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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7] 경선승부의 분수령 ‘도곡동 땅’ 사건

네거티브에 맞서 고군분투…도곡동 땅 사건 고소 취하 뒤집고 최태민 의붓아들 기자회견

2016.10.13(Thu) 15:31:33

# ‘도곡동 땅’ 사건의 경위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전에서 제일 큰 사건은 이른바 ‘도곡동 땅 사건’이다. 이명박이 경선 고비를 넘기 위한 최후의 걸림돌이 됐던 사건이다. 당시 박근혜 캠프는 시종일관 네거티브에서 시작해서 네거티브로 끝났다. 늘 그렇지만 지는 후보는 네거티브 말고는 할 게 없다. 어떤 선거판에서 누가 지고 있는지 보려면 누가 네거티브를 하는지 보면 된다. 당시 네거티브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박근혜 캠프의 최경환은 어느 날 이명박의 재산이 2300억 원이라고 공개적으로 얘기했다. 이명박 캠프에서는 황당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내놓으라고 따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랬더니 최경환의 답변은 이랬다. “그게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아라!”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이명박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던 최경환. 사진=비즈한국DB


당시 최경환과 함께 대 이명박 공격의 앞줄에 서 있었던 사람은 이혜훈, 유승민 등이었다. 네거티브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자실로 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이혜훈 등의 경우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못할 수 있다”고 한마디 했다. 내 말의 뜻은 그들의 주장이 비방이나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으로 법에 저촉되어 총선에 나오고 싶어도 못나오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명박이 정권을 잡으면 공천을 안 준다는 뜻’이라고 보도했다. 박근혜 캠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나를 공격했다. 나는 이 일로 당원권 정지를 당했다. 당시 나는 이 일로 몹시 억울해하고 있는데 아끼는 후배가 찾아왔다. “형, 나는 이 일이 형에게 잘 되었다고 생각해. 형 혼자 나서서 치고  받고 싸우느라 형만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는데, 차라리 잘 되었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도곡동 땅’은 이명박이 사장으로 있던 현대건설에서 1977년 상반기에 사들인 땅이다. 그런 뒤 현대건설은 1985년 이명박의 처남 김재정과 큰형 이상은에게 15억여 원을 받고 팔았다. 그때도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10년 뒤인 1995년 9월 김재정과 이상은은 이 땅을 263억 원을 받고 포스코개발에 판다. 10년 만에 247억여 원의 차익을 남긴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당시 박근혜 캠프의 상임고문으로 있던 서청원 의원이 “최근 김만제 전 포철 회장으로부터 이명박 후보의 부탁을 받고 포스코개발이 도곡동 땅을 매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해 ‘도곡동 땅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참지 못한 이재오가 오세경, 박준선 변호사를 불러 검찰에 고발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도곡동 땅 수사가 시작되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을 더 키운 셈이다. 사실 확인을 한다는 명분으로 이명박이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명박 측이 고소한 사건인데, 검찰 수사는 이명박을 향하고 있었다. 언론에서도 계속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 육탄전 직전까지 간 이상득과 이재오

 

이상득과 이재오는 이 일 때문에 한판 크게 싸웠다. 이상득은 “뭐 하러 소송을 했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늦은 시간 이명박의 용산캠프에서였다. 이상득과 이재오가 얼마나 서로 열을 냈던지 집기가 부서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현장에 있던 나와 정태근 등은 두 사람을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명박에 대한 수사는 강도를 높여갔다. 여론도 점점 나쁘게 돌아갔다. 이상득을 비롯한 원로들은 소를 취하하자고 주장했다. 이대로 가면 경선에서 불리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유만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평소 매우 합리적이었던 이상득이라면 고소 취하를 반대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취하한다면 의혹을 인정하는 셈이니 경선에서 더 불리해 질 것이 뻔했다. 이상득, 박희태 등 원로들은 취하를 해야 한다고 하고, 나와 정태근 등 소장파는 안 된다고 맞섰다. 평소와 달리 이상득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이명박은 취하하는 쪽의 손을 들어줬다. 형식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박희태를 내세워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캠프 부위원장 회의까지 열었고, 회의는 소장파들을 배제시킨 채 고소를 취하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2007년 8월 20일 도곡동 땅 수사와 관련해 이명박 캠프 의원들이 대검찰청을 방문해 검찰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소송 취하하면 진다” 이명박 압박해 뒤집어

 

나는 다급했다. 만약 소송을 취하해서 여론이 악화되면 경선은 해보나마나라고 판단했다. 이명박이 스스로의 약점을 인정을 한 꼴이 되니 변명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고소를 취하하기로 결정한 날 오전 10시쯤, 용산캠프 밑 커피숍에 나와 신재민, 박형준, 정태근 등이 모였다. 나중에 주호영도 왔다. 이구동성으로 고소를 취하해서는 안 된다며 번복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나보고 그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소를 취하하러 검찰청에 가기로 한 시각은 오후 2시,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후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았다. 광주광역시에 있었다.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후회라도 남지 않게 마지막 설득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심정에서였다. 

 

정두언 : “시장님, 소를 취하하면 절대 안 됩니다. 결정적으로 이것 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이명박 : “그래요?” 

정두언 : “시장님, 모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명박 : “그렇게 하세요.”

 

뜻밖이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어쨌든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해야 했다. 이명박의 처남인 김재정에게 급히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김재정의 측근인 신학수에게 전화해 어디냐고 물으니 소를 취하하기 위해 검찰청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시장님의 승낙을 받았으니 고소를 취하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때가 1시 40분이었다. 

