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겡키데스카, 아타시와 겡키데스.” (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은 누구나 있다. “나는 왜 그때 그 애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못했을까.”, “그 애도 내가 생각했던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첫사랑은 감정 컨트롤 미숙으로 대부분 실패한다. 당신이 첫 사랑과 결혼해 지금도 행복하다면 그야말로 천생연분을 만난 것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날이 많이 차지면서 겨울로 향해가는 시점을 맞고 있다. 이 맘때가 되면 필자에게 꼭 생각나는 영화가 있으니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낸 이와이 슌지 감독, 나카야마 미호 주연의 ‘러브레터’(1995)가 그것이다.
‘러브레터’는 현재까지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시행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정책의 최대 수혜 영화로 꼽힌다. ‘러브레터’는 국내 개봉 전부터 이제는 사라진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 등 PC 통신을 통해 입소문이 난 작품이다. 저작권의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불법 비디오나 영상으로 이미 유통돼 상당수의 국내 사람들이 이 영화를 정식 개봉 전에 봤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 극장 체제가 걸음마 단계 시절인 1999년 개봉했음에도 11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지금까지도 국내에 개봉된 일본 실사영화 중 이 영화의 흥행기록을 능가하는 영화는 나오지 않고 있다.
‘러브레터’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을 짚어보는 게 맞는 순서인 것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미 1960년대부터 수입돼 어린이 시청 시간에 공중파에서 방송돼 예외다.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일본 문화 수입 금지 이유는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 등 과거사 문제로 인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5년이나 되어서야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시작했고 일본군 활동 등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치부를 감추기 위해 ‘반일, 혐일’을 부르짖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이런 상황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달라졌다. 김 전 대통령은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며 더 이상의 문화 쇄국정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논리로 일본 문화 개방에 나섰다.
1998년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영화의 경우 한일 공동제작, 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등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들에 한해 개방했다. 최초의 국내 극장 개봉 일본 영화는 그해 10월 선보인 일본의 명 코미디언이자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느와르 ‘하나비(花火)’(1997)였다.
‘하나비’에 이어 두 번째로 개봉한 일본 영화로는 일본의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일본 전국시대 ‘풍림화산’ 전술로 유명한 다이묘 다케다 신겐의 대역 인물을 그려낸 ‘카게무샤(影武者)’(1980)로 같은 해 12월에 개봉했다. ‘카게무샤’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다. 하지만 일본 영화 개방으로 국내 영화 산업이 큰 피해를 볼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너무 작품성을 따진 영화들이었고 문화적 이질감으로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김대중 정부는 1999년 9월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개방을 확대했다. ‘러브레터’가 밀레니엄을 한 달 앞둔 그해 11월 국내에 개봉했다.
여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는 등산 중 조난을 당해 죽은 후지이 이츠키(남, 아역 카시와바라 타카시 분)를 상대로 사랑과 추억이라는 애틋한 감정을 통해 죽음의 상처로부터 회복해나가는 와타나베 히로코와, 그와 이름이 같았던 중학교 동창 후지이 이츠키(여, 아역 사카이 미키) 1인 2역을 맡았다. 히로코가 옛 사랑을 못 잊는 청순한 요조숙녀 형이라면 이츠키(여)는 발랄하고 왈가닥 같은 기질도 가지고 있는데 나카야마 미호는 이런 상반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이츠키(여)와 히로코는 죽음에 대한 서로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히로코는 극 중반까지 남자친구의 죽음을 애써 부정하려 한다. 이츠키는 독감이 갈수록 심해지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는 등 폐렴으로 별세한 아버지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이츠키(여)는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츠키(남)에게 어린 시절 풋 사랑을 느끼면서도 자신에게 짓궂게 장난을 치며 괴롭혔던 이츠키(남)를 외면해야 했던 기억을 찾게 된다. 히로코는 이츠키(여)와 닮았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청혼한 이츠키(남)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설원을 향해 “오겡키 데스카. 아타시와 겡키데스”를 부르짖으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자신 주위를 맴돌던 아키바 시게루(토요카와 에츠시 분)를 택하게 된다.
히로코가 마음을 정리한 결정적 계기가 이츠키(남)가 조난을 당해 죽어가면서 부른 곡이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い珊瑚礁)’(1980)를 흥얼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죽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이 곡의 첫 가사는 “내 사랑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간다”다. 이츠키(남)는 이츠키(여)와 중학 시절을 일본 최북단 훗카이도의 서부 오타루에서 보내고 간사이 지방인 고베로 이사를 가게 된다. 따라서 고베에서 오타루로 향하는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며 이츠키(남)는 죽어가면서도 오타루에 사는 이츠키(여)를 사랑했다고 고백한 셈이다.
동료들은 그가 왜 이 노래를 불렀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츠키(여)와 편지를 주고받은 히로코는 이츠키(남)의 마음을 확인한 것.
영화 제목으로 정한 러브레터는 이츠키(여)와 히로코가 주고받은 편지가 아니라 간 이츠키(남)가 이츠키(여)에게 보낸 러브레터였다. 숫기 없어 자신과 같은 이름의 여학생을 사랑하면서도 고백을 못한 그가 도서관의 책속 도서카드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놓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것이다. 히로코가 이츠키(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도서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영화의 엔딩은 지금도 회자된다. 겨울을 지나 이른 봄에 접어든 시기에 이츠키(여)의 중학교 도서관 후배들이 그녀의 집을 찾아와 마르셀 프로스트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츠키에게 건네면서 도서카드 뒷면을 보라고 권한다.
이츠키(여)는 자신의 어린 시절 얼굴을 도서카드에 이츠키(남)가 정성스럽게 그린 것을 확인하고 첫 사랑의 감동을 느끼면서 히로코를 향한 독백으로 “이 편지는 가슴이 아파 보내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대사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러브레터’는 이츠키(남)의 비밀 러브레터를 이츠키가 계속 비밀로 간직한다는 결말로 마무리하면서 매년 겨울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남고 있다. 정부가 2004년부터 일본 영화 수입을 전면 허용했음에도 이 영화를 넘어서는 일본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필자의 억지 주장일까.
혹자들은 이츠키(남)를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으면서도 그냥 그 여자랑 닮은 여자 있으니 덜컥 만나고, 청혼까지 했다가, 첫사랑을 그리다 죽어버렸으니.
필자는 이츠키(남)를 위한 변론을 해본다. 이 글을 읽는 남성 독자가 만약 가장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예를 들어수지나 설현)을 꼭 닮은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면 독자는 연예인을 사랑한 것일까.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계기는 될 수 있어도 그녀를 사랑한 것은 맞지 않을까.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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