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반의 승리를 거둔 대선 후보 경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들이 경선을 하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날 아침이었다.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경선 후 행보’에 관한 보고회의가 열렸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한 내용이었으나, 다른 일정 때문에 계속 밀리다가 가까스로 경선 당일 날 시간이 잡힌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MB는 한 달 후, 1 년 후 등 미래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스타일이다. 중장기 계획에 대해 보고할 때는 늘 졸거나, 지루해했다. 어쨌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보고를 하고 있는데 중단이 됐다. 경선 당일이어서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회의를 중단했는데 딱 한 가지 결정한 사항이 있었다. 경선 캠프는 경선이 끝나면 바로 그날 저녁에 해산한다는 것이다. 패배하면 경선캠프 자체가 즉시 한산해 질 것이고, 승리하면 어중이떠중이가 몰려들어 난장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MB가 대의원 투표에서 패한 것이다. 다만 여론조사에서 앞섰기 때문에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신승을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대의원 투표에서 질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심지어 이재오는 전당대회장에 늦게 오다가 대의원 투표에서 패했다는 전갈을 받고 MB가 진 것으로 오해하여 캠프로 다시 돌아가다가, 최종 승리했다는 소식에 또 다시 차를 돌리는 일도 발생했다.
전당대회장에서 MB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이었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MB는 대통령이 되었구나 싶었다. 이후 대선 과정은 보나마나 뻔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대의원 투표에서의 패배가 가슴을 쳤다. 후보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그날 경선 캠프의 팀장급 인사들은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저녁에 캠프가 해산되자마자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혹시 MB가 다시 부르면 모를까 우리는 절반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할 것을 이심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9시경 잡무를 정리하고 자료들을 치운 후 집으로 향하는데, 한나라당에 출입하는 반장급 기자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니, 경선에서 승리했는데, 이무도 저녁을 사주는 사람이 없다. 지금 우리끼리 밥을 먹고 있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날 밤 이런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로 캠프는 자중하는 분위기였다.
이명박이 대선 후보로 정해진 뒤 이런 경위로 나는 일에서 잠시 손을 놓았다.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명박이 불러주지 않는데 굳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정태근, 신재민 등 대부분이 그랬다. 그때 이동관만 혼자 남아서 이명박을 수행했다. 사실 이동관은 경선 한 달 전쯤에 캠프에 합류했기 때문에 절반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가장 약했다. 이동관은 이때를 발판 삼아 훗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 이명박, “내 허락 없이는 언론에 말하지 말라!”
대선후보가 된 뒤 일주일간 이명박의 행보는 갈지자였다. 우왕좌왕, 좌충우돌 했다. 하루 사이에 상반된 발언이 나오는 등,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치명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만에 이명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주간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던 나는 인터뷰를 멈추고 이명박과 45~50분을 통화했다.
이명박의 전화는 늘 “지금 어딨어요?”로 시작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의원회관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비서실장 이야기가 나왔다. 이명박은 “그런데 말이야. 비서실장에 윤여준 씨가 거론되는데 말이 돼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비서실장 하는 게 말이 되냐구요”라고 말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윤 장관은 나이는 많은지 몰라도 생각은 젊은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이명박이 “당신이 했구먼!”하며,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이명박을 만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전까지 이명박은 나를 비교적 어렵게 대하고 항상 말도 하대를 하지 않았었다.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하자 그동안에 쌓였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요지는‘내 허락 없이 앞으로 절대 언론에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이명박이 최종 허락하기 전에 언론에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명박은 내가 “이것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보고하면 “좀 생각해봅시다”라며 늘 시간을 끌었다. 어떤 보고든 “한 번 해보세요”라고 그 자리에서 말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고, 그러는 사이에 하루이틀이 그냥 흘러갔다.
정치는 매사가 타이밍이다. 이런 식으로 미루어서는 일을 그르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에라 모르겠다. 잘못되면 책임지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그냥 알아서 처리하곤 했다. 고비 고비마다 즉시 결정을 해서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줘야 하는데, 이명박이 결정을 안 하니 답답한 마음에 일단 결행하곤 한 것이다. 운이 좋았는지 크게 잘못된 적은 없었지만, 이명박은 그동안 이런 내 행동을 보면서 늘 가슴 졸이며 화가 났던 것 같다.
