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연결고리인 최 씨의 아버지 최태민 씨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즈한국은 과거 ‘우먼센스’에 게재되었던 최태민, 최순실, 박근혜, 세 사람의 인터뷰와 관련 기사를 다시 싣습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당사자들의 관계와 심경 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유신 말기 육영수 여사의 뒤를 이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 씨. 그녀를 본격적인 사회활동에 나서게끔 유도한 인물이 최태민이었다는 것. 이후 그가 구국선교단으로부터 새마음봉사단에 이르기까지의 대규모 조직을 통해 막강한 힘을 발휘해온 과정. 10·26의 간접적인 계기라고 김재규가 주장한 근거. 90년 육영재단 분규의 동기인물로 지목된 이후 잠적에 들어가기까지의 전 과정 집중추적.
왜 두 사람을 묶어서 생각하곤 하는가
세간에 통 보이지 않는 박근혜 씨의 근황에 대해 궁금증이 일고 있다. 한때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던 사람이, 갑자기 은둔한 듯 보이지 않을 때 드는 궁금증이다. 어쩌면 해마다 찾아오는 10·26이 그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공식적인 활동은 90년 10월의 육영재단 분규사태로 일단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박근혜라는 인물의 비중은, 공식적인 활동이 끝났다고 해도 완전하다시피 가벼워질 수는 없었다. 보다 자유로워진(?) 그녀의 일상을 평범하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 대한 억측이 늘어나는 것은, 그녀가 의도적으로 얼굴을 안 보이려는 행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에 대한 소문들 가운데 유난히 그치지 않는 것은 ‘최태민’이란 인물과의 관계다. 박근혜를 생각하면 육 여사가 떠오르고, 박대통령이 떠오르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셈이다. ‘최태민․박근혜’ 두 사람을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세인들의 습관처럼 굳어진 데는 까닭이 있다.
우선, 두 사람이 믿고 의지해온 세월이 길기 때문이다. 75년 3월 이후부터 최근(적어도 90년 말)까지 그래왔다. 둘째는, 두 사람의 밀착관계에 의해 파생된 사회적 물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밀에 부쳐져서, 때로는 공개적으로.
90년 10월에 벌어진 육영재단의 운영권 분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노출시킨 계기였다. 그로 인해 최태민이란 사람에 대해 곳곳에서 밀착 취재를 벌였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그에 대한 조사는 암암리에 있어 왔다. 대통령비서실에서, 중앙정보부에서, 10·26 이후에는 합동수사본부에서….
그러나 그런 굵직굵직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또 언론매체의 다각적인 밀착취재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속 시원히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철저하게 알아내긴 했지만 공개하지는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접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두 사람의 만남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알아본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첫 만남은 75년 3월에 있었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 뒤, 실의에 잠겨있던 맏딸 근혜양에게 많은 위로편지가 배달된다. 그것을 일일이 읽어가며 허전한 심경을 달래던 근혜양은 그 중의 특별한 편지에 감동되어 그 주인공을 청와대로 초청한다. 75년 3월 16일이다.’
근혜 씨 본인의 입을 통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두 사람의 첫 대면 과정이다. 그 다음부터의 증언은 각각의 사람마다 달라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편지의 내용에 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근혜 씨의 마음을 휘어잡았을까 하는 것이 핵심이다. 거기에 대해서 정작 본인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세간에는 대략 다음 두 가지의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다.
최태민이 근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바로 이런 비밀이…
하나는 ‘김형욱 회고록’에 나오는 ‘육 여사 현몽설’. 최태민의 꿈에 육 여사가 나타나 ‘근혜가 어리석어 슬퍼만 하고 있으니, 그대가 도와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는 것. 또 하나는, 다른 편지들이 대게 ‘위로와 격려’형 편지였는데 반해 최 씨의 편지는 ‘왜 슬퍼하고만 있는가, 어머니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서지 않고…’ 식의 진취적인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정도의 내용에, 근혜가 최 씨를 그토록 믿고 따랐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물론 그 이후 몇 차례의 만남이 더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 씨가 ‘뭔가 보여주었다’는 설이 파다하다. 온실 속에서 자란 근혜였기 때문에 최 씨의 그러한 모습에 금방 빨려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석연치 않은 것은, 왜 두 사람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의 ‘현몽설’은 그렇게 허황되다 하더라고 후자의 진취성에 대한 내용이라면 구태여 입을 꽉 다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즉, 두 사람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는 것은, 뭔가 일반에 공개하기에는 껄끄러운 내용이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기자는 비교적 최근까지 최태민과 가까이 지내온 J 목사로부터 바로 그 비밀스런 내용을 듣게 되었다.
