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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현군의 꿈이 서린 계획도시, 수원 화성

2016.10.13(Thu) 20:20:43

아이와의 여행은 늘 두 가지를 두고 고민하게 한다. 재미와 배움. 욕심대로라면 둘 다 챙기고 싶지만 그런 곳들을 골라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라면 곳곳에 담긴 풍성한 이야기들이 지루할 틈 없이 아이의 호기심을 수시로 뒤적거리게 하기 충분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 건축 기술의 집약체이자 드라마틱한 역사가 적당히 버무려진 수원 화성. 물론 그곳에 닿기 전까지 부모에게 ‘선행학습’의 부담이 없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그 공부의 즐거운 보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다

 

1795년, 정조는 회갑을 맞이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어가 행렬은 그 어느 때보다 웅장하고 화려했음을 후대에 남겨진 의궤가 증명한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악대가 풍악을 울리고, 수백 개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으며, 위엄 있게 무장한 군관들이 행군한다. 여기에 회갑연을 위한 내외빈과 시중드는 나인들까지 더해 그 수행인원이 약 6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은 현재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사거리에 자리했던 시흥행궁을 지나 안양을 거쳐 수원과 의왕의 경계를 이루는 지지대고개에서 다리쉼을 하고서야 화성행궁에 이르렀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세자였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었고, 그 아들인 정조 역시 25세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대로 맘 편히 밤잠을 잔 적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알려지니 말이다. 어쨌거나 정적들을 물리치고 왕권을 안정시킨 그는 대신들의 우려 섞인 시선에도 죽은 아버지의 복권에 온 힘을 쏟았다.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자리했던 무덤(수은묘)을 당대 최고의 길지인 경기도 화성의 화산 자락으로 천장하며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이름을 고쳤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현부에게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의 현륭(顯隆)이란 명칭에서 정조의 효심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어 정조는 장헌세자의 능을 옮기면서 그 일대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곳이 바로 팔달산(146m)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수원이다. 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다. 당쟁을 일삼던 정세를 타파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그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한양이 아닌 온전히 새로운 도시가 필요했다. 요즘으로 치면 계획 신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 계획의 꽃은 ‘화성(華城)’에서 화려하게 발화했다. 도심을 무시로 넘나드는 성벽과 성문들은 수원 입성 후 가장 인상적인 풍경이라 할 것이다.

 

사실 공성전의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역사여서 그런지 우리나라에 ‘성(城)’이라고 할 만한 조형물이 그다지 많지 않고,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벽을 쌓아 이어간 기법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그 흔적만 겨우 남거나 현대적인 건축 기법에 추측을 더해 어설프게 복원한 것이 많다. 이에 반해 수원 화성은 비록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복원을 한 것임에도 축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물론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현대에 복원했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사단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규격과 건물의 특징, 재료의 가공과 공법, 인력과 예산의 투입 등 화성 축조의 ‘모든 것’을 그림과 수치 등의 기록으로 남긴 ‘화성성역의궤’였다. 이처럼 정확한 기록에 따라 만든 것이니 현대에 복원되었더라도 그 가치는 여전했던 셈이다.

 

10월 9일 열린 정조대왕 능행차 재연(왼쪽)과 수원화성문화제 폐막연. 사진=수원시

 

 

걸음걸음마다 만나는 과학과 미학의 조화

 

수원 화성은 수원 도심을 여행하는 동안 어디서건 한 번 이상은 마주하게 되는, 수원의 상징과도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18세기 성곽 건축물 가운데서도 이만큼 아름답고 과학적인 곳은 드물다고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5.52km의 이 성은, 정문인 장안문(북문)과 창룡문(동문), 화홍문(서문), 팔달문(남문) 등 4개의 대문을 두고, 4개의 높다란 감시대인 적대(敵臺), 성 밖으로 불룩하게 튀어 나와 감시와 공격을 용이하게 한 치(雉), 성벽을 따라 혹은 성벽 안쪽에 높게 쌓은 공격형 구조물인 4개의 공심돈, 5개의 포루 등을 두루 갖춰 군사적으로 매우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성이 아름다워 적이 공격할 의지를 잃고 두려워하게 만들라”는 정조의 의지를 잘 반영하기도 했다.

