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의 남자들이 잔뜩 인상 쓰며 같은 방향을 향해 떼 지어 걸어가는 포스터, 남성들만 초청한 ‘온리 브로’(Only Bro)’ 이벤트 등은 ‘아수라’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온리 브로 시사회는 전체 시사회 규모의 1%(200명)일 뿐”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상남자 취향 저격’이란 문구와 해당 시사회의 존재는 이미 뜨거운 감자가 돼버렸고, 영화의 이미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아수라를 정치인, 검사, 경찰, 깡패들이 잔뜩 나와 멋있는 척 하며 폭력을 미화하고, 여성을 마음껏 성적 대상화하며 소비하는 ‘한남충’(여성혐오 하는 한국남자를 비하하는 말) 영화라고 오해하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한남’동에 아수라의 제작사 ‘사나이픽쳐스’가 있다는 것마저 농담의 소재가 됐다(물론 사나이픽쳐스의 이름과 그 동안 제작한 영화 목록들은 그런 선입견을 공고히 할 소지가 있었다). 9월 28일 개봉 뒤 온라인에 올라오는 한줄 영화평과 평점 역시 혹독했다.
일주일 쯤 지났을까? 내내 혹평에 시달리던 아수라를 보다 못한 ‘아수리언’(아수라 마니아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나 역시 이들의 영업 덕에 아수라를 관람하게 됐다. 까고 보니 선입견과 전혀 다른 영화였다. 아수리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초반에 공개된 포스터를 보면 등장인물들은 서로 끈적한 관계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완전 콩가루다. 이들은 각 신마다 서로의 서열을 확인하며 긴장을 형성하고, 권력 구도는 신마다 엎치락뒤치락 반복한다. 예컨대 형사 정우성한테 위압적으로 굴던 검사실 계장 정만식은 다음 씬에서 검사 곽도원의 눈치를 보고, 서울대와 영남 출신이 아닌 곽도원은 또 부장검사에게 빌빌대는 식이다. 곽도원은 민선 시장 황정민과 극 내내 팽팽하게 맞서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하 스포일러) 결국 칼침 여러 방 맞고 앰뷸런스 불러 달라 징징대는 가소로움을 드러낸다.
그리고 정우성은…. 서열이 거의 밑바닥이다(제일 밑바닥은 ‘짝대기’). 낯선 이를 만날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대며 센 척해보지만, 번번이 얻어맞거나 무릎 꿇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비극적이기 보단 희극적으로 연출된다.
대사의 흐름 역시 희극적이다. “마지막 기회란 게 있잖아요” “없어~ 씨발~” “너는 문제가 참 많아. 네 문제가 뭔지 알아?” “(꼰대질 거하게 하려고 원기옥 모으는 것을 끊어내며)네~네~ 문제 많죠~ 잘 알아요.” 같은 식이다. 쓸모없어진 놈 잘라내며 살아남는 윗대가리들과, 이들에게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과잉 충성경쟁을 하는 이들의 광기 어린 행각 역시 대부분 (잔인하지만)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고발한다.
아수라는 또한 폭력과 윤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상대적으로 덜 악인이었던 정만식, 윤지혜가 분한 캐릭터의 죽음은 안타깝다. 개인의 적극적인 권력 의지에 인한 폭력과 타락이 아닌, 속한 조직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한 이들 역시 아수라장에 휘말려서 공멸해버리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윤리를 지키는 것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이곳, 한국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 같은 거 더러워서 피한다는 태도가 최선일까? 그렇다면 힘을 가진 조직에는 타락한 사람들만 남고, 한국사회는 더욱 부패하는 것 아닐까? 선출직 권력을 괜찮은 놈에게 부여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까(이 영화의 악의 축 중 하나는 ‘민선시장’이다)? 이 영화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아수라를 보고 나니, 이것은 오히려 여성들이 낄낄대고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느껴졌다. ‘개저씨’가 만든 영화였다면 시종일관 치명적인 분위기를 흘려대며 의리, 사랑, 연민 등의 감정으로 절절한, 따끈한 도가니탕 한 사발을 만들었을 것이다. 개저씨스러움을 ‘정의로움’과 접붙이고, ‘착한 폭력’이면 괜찮다고 폭력을 미화하는 그런 태도가 이 영화에는 없다. 클리셰적 설정은 그것들을 부수고 비웃기 위함이었다.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목격해온, 그러나 끝내 그 질서에 동화되지 못하고 번번이 불편함을 느껴온 자가 한 쪽 입 꼬리를 올린 채 각본을 써내려가는 모습이 상상된다. 그리고 ‘폭력의 카르텔’ 바깥의 존재만이 아수라의 냉소를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재현한 권력 구도와 폭력 문화의 원본이 되는 현실의 가담자는 이런 아수라장에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폭력의 외부자이거나 전리품일 때가 빈번한 여성들이 영화가 이끄는 냉소에 비교적 편히 동참할 수 있는 이유다. 헐벗은 여성을 관음 하는 신, 불필요하게 선정적인 섹스신이 등장하지 않는 것 역시 쾌적하게 느껴진다.
한국영화의 주된 소비층은 2030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0 여성은 그동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 보러올 호구로 취급됐고, ‘천만영화’를 노리는 제작자와 홍보사는 남성관객을 불러들이기 위해 더욱 골몰했다. ‘아수라의 홍보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홍보 내용대로 ‘상남자 취향 저격’ 영화를 기대했던 이들은 오히려 아수라를 불편해했고, 아수라를 좀 더 열린 태도로 볼 가능성이 있던 여성들은 영화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등을 돌렸다. 아수라가 흥행이 주춤한 데는 이와 같은 맥락이 있다고 보인다.
홍보 과정에서 암시된 것과 달리, 이 영화는 뻔 한 개저씨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개저씨들을 비웃는 영화이며, 기존과는 뭔가 다른 것을 만들려는 작가적 의식과 모험 정신의 산물이다. 기술적으로도 ‘못 만든’ 영화가 아니다. 속도감 역시 관객들을 지루하게 두지 않는다. 또한 ‘잘생긴 게 재밌는 것’이라는 격언(?)을 신봉하는 자라면, 정우성과 주지훈을 보며 충분히 재밌을 것이다.
권력의 속성을 낯부끄러울 정도로 해부하여 비웃는다는 점, 판타지가 반영된 정의 구현이 부재하다는 점, 잔인한 장면의 수위가 높다는 점에서 영화를 개운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리고 남의 말만 듣고서 이 영화가 자신의 취향이 아닐 거라 예단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것과 뭔가 다른 이 영화를 온전히 경험할 기회를 놓치는 길이고, 또 다른 새로운 시도들을 주춤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이 영화는 지금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김성수 감독은 애초에 이 영화의 제목을 반성으로 지었다고 한다. 홍보사가 되새겨야 할 제목이다.
최서윤
월간 ‘잉여’ 편집장(a.k.a 잉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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