“그 얘기는 제가 확실히 들었어요. 편지에 육 여사와 근혜만이 알고 있는, 둘만의 비밀을 썼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요. 그 비밀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육 여사의 영과 교감을 나눴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걸 누가 믿겠어요. 다만 제가 보기에는 결코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한테는 뭔가 있었어요. 우리끼리는 알지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하던 얘기를 제게 한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이 사람 정도 되면 이해가 되겠지 하는….”
영적 교감에 대해서의 신뢰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 구태여 진위를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최태민 씨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저명한 신학교의 학장인 J 목사는, 최태민 씨와 1년여 동안 1주일에 2, 3회씩 꾸준히 접촉해왔기 때문이다. J 목사는 최태민이 정통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단 내지는 사이비종교인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우려를 했다. 익명을 전제로 그는 한 가지 덧붙였다.
“나와는 종교적 관점이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었어요. 꽤 오랫동안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비슷한 관점 때문이었고, 결국 그의 제안을 제가 거부했던 것은 그가 생각하는 신은 유일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하나님을 한 분이 아니라 여럿으로 여기고 있었죠. 하지만 그는 예언적 능력과 투시 능력이 있었어요. 적어도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 정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능력이었죠.”
J 목사와 함께 최태민을 만나곤 했던 L 씨는 최태민 씨가 근혜를 정치적 지도자로 유도한 근거로 ‘앞으로는 아시아의 시대요, 남자보다는 여성의 시대가 된다’는 것을 주입시킨 듯하다고 했다. 마치 역학가들의 주장과 비슷하다.
그의 묘한 능력에 대한 뒷받침은 (비록 해석은 다르지만) 사이비 종교 연구로 유명한 탁명환 씨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마술이든, 일종의 최면술이든, 그런 게 있긴 있습니다. 근혜 씨도 아마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고….”
또 근영 씨를 밀어준 (즉 근혜 씨를 육영재단에서 물러나게 한) 숭모회 측에서도 그런 주장을 했다.
“최태민 씨가 근혜 씨를 최면술로 홀려 좌지우지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떨친 최태민의 위력적인 행동들
최면이냐, 영적 능력이냐의 논란은 차치하고, 어쨌든 그에게 보통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셈이다. 그 능력 역시, 소문으로 떠돌다 보니 무수한 곁가지를 쳤다. 더구나 최태민 씨의 과거행적이 그 소문을 입증하다시피 도왔고, 언론을 극도로 기피한다든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잠적한다든가 하면서 덩달아 소문의 부피도 커질 수밖에 없어졌다.
어쨌든 75년 3월, 박근혜 씨와 첫 대면한 한 달 뒤 임진강에서 구국 집회를 가진 최태민 씨. 그리고 무엇에 이끌리듯 그 현장에 참석했다가 졸지에 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위촉된 박근혜. 그로부터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초창기 3, 4년 동안 최태민의 활약(?)은 나라 전체를 뒤숭숭하게 만든 면이 없지 않다.
75년 4월 조직한 대한구국선교단은 1년 뒤 구국여성봉사단으로 개칭하고, 78년 12월 다시 구국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사단법인체가 되면서, 새마음봉사단이 탄생했다. 회원수도 비약적으로 늘어가 졸지에 200만~300만을 확보해갔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각종 기권 개입과 영향력 행사는 무소불위의 위력을 떨쳤다고 한다.
최태민이 관여하는 이 단체들에 줄을 대어보려는 각계의 인물들이 즐비했던 것과 당시 이들이 떨친 위력은 회고하는 이들마다 일치한다.
“구국봉사단에서 만든 구국십자군이 실제 군인들 뺨칠 정도로 위세를 떨쳤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계급이었죠. 십자군의 계급이 십자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그렇다 치고 그 모양을 생각해봐요. 십자가의 아래 위를 약간 줄이면 별모양 비슷할 거 아닙니까? 제복을 입고 그것을 달면 마치 장성처럼 보였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행사 참석을 하려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던 천안지구 단장이 있었죠. 헌병이 검문을 하려고 했죠. 군인 비슷한 복장인데 군인하고는 다르니까 무슨 특수부대인 줄 알았겠죠. 그러자 그가 호통을 친 겁니다. ‘이놈! 내가 누군줄 알고 감히 검문을 하려는 게냐?’ 그 헌병은 혼비백산해 내려가서 상부에 보고를 했죠. 즉각 조사가 벌어졌지요. 결국 그것은 유야무야되었어요. 정점에 최태민과 박근혜가 있었으니까.”
