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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노포열전] 인천노동자를 위로한 밴댕이와 막걸리, 수원집

하인천 밴댕이골목의 시초

2016.10.19(Wed) 10:18:33

인천 출신 시인 김민정은 최근에 펴낸 시집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아빠 김연희의 메일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하인천 밴댕이집에 가서

밴댕이구이와 간자미무침으로 저녁을 먹다

밴댕이는 연탄불에 구워먹는 그 맛인데

이제는 미리 구워서 나온다

(하략)

 

-시 ‘수단과 방법으로 배워갑니다’ 부분 

 

김민정의 부친은 구 인천의 공장노동자 출신이다. 그는 은퇴한 지금도 하인천(인천역 앞 주변을 인천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에 가서 추억의 음식을 드신다. 이 시의 소재다. 노동자의 음식이다. 인천은 개항지이면서 나중에는 산업의 전진기지였다. 노동자들의 도시였다. 하인천은 차이나타운이 있다. 동시에 그 자리 주변은 노동자들의 골목이었다. 부둣가에 빼곡한 산업시설에서 노동자들이 일하고, 이 일대에 와서 한잔 술을 마시고 고단함을 잊었다. 그 동네의 산 역사가 바로 수원집이다.

 

“아유, 옛날에는 아주 대단했어. 너무 손님이 많아서 밴댕이랑 병어랑 아주 썰어넣고 팔았어요. 굽고 회로 먹고. 다른 요리는 없었고, 제철 생선을 그렇게 요리했지. 독(항아리)에다가 막걸리 받아놓고 팔았어요. 막소주도 있었고. 맥주? 그런 건 안 먹었어요, 비싸니까.”

 

막소주는 그때 다루소주라고 불렀다. 다루란 일본어인데, 준(樽, 술통 준)을 뜻한다. 진로소주가 팔리던 때에도 다른 소주 회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말통들이 소주를 공급했다. 다른 술집은 이런 막소주를 팔았지만, 수원집은 막걸리가 전문이었다.

 

이 집의 안주인은 서점분 여사(69)다. 이 집은 나도 우연히 알았다. 원래 이 동네를 좋아하는데, 술맛 당기는 외관에 끌려 들어갔다. 알고보니 전설적인 밴댕이골목의 원조였다. 원래 이 집보다 먼저 생긴 밴댕이집이 있었다. 이기택 씨라는 분이 하던 곳으로 속칭 ‘인민군집’이라고 불렀다. 이기택 씨의 바짝 깎은 머리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당시 엄청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이 일대에서 일하고 살고 그랬는데, 마땅한 실비집이 별로 없었다. 인민군집은 19606년대에서 70년대를 풍미했던 술집이었다. 노동자뿐 아니라 가난한 시인, 화가, 묵객이 많이 몰려왔다. 그들은 자욱한 연기속에서 밴댕이를 굽고 회를 씹었다.

 

서 여사의 남편은 신태희 씨(74)다. 둘 다 수원 출신이라 수원집이라는 가게 이름을 얻었다. 신태희 씨가 바로 인민군집의 직원이었다. 그러다가 독립하여 수원집을 차렸던 것이다. 나중에 이기택 씨의 인민군집은 사라졌고, 수원집만 남아서 옛 노동자시대의 영화를 증언한다.

 

인민군집은 정식 상호가 아닌 무허가술집이었다. 그때는 대개 그랬다. 기택이네라거나 기택이 바라고도 불렸다. 현 자유공원(과거에는 만국공원) 가는 길 오른쪽에 이기택 씨가 약주와 막걸리를 담는 항아리 두 개를 파묻고 술집을 한 게 시초다. 안주는 바로 인천역 뒤가 부두였고 항구였으니 그곳에서 조달했다. 밴댕이, 병어를 굽고 회로 썰었다.

 

“그때 어시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오포산(자유공원이 있는 산) 넘어 많이 살았어. 새벽에 보면 그들이 떼를 지어 이 앞을 지나 어시장으로 출근했다가 일이 끝나면 이기택 씨의 인민군집에 와서 술을 마셨지.”

한 단골손님의 증언이다.

 

서 씨의 증언이 계속된다.

“예전에 기자랑 문인들도 많이 왔어요. 원래 서서 먹었지. 선술집이었어요. 앉을 자리가 어디 있어요. 그냥 서서 먹는 거지. 의자가 없었어요. 워낙 장사가 잘돼서 밴댕이와 병어 같은 걸 미리 다 썰어뒀어요.”

술은 잔에 500원, 밴댕이는 3000원이었다. 90년대 들어 비슷한 집들이 하나둘 생겼다. 시민들이 이 일대를 밴댕이골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수원집은 특이하게도 아침 9시 반이면 문을 연다. 노인이 된 옛 단골이 많아서 일찍들 오기 때문이다. 낮술이 더 많이 팔리는 희한한 집이다. 밴댕이골목은 이제 옛날 같지 않다. 노동자들이 별로 없고, 묵객들도 발길이 뜸하다. 언제까지 수원집이 살아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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