이명박이 금방 결정을 안 하는 이유는 왜일까. 내가 보기에는 정주영 회장 밑에서 기업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몸에 밴 습관인 것 같다. 정태근의 말이 재미있다. “이명박은 ‘그렇게 해!’라고 말하지 않고, ‘알아서 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와 ‘알아서 해’는 작은 차이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알아서 해!’는 일이 잘못 되면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어?”라고 말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어투다. 그것을 잘 아는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알아서 미리 일을 해버린 것이다. 일주일 만에 전화를 한 이명박은 이처럼 옛일을 들춰내면서 내게 한참을 퍼부어댔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내일 오세요”라고 말했다.
# 경선 패한 친박계 포용 주장,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실 이명박이 내게 전화를 걸기 전에 최시중이 나를 불러 “이렇게 가서 되겠느냐. 일은 당신들이 해야 되는데…”라고 했다. 대선을 치르려면 선대위를 구성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선대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비서실장을 임명하고, 비서실장이 책임지고 선대위를 꾸려야 했다. 정병국은 내게 최경환이나 김성조를 비서실장으로 추천했다. 경선에서 패한 친박근혜계를 포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원내대표는 김무성이 하고 비서실장을 최경환이나 김성조가 한다면 친이·친박 간 당내 화합이 이루어지고 좋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경선이든 뭐든 권력게임이 끝나면 적군을 끌어들이는 게 정치 세계의 교과서다.
그 교과서를 처음으로 정리한 이가 당 태종 이세민이다. 당 태종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 형 이건성의 측근이었던 위징을 데려와서 책사로 삼는다. 그러면서 ‘정관의 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연다. 이것이 당태종이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정치가로 불리는 이유이다. 김영삼도 3당 합당을 해 이종찬, 박태준과 암투를 벌이다가 후보를 쟁취한 뒤 처음으로 임명한 비서실장이 민정계인 최창윤(육사 출신, 전 총무처 장관)이었다. 김대중도 영호남의 화합, 전 정권과의 화합 차원에서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데려다 썼다. 당시 이명박이 최경환이나 김성조를 비서실장으로 쓰고, 원내대표를 김무성(김무성은 그때부터 원내대표를 하고 싶어 했다)을 시켰으면 친이·친박 갈등 문제는 거기서 정리가 됐을 것이다. 그것이 친이·친박 갈등의 분수령이었다.
이명박에게 그런 구상을 얘기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비서실장은 임태희, 원내대표는 안상수로 결정되어 있었다. 이상득과 이재오가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임태희는 경선 과정에서 맹형규, 권영세 등과 함께 줄곧 중립을 지켰다. 그러다 경선이 끝나고 이명박이 후보가 되자 경동고등학교 후배인 장다사로를 통해 이상득과 연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다사로는 당시 이상득 국회 부의장의 비서실장을 하고 있었다.
임태희가 비서실장으로 발표되자 경선 때부터 일해왔던 공신들의 사기가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친박인사를 비서실장으로 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경선 기간 내내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중립을 지킨 사람에게 캠프의 핵심 중책을 맡기는 것은 명분, 실리를 다 잃는 아무 득이 없는 인사였다. 소위 지금까지 캠프를 운영해온 실세들의 힘을 빼고 견제할 수 있다는 게 득이라면 득일 것이다.
이때부터 ‘이상득 플랜’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셈이다. 자기가 캠프에서 힘을 써야 하는데 직접 나서기가 불편하니 자기 사람을 앉혀 놓고 리모트컨트롤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재오는 차기 당대표를 노리고 자신의 친구인 안상수를 원내대표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친박계를 적극 포용하는 쪽으로 갔으면 박근혜는 이미 그때부터 힘이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못하게 한 이들이 이상득과 이재오다. 물론 나도 내 자신을 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명박과 당과 정부를 위해 내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명박 정권은 이후 친이·친박 갈등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 집권 과정이 정권 수립 후의 과정을 좌우한다
비서실장은 임태희였지만, 이명박은 선대위 꾸리는 일을 내게 맡겼다. 임태희는 사람들을 잘 몰랐고, 이명박도 임태희를 잘 몰랐다. 나는 일을 할 때 혼자 하지 않고, 다 불러 모아서 함께 한다. 그리고 임태희를 포함한 6인 회의를 통해 최종결정하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이명박으로부터 선대위를 구성하라는 지시를 받은 나는 선대위를 거창하게 꾸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였다.
87년 체제 이후 역대 정권 가운데 성공한 정권이 없다. 모두 다 실패하고 말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실패의 양태가 거의 비슷하다. 심지어는 문제의 내용과 발생시기가 대강 비슷하다. 역대 정권의 사건일지를 만들어 겹쳐보면 중첩되는 경우도 많다. 이 얘기는 무엇인가. 되풀이되는 정권의 실패에는 무언가 구조적 요인이 있다는 얘기다. 단임 정권들은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유사하다. 집권과정에서 모든 문제를 잉태하는데 그 과정이 유사하니, 집권 후에 산출되는 문제도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친인척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문제가 왜 되풀이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극히 단순화하면 결국 대선자금이 문제다.