지금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이야기되지만 당시에는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 구국봉사단의 모태가 기독교였다는 점에서 일부 권력지향적 목사들이 어떻게 하면 줄을 댈 수 있을까 눈치를 보곤 했다는데, 그렇게 놀아난 교계가 부끄러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고 J 목사는 회고한다.
종교계뿐만이 아니었다. 기업들도 그의 행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업체마다 최태민에게 줄을 대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정말 엄청난 돈이 기부금으로 들어왔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들부터 시작해 중소기업들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세요. 대통령의 딸이 사회사업 좀 한다는데 누가 감히 거절하겠어요. 돈을 못줘 안달이었죠.” 당시 구국봉사단의 핵심간부였던 K 씨의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그때 기부금을 거절한 곳이 벽산그룹이었어요. 김인득회장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최태민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세무사찰까지 당하고… 호되게 혼났지요.”
구국봉사단의 자금담당으로 최태민의 심복이었던 C 씨의 말에 의하면, 벽산의 모든 장부와 서류가 청와대까지 들어갔고, 치안국 특수대까지 불려다니던 끝에 결국은 얼마간의 기부금을 내고 말았다고 한다. 경제계와 마찬가지로 유정회 국회의원 공천이라든가, 군장성 진급에까지 최태민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증언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코미디언 심철호 씨는 당시에 새마음봉사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최태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던 시대였어요. 간부들은 최태민 씨를 대통령 모시듯 했고…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죠.”
그 위세는 국회의원 공천과 군장성 진급에까지 뻗쳐가 곳곳에서 물의가 빚어진 것 같다. 심지어는 그의 전화 한통이면 장관․차관까지 달려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자네가 직접 근혜한테 얘기해 봐. 나한테 얘기 안한 걸로 하고...’
이쯤 되자 최태민에 대한 각종 탄원이 청와대에 쏟아졌다. 청와대 비서실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딸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즈음 최태민이 문제의 인물이라고 파악한 기자들 중 두 사람이 각각 박정희 대통령에게 ‘위험한 건의’를 했다.
한 사람은 대구매일신문의 김정남 씨(현 국회의원)였고, 또 한 사람은 경향신문의 김경래 씨였다. 물론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서였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는 공개적으로 최태민 씨에 대한 논의는 없었지요. 다만 이심전심으로 문제를 삼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죠.” 그 짐을 김정남 기자가 대신 졌지만 돌아온 것은 ‘청와대 출입을 금해 달라’는 통보였다고 한다.
김경래 씨는 ‘최태민에 대한 100가지 의문’이라는 메모를 전해주었지만, 역시 유야무야되었다고 한다. 이 메모는 다시 또다른 경로를 통해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전달된다. 공교롭게도 김재규 부장은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으로부터 똑같은 요청을 받게 된다. 그에 앞서 박비서가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일이 있었던 것. ‘잘릴 각오를 하며 올렸다’는 당시의 상황을 그는 J일보에 증언한 바 있다. 그때의 박대통령의 반응은 이랬다.
“퍽 고민하는 눈치였어요. 글자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뚫어져라 읽어보시더니 슬그머니 나한테 도로 주시면서 이러시는 거예요. ‘자네가 직접 근혜한테 이야기 좀 해봐, 나한테 얘기 안한 걸로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근혜양을 만나, 보고서를 보여주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문제는 그치질 않았다. 그러던 중 김재규 부장이 최태민 사건을 듣고 큰일이라며 찾아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민정비서실의 자료를 중앙정보부로 넘겨주게 된다. 최근 10·26 전후의 사정에 대해 입을 연 김재규의 동생 김항국 씨는 형님이 근혜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딸처럼 생각했거든요. ‘근혜 때문에 큰일이야…’ 하는 고민을 하는데, 박승규 민정수석이 도움을 청한 걸로 알아요.” 어쨌든 중앙정보부에서 백광현 안전국장의 주도로 면밀한 수사를 벌였고, 이 보고서는 또다시 박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대단히 면밀한 보고서였던 것 같다. 당시 보고서를 받아든 박대통령의 반응이 김재규의 입을 통해 모 기자에게 전달되었다. I지에 실린 당시의 반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와대 친국 이후 박근혜는 아버지의 조치에 눈물 흘리기도
‘부하들 앞에서 딸의 치부를 보고받게 된 박대통령은 노여움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 붉으락푸르락 얼굴 표정을 몇 번이나 바꾸다가 끝내는 분을 참지 못했던지, “정보부에서는 그런 일도 조사하나… 알았어. 그대로 두고 나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하고 화를 냈다’
그 보고서는 최태민의 부정행위와 사생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한 내용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그 유명한 대통령 친국이 벌어진다. 최태민 씨의 변호사 C 씨가 당시의 내용에 대해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연 씨가 그에 대한 기록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 둘을 조합하면 당시의 정황과 박 대통령의 심기를 엿볼 수 있다.
