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분노에 중독된 사람 같다. 내가 알던 나라가 송두리째 박살 난 기분이다. ‘나라 잃은 심경’이 이런 것인가.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일이지만, 다른 종류의 글은 도저히 쓸 수가 없다. 나는 분노에 못 이겨 더 쓴다.
일단 나는 후안무치한 작자들의 사실을 회피하는 태도에 관해 써야 한다. 온 나라가 갑자기 튀어나온 미르, K 스포츠 재단에 관한 비리로 시끄러웠다. 늘 그렇듯이 국민들은 사실과 엄단을 원했다. 의혹의 얼개는 완벽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증거란 언제나 권력자들이 빠져나가는 한 줄기의 희망이다. 하지만 그를 잡아내야 할 검찰과 수사기관은 언제나처럼 지지부진했고, 논란이 가중되자 핵심 증거를 말살하고 실세들은 전부 어딘가로 튀었다. 권력을 쥔 사람들끼리 서로 수사하고 서로 빠져나갔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늘 목격했듯이, 검은 돈과 권력을 해먹는 사람들은 절대로 피해 입지 않았다.
여기서 하늘에서 떨어진 듯, 너무나 명약관화한 증거가 나타난다. 그걸 찾으라고 임명한 수사기관은 한통속이라 손을 놓고 밥이나 시켜 먹고 있었고, 한 언론에 의해 간신히 기적적으로 발견된다.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나태한 수사기관이 이 컴퓨터를 찾았으면, 아마 부숴버리고 불태워버리고 없애버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한 많은 사실이 이렇게 박살 났을 것이다.
그간 너무나 명확한 비리와 검은 실체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평생의 모든 것을 걸고 의혹을 제기해왔다. 최 씨 일가란 사람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해먹자, 의지 있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진실과 증거에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허나 증거를 찾지 못 했던 사람들은 전부 팔다리가 잘렸다. 언론사 사장이고 특별 감찰관이고 전부 목이 달아났다. 권력과 검은 돈에 대항하면 죽는 법이다. 어제까지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하지만 수사기관에 닿았으면 불타서 허공으로 증발되었을 증거가, 언론으로 대표되는 국민들에게 넘어오는 순간, 이 순간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 순간이 미칠 듯이 분하다. 그것이 없어졌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은 국무랍시고 꼭두각시놀이를 하고 최씨는 나라를 여전히 해처먹고 검찰은 오리발을 내뺐을 것이다. 왜 우리가 이딴 우연에 안도하고 또, 이런 걸로 사실을 알아내야 하는가. 자정 능력, 진실을 밝혀내는 힘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모든 기관이자 존재가 이 권력의 끄나풀이다. 누군가는 생명을 걸고 밝혀냈지만, 그 사실이 필요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겹다.
그래서 이제는 증거가 밝혀졌다. 이걸 찾지 못했으면, 의혹을 찾으려던 사람들은 죽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나오자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접근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거지발싸개 같은 사과를 한다. 그 사과가 이 시대와 국민 정서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딴 말이 형편없이 손가락질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걔네들이 전부 수사기관이고 권력자고 했으니 현실 인식이 전무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먹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해 먹을 수 있겠다는 발상이다. 그래서 사실도 뻔뻔하게 숨기고 증거는 부수고 관련자들은 해외에서 무위도식하고 국정도 해 먹었다. 하지만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이 나타난 진실을 여는 열쇠, 그게 우연히 목숨을 걸고 찾아내 세상에 나타나야만 거지발싸개 같은 사과라도 들을 수가 있다. 지금까지도 모든 일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분노가 치솟는다.
그래서 자기 범죄를 인정한 대통령은 상식적으로 그 당사자를 불러서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당사자는 독일에 갔다. 왜 독일에 갔는가, 왜 대통령이 언급한 범법자가 자기 마음대로 외국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안 돌아오느냐. 심지어 국정과 법치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이 자기와 ‘인연이 있다’고 인정한 일반인이 그러느냐. 도대체 왜 우리가 권력을 준 대통령이 그 사람 하나도 조사받게 못 하느냐. 사실은 명확하다. 대통령이 그 여자를 데리고 오기 싫어하거나, 그 여자는 대통령도 어찌 못한다. 이게 법치국가의 행정인가? 그 와중에 그 여자는 독일에서 멍청하게 잡아떼고 있다. 이건 국정이고,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고, 잡아뗄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여자가 대통령 위에 있는 나라다.