 

수원 화성은 어느 곳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수려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어 성곽을 따라 크게 한 바퀴 걸어서 여행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문, 치성과 공심돈, 그리고 성 안의 여러 누각과 훈련 시설 등을 하나하나 다 챙겨 본다면 하루를 꼬박 걸어도 부족할지 모른다. 

이 여행의 출발점은 어디서건 상관 없지만, 수원역에서 접근한다면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시작하면 조금 더 편하다. 팔달문에서 시작해 남치와 남포루, 그리고 팔달산 줄기를 따라 비죽이 난 서남각루에서 다시 서남치로 이어지는 길인데, 조금 가파를 수 있는 첫 코스임에도 수원 화성이 원래의 지형을 얼마나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어 의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여러 성은 읍성(성곽 안에 마을이 형성)이나 산성(마을의 기능은 없이 방어와 대피 목적) 둘 중 하나의 구실만을 했는데, 수원 화성은 팔달산의 산세를 깎아 내리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는 한편, 북서쪽은 평지로 이어지도록 해 산성과 읍성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포루와 치 등에서 군사 시설인 총안(銃眼)과 현안(懸眼) 등과 더불어 견고한 성의 면모를 더듬어 가는 동안 성벽 너머 시원하게 펼쳐지는 수원 시내의 모습은 사뭇 도시를 새로운 풍경으로 다가오게 한다. 이렇게 서남쪽을 둘러보면 팔달산 정상의 누각인 서장대에 이른다. 왕이나 장군이 지휘하기 위해 세워진 망루이자 지휘소인데, 과연 이곳에서는 화성 일대와 수원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았을 220여 년 전에는 더욱 탁월한 전망을 선사했을 것이다.

 

수원 화성의 정문인 북문, 장안문. 서울에서 내려온 왕이 처음 당도하는 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옹성 구조이다.


여정은 서문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지나 수원 화성의 정문인 북문, 장안문으로 이어진다. 서울의 숭례문과 다르게 수원 화성의 정문은 북문이다. 이쯤에서 아이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길. 

그 답은 서울에서 내려온 왕이 처음 당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풀이가 될 것이다. 특히 불룩하게 성 밖으로 모양을 낸 옹성 구조는 우리나라 성곽에서 보기 드문, 공격과 방어 모두 용이하면서 바람을 막는 구실까지 하는 매우 과학적인 시설이다. 장안문을 비롯해 주요 사대문은 이러한 옹성을 둘러 미학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수원 화성을 상징하는 많은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장안문이다.

 

장안문 옆 북동포루 아래로 예의 화홍문과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이어진다. 일일이 수원 화성을 다 챙겨볼 겨를이 없는 이들이 장안문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고 가는 것도 장안문과 동북각루, 화홍문 등이 화성에서도 유난한 매력을 내뿜기 때문이다. 

화홍문을 넘어 수원천을 건넌 여정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연무대와 우아하고 당당한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는 동북공심돈으로 향한다. 공심돈 역시 수원 화성이 아니고서는 우리나라에서 쉬 보기 힘든 성곽의 구조물인데, 우뚝 솟은 위용과 미려한 외관은 정말이지 적들도 넋을 잃고 봤을 것이 분명하다는 감탄이 절로 들 지경이다. 이윽고 창룡문(동문)을 지나 동편을 푸근히 감싸는 성곽을 따라 가면 출발점인 팔달문으로 되돌아온다.

 

장안문 옆 북동포루 아래로 화홍문과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이어진다. 화성에서도 유난한 매력을 내뿜는 곳이다.


 

수원 화성이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다고?

 

사실 이 수원 화성을 따라 오로지 걸음으로 모두 둘러보고 헤아려 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성은 단지 요새의 역할이 아니라 화성유수부라는 새로운 도시를 둘러서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당시 도시 하나를 넉넉히 감쌀 정도의 길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장대 아래, 행궁 위에서 ‘화성어차’라는 이동 수단을 운행하고 있어 수원 화성 관람에 도움을 준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고, 성 안팎을 오가며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성곽의 곳곳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열차의 종착점에 이르러 연무대 한쪽에 마련된 국궁체험장에서 활쏘기도 체험해 볼 수 있으나, 워낙 수원 화성을 찾는 이들이 많다 보니 주말이면 국궁 체험해 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수원 화성을 둘러싼 건축 기법과 역사적 사실에 집중했다면 조금 더 흥미 있는 이야기 하나에 더 귀기울여보길 권한다. 역사적 사실로 완전히 인정받은 건 아니지만, 꽤 많은 이들이 수긍하는, 바로 수원 화성 곳곳에 남겨진 종교적 상징들에 얽힌 사연들이다. 