친국이 벌어진 것은 77년 9월 12일 밤, 대통령 서재에서였다. 박대통령 외에 근혜 양, 김재규 부장, 백광현 국장이 참석했고, 그 자리에 고려병원에 입원해 있던 최태민 씨가 불려왔다. 매우 무거운 분위기에 박대통령은 수사기록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직접 최 씨에게 물었다. 골자는 주로 ‘새마음봉사단이 이권에 개입하였느냐? 금품을 받은 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
그에 대해 최 씨는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새마음봉사단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어있기 때문에 각 지부로부터 건의 청탁 등이 많이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금품을 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답은 최 씨 측의 주장이고, 어떤 식의 문답이 오갔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일주일 뒤 박 대통령은 선우연 공보관을 통해 세 가지의 지시를 했다. 선우연 씨의 증언.
“최태민을 거세하고, 향후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라.”
이 사실을 접한 근혜 양은 얼굴이 하얘지면서 눈물을 지었다고. 그 안쓰러움에 선우연 씨는 며칠 뒤 다시 보고를 했다. “각하. 큰영애가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체면이 깎입니다. 여성봉사단만은 계속 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에 대한 박대통령의 대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자네, 최태민이를 가까이 안하게 할 수 있나. 자네에게 최와 근혜를 접근시키지 않는 조건을 붙여서 허락할 테니 그건 따로 의논해서 계속 일하도록 하시오. 사실 지난번에 내가 특명을 내리고도 근혜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없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팠고… 그간 새마음봉사단에 관해 최태민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 늘그막에 애들이라도 잘돼야 내가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는가….”
최태민 씨 입장에서 볼 때, 그 친국은 생애 최대의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봉사단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상에 커다란 해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 위험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그는 한동안 몸조심을 하며 대규모 활동을 자제했던 듯하다.
그리고 터진 10·26은 그에게 또 한 차례의 시련을 가져왔다. 김재규의 재판과정에서 바로 ‘최태민’이란 이름이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10·26사건 후 김재규가 법원에 낸 최후진술서와 고법․대법항고이유서 보충서 내용이 그것이다.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긴 하지만 주요한 것 한 가지는… 박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어서 서면으로 하는 진술 보충서 속에 남기고자 합니다.’ 이 보충서에 의해 최태민의 존재가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대상이 된 것이다. 또 그에 앞서 당시의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씨는 선우연 씨로부터 최태민의 처리를 부탁받았다. 선우연 씨가 부탁했다는 내용은 바로 ‘최태민을 영애에게 접근 못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합수본부의 수사를 받게 된 최태민 씨는 강원도 모 부대로 끌려갔다가 1년여 만에 풀려난 것으로 알려진다. 그때 수사에서 문제가 된 것은 ‘부정축재’ 부분이었다는 것.
두 번의 위험고비를 넘긴 최태민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
그 뒤부터 그는 더욱 몸조심을 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근혜 씨의 활동(이후부터는 박대통령의 유업을 기리기 위한 활동이 된다)에 노골적으로 관여하는 등의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90년 10월의 육영재단 사태 때 ‘최태민’의 문제가 오르내린 것으로 미루어 ‘노출되지 않는’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근영·지만 씨 같은 동생들이 직접적으로 ‘최태민을 누나에게서 떼어놓아야 한다’고 호소했던 것 때문이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박-최의 관계를 밝히려고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한 취재를 하지는 못했다. 주변인들의 증언에는 다분히 감정적인 내용들이 많아 신빙성에 문제가 있었고, 정작 당사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태민 씨는 89년 신사동에 만남의 교회를 만들어 선교사업을 하다 1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또 모 재벌의 기부금으로 재단법인체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실질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 단체 역시 박근혜 씨를 도와 ‘박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해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한다’는 정신이었다고 한다.
“별별 추측들이 많지만 제가 보기에는 치사한 모략들이 대부분이라고 여겨져요. 여자 문제니 뭐니 하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그 사람 그래도 꽤 진지합디다. 나라 걱정이라든가 박대통령 유족에 대한 걱정이라든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거듭되는 루머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지나친 소문이 많으니까, 아예 침묵하는 건 아닐지…. 저는 그렇게 봤어요. 뭔가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91년 말까지 그를 접했던 J 목사의 느낌이 맞는다면, 그가 기다리는 때는 도대체 언제일까. 그때가 되면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을까. 최태민 씨는 그러나 이미 82세의 고령이다. (우먼센스 1993년 11월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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