흙수저와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근원은 대한민국이 능력 본위가 아니라 부모 잘 만나고 줄 잘타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젊은이들은 그런 말은 말고 열심히나 살라고 공식 석상에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언급해줬다. 근데 이번에 밝혀진 사실은 우리나라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은 철저하게도 깡그리 짓밟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나라의 기본 시스템과 사회 정의는 권력자들이 몰래 전부 박살내버리고 있었다.
왜 아무 직책도 아니고, 평생 어떤 노력도 안 한 것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가. 어떤 디자이너는 평생을 업계에서 갖은 고난과 노력을 하면서 가방을 만들고, 대통령에게 가방을 만들어 들게 하는 것이 인생에서 크나큰 꿈이자 영광으로 알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든 가방은 대통령과 친한 아줌마가 자주 다니던 호스트바의 접대부가 만들었다. 노력보다는 권력을 가진 아줌마를 만나서 친했다는 이유다.
어떤 코디네이터는 대통령에게 격식에 맞는 옷을 골라서 입히는 것이 일생의 크나큰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관련된 어떠한 노력도 없던 아줌마가 국가적인 행사에서 대통령의 옷을 막 골라 입힌다.
어떤 공무원은 평생 공직에서 노력하면서, 결국 중책을 맡아 대통령에게 인사를 간언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 아줌마가 간언은커녕 그냥 자기 마음대로 인사를 한다.
어떤 학생은 이화여대에 입학하는 것이 꿈이고, 승마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한 여자가 별 노력 없이 고등학교 출석도 안 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부모 말 한마디에 지도교수도 자르고 리포트를 거지같이 내도 성적은 잘 받고 국가에서 몇 백억으로 그 여자 말 타는 것만 지원한다. 왜냐하면 아까 그 여자 딸이니까.
이게 헬조선이고 흙수저다. 그게 아니면, 도대체 이 사태가 무엇인가. 능력 본위의 사회를 선전하려면 높은 지위에 있는 자신이 먼저 보여야 한다. 지금 이게 노력으로 꿈을 이루는 세상인가? 개판이고 엉망이다. 만인이 헬조선이나 흙수저론을 주장했을 때, 자기가 그 단어를 깔아뭉갰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열이 뻗쳐오른다. 대한민국의 성실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사회적 지위를 쌓기 위해 밤새 공부했고 직장 상사의 핍박도 받으며 온갖 낭패를 겪는다. 하지만, 이들은 도대체 노력한 게 뭔가. 그냥 당신과 친한 사람들이 잘 되는 세상인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지껄였나.
우리 내각과 주요 기관의 시스템도 절망적이다. 현실 인식이 가능한 사람이 대통령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그들이 대통령을 닮아서 그러려니 하고 납득할 것이 아니다. 이게 정말 큰일이다. 대통령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투명하게 정치하라고 국민들이 맡긴 사람 아닌가? 그 사람이 뭐라고 혼자 연설문도 남한테 보내서 첨삭 받아 고칠 수도 있고, 주변에는 병풍만 뽑아 놓고, 국정도 일반인에게 보고시키고 논의 받고, 남북 관계도 보고받고 마음대로 하는가. 이걸 견제할 시스템이 전혀 없고, 주변 사람들은 시원하게 묵인하고, 심지어 의혹이 생기자 이 일반인을 온 청와대와 정부가 나서서 감싸기에 바쁘다. 대단히 역겹고도 더러운 세도다.
이게 민주적인 나라인가? 시스템이 뭐라고 독재를 용인하고, 십상시나 환관의 개입을 묵인하는가. 얼핏 생각하면 깨끗하고 투명한 정부를 만드는 편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공개하면 되니 훨씬 쉬울 것 같고, 숨기고 감추고 밀실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는 보는 눈이 많아 오히려 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 검은 밀실을 고심하고 또 고심해 굳이 이렇게 만들어 태연히 통용했고, 다 그렇게 해먹고 있었다. 어떠한 국민도 이런 체제를 원한 바는 없을 것이지만, 권력을 쥔 일부가, 그들이 이것을 만들었다.
자괴감이나 상실감, 온 국민이 그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해결책이나 어떠한 주장으로 끝날 수가 없다. 그런 주장은 어제나 오늘도 통하지 않음이 이 사태에서 너무 명확히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후안무치한 자들은 어제도 해먹었고, 오늘도 해먹었고, 더 이상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지금 가진 증거를 다 부수고 나온 증거만 가지고 책임을 돌리다가 적당한 선에서 자기네들끼리 멈출 것이다.
이 시국에서도 이런 흐름이 너무 명확하고 눈에 보이듯 뻔해서, 그냥 우리 모두가 분노에 중독되고 있다는 일갈만으로, 이 글을 닫을 수밖에 없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만약은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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