 

알려져 있듯이 수원 화성의 설계를 주도하고 거중기 등 기막힌 설비를 고안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일찌감치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인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세례까지 받았을(세례명은 요한) 만큼 믿음이 깊었지만,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노론에 흠이 잡힌 탓에 긴 유배의 길에 오르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배교를 하고 이때 황사영 등 주변인들을 발고하는 등 그의 태도는 급변했지만, 적어도 화성 설계 당시만 해도 신심이 깊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화성 곳곳에 천주교의 교리와 상징을 남겼다고 추측되고 있으니 성곽을 둘러보는 동안 이 지적 추리의 즐거움을 맛봐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화성의 주요 시설 가운데 홍수 조절을 담당하는 북수문인 ‘홍화문’의 수문이 7개인 이유를 천주교의 일곱 가지 성사(일생을 살면서 교인으로서 이행해야 하는 7가지 의례)에서 따 왔고, 수문의 형상이 무지개를 닮은 이유는 구약성경의 일대 사건인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이 다시는 물로 벌하지 않겠다는 징표로 무지개를 띄워 보여준 데서 비롯되며, 홍화문 옆 방화수류정의 정자 누각이 위에서 내려다 보면 (우리나라 누각 지붕 양식으로서는 거의 드물게) 십자로 된 것, 정자 아래와 주춧돌 사이 벽돌에 86개의 십자형 무늬를 새긴 것 등이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에 14개의 총안(성 밖의 적을 향해 총을 쏘도록 만든 구멍)을 둔 이유가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14처를 말하는 점, 창룡문 안쪽의 공격형 돈대인 ‘동북공심돈’이 둥근 모양인 점은 천주교 미사에 쓰이는 성체를 상징한다는 전언도 있다. 

 

방화수류정은 누각이 십자 형태인 까닭에 다산이 곳곳에 숨겨둔 천주교 상징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약용을 두고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강하게 부정하며, 특히 화성 설계에 종교적 상징이 폭넓게 적용되었다는 점은 더더욱 펄쩍 뛸 만한 일이다. 결국 이를 증명할 사료가 없으니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분히 달리 해석될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반면 천주교에서는 성 안팎에 담긴 종교적 상징과 더불어 주요 박해 당시 숱한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던 현장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화성을 중요한 천주교 성지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이들 상징물을 찾아가는 투어 프로그램을 따로 진행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렇듯 여러 모로 수원 화성은 그 자체로 빼어난 건축물임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정조가 꿈꿨던 새로운 세상의 실재와 마주하는 묘한 감동을 전하는 곳으로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당파 정치를 일삼고 왕권을 위협하는 대신들이 득실대는,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아비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한양을 벗어나 백성이 국가의 든든한 보살핌 속에서 자유로이 상업과 생업에 종사하며 풍요롭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신도시’가 성읍 안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력하면서도 폭압적이지 않은 왕권이 백성을 먼저 향하는 마음으로 다져지고, 그야말로 사람의 삶이 먼저 평화로운 세상. 새로운 조선을 가늠하려 한 ‘인프라’가 되었던 수원 화성은, 그래서 못 다 이룬 왕의 꿈을 곳곳에서 만나는 듯해 더 큰 애잔함으로 현재의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수원 화성 전경. 사진=수원시



여행 정보

수원 화성 관람 정보 

관람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관람요금: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문의: www.swcf.or.kr, 031-228-2765

 

화성어차

운행구간: 연무대―화홍문―화서문―팔달산―화성행궁―팔달문―수원화성박물관―연무대

탑승요금: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 화성행궁 매표소 031-228-4683, 연무대 매표소 031-228-4686​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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