 

그런 뒤 바로 기자실로 가 고소 취하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원로들이 다시 뒤집을 수도 있으니 언론에 알려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당시 고소 취하 여부가 경선 승리를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보았다. 만약 당시 고소를 취하했으면 여론에서 10% 정도 빠지면서 결국 경선에서 졌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을까? 이상득은 이 국면에서 왜 적극적으로 나섰을까? 후보이자 동생에게 불리한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지금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대목이다.

 

서울중앙지검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일주일 앞둔 2007년 8월 13일, “이상은 씨가 자신의 명의로 갖고 있던 도곡동 땅의 지분은 이 씨가 아닌 제3자의 차명 재산으로 보인다.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는 모른다”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명박 캠프에서는 “이명박 죽이기 수사”라며 강력 반발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일에 임박해서 나온 최종 수사 결과 발표에서는 이명박이 도곡동 땅의 실제 소유주라는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명박이 당선인 시절 진행된 특검의 수사 결과도 동일했다. 

 

 

# 판을 깨지 않기 위해 계속된 양보들

 

2007년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였다. 이명박-박근혜는 사활을 건 투쟁을 벌였다. 앞서 얘기했듯이 박근혜 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거티브로 일관했다. 박근혜와 이명박 간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은 여러 차례 양보를 했다. 논란이 됐던 ‘여론조사 하한선 보장 조항’에 대해 박근혜의 주장을 수용해 양보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근혜는 강재섭 대표가 제시한 중재안 3개항 가운데 제3항 ‘국민투표율 하한선(67%) 보장을 통한 여론조사 반영비율 확대 조항’에 극렬 반대했다. 이로 인해 경선판이 깨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에 이명박은 전격적으로 양보했다. 이명박은“경선룰 중재안을 놓고 계속 당이 분열되는 모습을 보았고 이로 인한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저만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승리를 위한다는 마음에서 결심했다. 이를 계기로 해서 한나라당이 화합하고 단결해서 아름다운 경선을 치르고, 오는 12월 19일 국민의 모두의 열망인 정권교체를 이루자”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약속과 원칙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잘 판단하셨다”고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명박은 자신이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판을 깨지 않기 위해서 박근혜의 요구를 계속 받아들였다. 요구를 받아준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상대에게 표를 주는 것이다. ‘이만큼 줄 테니까 더 나가지 마라.’ 이런 식이었다.

 

2007년 8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경기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함께 앉아 있는 박근혜, 이명박 예비후보. 사진=비즈한국DB


마지막에 양보한 것이 후보 검증 청문회였다. 세상에! 자기당 후보를 앉혀놓고 검증하자고 덤벼들면서 망가뜨리는 정당이 어디 있나.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을 벌어졌다. 청문회 자체가 이명박 청문회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명박은 앞서가는 후보였기 때문에 네거티브를 하지 않았다. 물론 네거티브 자료는 다 준비를 해놨는데, 그것을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후보를 검증하는 청문회에서 청문인들이 질문을 할 때 근거 없이 질문을 하면 자칫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가 될 소지가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언론에 보도된 것을 인용해서 물어보는 형식을 취한다.

 

박근혜는 이명박에 대해 줄곧 네거티브를 해온 것들이 언론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할 수 있었으나, 이명박은 그동안 네거티브를 한 게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이명박 캠프는 궁여지책으로 언론 작업을 했다. 당사자를 설득해서 양심선언이나 기자회견을 하도록 하고 그것이 기사화되면 그것을 인용해서 청문인들이 질문을 하는 과정을 밟는 식이었다. 나는 이런 전반적인 작업을 총괄 지휘했다. 그런 일을 믿고 맡길 사람도, 나서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최태민의 의붓아들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하이라이트는 조순제였다.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아들로 최태민의 마지막 부인이 데려온 아들이다. 과거에 문공부장관 비서관도 지낸 조순제는 박희태, 최병렬과 동년배 지기라고 알려져 있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최태민은 공식적으로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다 딸이었다. 데리고 있는 아들이라고는 의붓아들 조순제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구국봉사단부터 시작해서 영남대, 육영재단까지 사실상 도맡아 한 사람이 조순제로 알려져 있다. 청문회장에서 강훈 변호사가 박근혜에게 물었다. “박근혜 후보는 조순제 씨를 아십니까?”박근혜가 “모릅니다”라고 했다. TV를 보고 있던 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설마 박근혜가 조순제를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07년 8월 20일 제9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국민투표 여론조사 결과가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비즈한국DB


결국 조순제는 경선 막바지께 일요일, 기자실에서 강재섭 대표에게 탄원서를 내면서 ‘이런 사람은 안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박근혜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언론은 박근혜에 대한 것은 취급을 잘 안했다.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이 ‘최태민을 우리 언니한테서 떼어 주세요. 저 놈이 우리 언니뿐만 아니라 다 망칩니다’라는 내용으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가 언론에 알려졌을 때도 겨우 ‘오마이뉴스’만 보도했다. 이명박 측에서는 결정적인 자료들을 공개해도 언론에서 보도를 안 하니 나중에는 인쇄소를 하나 접수해 책자로 만들어서 전국의 지구당에 뿌려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했을 정도였다. 

 

조순제가 기자회견을 하고 난 이틀 뒤(2007년 8월 14일 화요일) 대구에서 17대 대통령후보자 선출 선거 합동연설회가 열렸다. 대구는 박근혜의 아성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구 연설회가 이명박 판으로 흘렀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날 박근혜 캠프의 분위기는 이해가 안 되리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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