경선을 비롯해서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법정 비용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 전두환, 노태우 때는 조 단위였고, YS, DJ 때는 수천억 원 단위였다가 노무현, 이명박 때는 천억 원 단위 아래로 내려온다. 액수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나 사회의 정치자금 흐름 규모가 작아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면 줄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또 그 돈이라는 게 법정비용 이상의 돈이고, 불법적인 자금이다. 위험하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것을 믿고 맡길 사람은 친인척뿐이다. 가족에게 자금 관리를 맡기는 또 다른 이유는 떼어먹어도 덜 아깝기 때문이기도 했다. 역대 정권에서 대선자금은 예외 없이 친인척이 주로 담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친인척인데 위험부담이 큰 돈까지 관리를 하니 그의 힘은 견줄 자가 없기 마련이다. 자연히 권력 실세가 된다. 이 실세 주변에 사람이 몰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실세 주변에서 그를 호가호위하는 이들이 매번 되풀이되는 낙하산 인사와 국정농단의 주역들이 된다. 이명박 때도 친인척인 이상득이 돈 관리를 거의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정권의 문제가 반복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당시 대선은 이명박이 이긴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캠프를 방만하게 꾸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캠프를 방만하게 하는 제일 큰 요인은 조직, 직능이다. 그래서 나는 이명박 캠프에서는 조직, 직능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조직은 표도 안 될뿐더러 돈만 많이 들어가고 혼란만 가중시킨다. 그리고 결국 집권 후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야기해 정권에 부담만 줄 것이다. 선대위를 가볍게 꾸리면 그런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그러니 경량급으로 꾸리자.”
그래서 선대위에서 내 직책은 전략기획팀장이었다. 역대 캠프에서 실세라고 하는 자의 직책이 팀장이었던 적은 없었다.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상징적으로 이렇게 만들었다. 이러면 누가 와서 캠프의 본부장이나 위원장을 시켜달라고 하기가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구상은 실패하고 만다. 이상득, 최시중 등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그들에게 다 자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람이 몰려들면 물리적으로 거절하기 힘들다. 결국 그 부담을 못 이겨서 조직본부를 만들고 직능본부를 만들면서 결국 선대위는 과거의 선대위와 같은 모양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대선에서 조직은 큰 의미가 없다. 조직이 약한 노무현이 이것을 보여줬다. 조직이 뭐냐. 조직은 원래 A를 찍을 사람을 조직을 동원해서 B를 찍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대선에서 A를 찍을 사람이 나중에 B를 찍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선은 배운 사람이든 안 배운 사람이든,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 자기가 좋은 사람을 찍지, 누가 이 사람을 찍으라고 해서 찍지 않는다. 대선은 공중전이다. 지상전은 거의 의미가 없다. 역대 정권을 보면 박철언이 시작한 월계수회부터 시작해서 대선 조직의 계보들이 있다. YS는 중앙청년회, DJ는 민주연합청년회가 있었다. 노사모· 박사모는 자발적인 조직이기에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이런 조직은 오히려 파워가 있다. 아직도 야당에서 친노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자발적인 노사모의 파워 때문이다.
월계수회 같은 지상전용 조직은 돈만 먹는 하마이고, 표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솔직히 말해 조직이 아니라 그냥 명단에 불과하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정치적인 사기라 할 수 있다. 2007년 대선 때의 선진연대도 비슷했다. 선진연대라는 조직의 명단에는 온갖 교회 명부가 다 들어가 있다. 소위 대선에서 조직한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명단 장사에 불과하다. 이게 월계수회부터 선진연대까지 반복되는 것이다. 역대 대선마다 이런 문제가 되풀이되면서 낙하산 인사로 이어지고, 각종 이권 청탁으로 이어졌다. 노태우-박철언, 김영삼-김현철, 김대중-세 아들, 노무현-노건평, 이명박-이상득으로 이어지는 역대 정권 권력실세의 계보와 그 운명이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요약하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집권 과정이 정권 수립 후의 과정을 좌우한다. 모든 문제가 집권 과정에서 잉태되는데, 집권 과정이 같으면 집권 후의 과정도 같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단임 정권들이 비슷한 집권 과정을 거쳐 왔고, 또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쳤다. 이것의 핵심을 단순화 시키면 친인척 문제로 귀결된다. 이 고리를 끊어야만 안정적인 집권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선자금제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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