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쓴풀(용담과, 학명 Swertia pseudochinensis H. Hara)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그 앞에 무상(無常)은 없다. 어느새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고 찜통더위에 모두가 한결같이 죽네 사네 하더니만 벌써 가을이 되어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찬 기운이 돈다. 한여름 울창한 숲 더미에 묻혀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이고들빼기, 구절초 등 가을꽃들이 어느새 찾아온 계절의 변화를 간파하고 제철을 놓칠세라 다투어 꽃대를 올린다.
그들 사이에 밤하늘의 별처럼 꽃잎을 활짝 펼친 꽃을 만났다. 연한 자줏빛 바탕에 흰 줄, 보랏빛 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꽃, 곤봉처럼 솟아오른 통통한 암술머리가 돋보인 자주쓴풀 꽃이다.
단정하고 깔끔한 연보랏빛 맑은 꽃, 해마다 가을 되어 자주쓴풀 꽃을 볼 적마다 어린 시절 옆집 순이가 횃대보 만드려고 하얀 수틀에 정성스레 한 땀 한 땀 꽃을 피워내던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내 어린 시절 시골 초가집에서는 요즘처럼 장롱 벽장이나 옷장이 없어 벽에 횃대를 걸어두었다. 그 위에는 옷을 걸어두었기에 옷에 먼지가 내리지 않도록 횃대보라는 옷 가리개를 씌워두었는데, 대부분 신부가 혼숫감으로 손수 만든 수예품이었다.
당시 시골 처녀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몸이지만, 서로의 속내를 터놓고 수다도 떠는 사랑방 같은 동네 모임방이 있었다. 그곳 호롱불 밑에 앉아 신혼의 달콤한 꿈을 그리며 혼숫감으로 가져갈 횃대보를 만드느라 수틀에 정성껏 아롱아롱 십자수를 놓곤 했었다.
횃대보에는 행복, 스위트 홈 등 글자나 모란과 매화 등 사군자 외에도 해바라기, 백일홍, 백합 등 이쁜 꽃들을 수놓았는데, 그때 옆집 순이가 수놓던 이름 모를 그 꽃, 눈에 익은 그 꽃이 먼 훗날 알고 보니 바로 자주쓴풀이었다.
자주쓴풀 꽃은 9~10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원뿔형 취산꽃차례로 달리며, 위에서부터 핀다. 연한 자줏빛이 도는 맑은 보라색이며, 꽃부리는 별처럼 다섯 갈래로 깊게 갈라진다. 몹시 쓴맛이 나기에 쓴풀이라 하는데 줄기는 네모지며, 잎은 마주나고, 잎자루가 거의 없다. 줄기잎은 피침형으로 양 끝이 뾰족하다. 꽃잎 암술머리 아래에 있는 두 개의 꿀샘은 길고 꼬불꼬불한 하얀 털로 덮여 있다.
전국의 양지나 반그늘 숲 속에 피는 두해살이풀로서 만나기가 쉽지는 않은 꽃이다. 한방에서 소화 불량, 급·만성 설사, 위궤양 등 치료에 사용했으며, 간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주쓴풀 꽃
나는 보았네
호젓한 풀숲길에서.
내 어린 시절 옆집 순이가
하얀 수틀에 정성스레
한 땀 한 땀 피워내던 꽃.
깔끔하고 단정하게
봉곳이 피어나는 꽃.
소박한 듯 화사해서
범접할 수 없네.
가을 햇살 번지는 저녁놀에
연보라 맑은 빛으로
하늘 바라 짓는 미소,
아! 바로 그 꽃!
이 가을 저녁놀에
순이도 지금 나처럼
세월 따라 익어가겠지.
박대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