 북촌 일대를 웃대,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가 아랫대였다. 아랫대는 중인 계급이 주로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기술자들이 많았다. 웃대의 양반은 돈 버는 일을 천히 여겼으나, 실용적인 아랫대 사람들은 상업과 가게를 내어 돈을 많이 모았다. 지금으로 치면 미식가랄까, 좋은 음식을 찾아 사치하는 풍습도 아랫대에 있었다. 돈이 돌아 부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 아랫대의 한 축인 을지로는 1970년대 들어서 이질적인 두 노동집단이 만들어낸 풍경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번듯한 건물이 쑥쑥 올라간 서울의 오피스 중심가이면서, 동시에 ‘마찌꼬바’(町工場, 일본어로 시내에 있는 공장이라는 뜻으로 우리도 오랫동안 그렇게 불렀다) 같은 간이 공작소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을지로3가 주변은 이런 현상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근처 밥집 술집은 ‘와이셔츠 부대’와 기름밥 먹는 노동자 부대가 같이 출몰(?)한다.
한때 서울 경기를 좌우했던 을지로의 경기는 이제 강남으로 물려주고, 언제 재개발을 할지 모른다. 뒷골목은 개미굴처럼 미로로 얽혀 있어서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면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십상인 곳이다. 일하고 밥 먹고 술 마시던 지역이 이제는 어느 정도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중구청에서는 문화해설사까지 붙여 시민 투어를 열 정도다. 이곳도 이제 볼거리로 변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지역은 당연히 오래된 밥집 술집이 많다. 지난번에 을지면옥을 소개했는데, 숨겨진 보물 같은 집들이 여전히 많다. 육개장과 돼지갈비를 하는 안성집, 곱창으로 유명한 우일집, 코다리찜이 명물인 우화식당, 생태찌개를 하는 세진식당 등이다. 실은 ○○집이니 ○○면옥이니 하는 것이 모두 일본식 명명법이다. 일제강점기에 식당이름을 ‘○○옥(屋)’이라고 지었고, 그 버릇이 남아서 오래된 식당에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집이라고 쓰인 곳을 찾아가면 맛은 보장한다는 것이 맛있는 집을 찾아내는 선별법으로 회자될 정도다.
그중에서 오늘은 통일집을 소개한다. 업력이 40년을 헤아리는 이 집은 밤에 을지로 길을 걷다가 환한 불빛을 보고 찾아들게 된다. 철공소들이 문을 닫으면, 가게 앞 공터에 간이탁자를 내놓고 고기를 굽기 때문이다. 가게가 아주 작고 오래되었지만, 찾는 이들이 많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빨간 페인트로 쓴 상호와 메뉴인 ‘암소등심’이 눈에 박힌다. 메뉴라고는 저것 말고는 된장찌개가 전부다. 투박한 서비스에 열원도 참숯이 아니지만, 저 수더분함이 오히려 미덕인 집이라고나 할까. 한우 암소 등심이 주력인데, 불을 활활 피워 구우면, 소리도 요란한 배기 팬을 틀어댄다. 그마저도 한 잔 술을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소리에 이내 묻혀버린다.
원래 우리 민족은 암소 고기를 제일로 쳤다. 황소는 대개 질겼고, 암소는 부드러운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황소고기는 시중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거세해서 기르기 때문이다. 거세고기도 부드러워서 좋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암소에 비해 싱거운 맛이라고 느낀다. 암소등심의 인기가 여전한 것이다. 암소는 ‘살밥(살덩어리를 뜻하는 이 동네의 은어)’이 적어서 먹을 게 없다고 한다. 그만큼 고기 근을 내기에 쉽지 않다는 뜻이다. 반면 고기는 부드럽고 고소한 옛 한우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이 집의 명물은 어쩌면 된장찌개인지 모르겠다. 양이 많은 한 냄비에 1만 원을 받는데, 고기 구워 먹으면 찌개는 공짜인 버릇을 들인 사람에게는 의아하게 여겨진다. 허나 맛을 보면, 제대로 요리하는 건 돈도 제대로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멸치를 잘 맞춰 육수를 내고, 소고기 자투리를 넣어 맛을 보탰다. 불땀 입은 불판에서 뜨겁게 팔팔 열을 내어서 한 소끔 더 끓이면 맞춤한 맛이 우러나와 나도 모르게 숟가락이 자꾸 간다. 암소 등심은 3만 5000원인데 양이 적지 않다. 요즘처럼 한우가 역대 최고가를 경신하는 시기에는 특히 좋은 값이다.
이 집에서 일차하고, 근처의 노포를 찾아 한 잔 더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길 건너에 유명한 노가리골목도 있다. 을지로의 밤이 깊어간다.
박찬일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