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주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2세 어린이와 할머니가 수술이 늦어져 결국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연을 꼼꼼히 되짚어 보니, 현재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아이다.
아이는 전북대병원이 있는 전주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견인차가 2살 아이의 허벅다리와 골반과 복부, 그리고 발목을 깔았다. 중증외상환자였다. 골반도 고정하고, 복부를 열어서 장기에서 뿜어나오는 피를 지혈하는 수술이 한시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더불어 발목에도 개방성 골절이 있어 미세접합 수술을 해서 닫아주어야 했다. 전북대병원 응급실에서는 즉시 본원 수술이 가능한지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시간은 오후 6시고, 응급수술만 가능하다. 시스템상 야간에 열 수 있는 수술방은 2개이지만, 현재 두 방 모두 수술이 진행 중이다.
본원 수술이 되지 않는 환자라면 무조건 한시라도 빨리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야 환자를 처음부터 더 종합적으로 케어할 수 있어 생존율이 오른다. 불가피한 상황이므로 가장 좋은 선택은 최대한 가까운 병원으로 가서 즉시 수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스템은 일일이 전화를 해서 알아보는 거다. 그래서 담당의는 가깝고 외상 치료가 가능한 병원에 하나둘 전화를 건다.
원광대 병원이 거부하자, 이제 전원 문의는 한 개 도를 가로질러야 한다. 대전의 을지대, 충남대 병원이나 광주의 전남대 병원이다. 기본적으로 여기서 한 번 문제다. 전라북도의 중증외상환자는 전북대나 원광대 병원의 수술이 불가능하면 무조건 한 개 이상의 도경계를 넘어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길에서만 한 시간 반은 더 걸린다.
이제 전화를 받는 입장이 되어보자. ‘2세 중증 외상’, ‘발목 미세 수술’, ‘생사의 기로’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까다로운 요청이다. 게다가 외상센터로 지정이 되어 있어도, 당시 충분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환자가 위험해지므로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전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되어 있다. 환자는 이미 시간이 지나 사망 확률이 높고, 2살이라 엄청 까다로운 수술을 해야 하는 데다가 병원에 경제적으로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환자다. 전원을 받아줬을 경우 모든 사람의 고생문이 눈앞에 훤하다.
안 받을 이유는 엄청나게 다양하고 많고 가깝다. “응급수술중이라 수술방이 없다.” “수술을 하고 나와도 중환자실이 없다.” “발목을 미세접합할 의사가 없다.” “미세수술 기계가 고장 나서 지금 수리 중이다.” “우린 원래 소아외과 전문의가 없다.” “외과가 학회 중이라 수술할 사람이 없다.” “노조 파업이다.” “누구 휴가다.”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이 중 하나만 대면 전화 거는 입장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기사에 따르면 전북대병원은 이러한 전화를 전국에 14통을 걸고 전부 거부당했다. 기본적으로 전주에서 다친 외상 환자를 위해 전국에 전화를 걸어야 한다. 받겠다고 하면 환자는 발목을 열고 골반이 접힌 채로 전국 어디라도 가야 하는 것인데, 그나마도 한 군데도 안 받아주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아이는 전주에 있는 응급실에 6시간 동안 있다가, 끝내 전북대에선 전원 문의에 실패하고, 결국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연결해준 수원 소재 아주대 병원까지 헬기를 타고 간다. 이송할 헬기는 늦장을 부리고, 아주대 병원에 도착하니 자정이다. 결국 그때야 환아는 수술방에 들어가고, 익일 새벽 4시 40분 사망한다.
이 시스템에서 아이가 살 수 있었다면 그건 운이 좋은 거다. 체감상으로 이런 환자를 전원 문의했을 때 흔쾌히 받아주는 병원은 손에 꼽는다. 미세접합과 소아 복부 수술과 전신 외상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의료진이 항상 대기하고 있고, 수술방과 응급실 베드와 중환자실 베드가 넉넉히 갖춰진 병원이 있을까? 그런 병원은 모든 사람이 이미 몰려가 누워 있어 무조건 저 앞의 조건 중 하나가 안 되기 때문에, 현장에서 실제로 몇 통만 전화를 걸어보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실제 우리나라의 중증 외상 환자 치료시스템의 민낯이 정확히 이렇다.
결국 나는 여기서 또 시스템의 문제와 경제적인 논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의료계는 경제적인 사항에 훨씬 민감하다. 의사들은 많은 공부를 하고, 또 자신의 직업을 얻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 결과로 평생 의학에서 임할 세부 분야를 정하게 된다.
이 선택에서 인기과와 비인기과를 나누는 기준을 우리는 전부 알고 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이 일을 하고 일한 만큼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냐에 관련된 것이다. 비보험이라 수가도 높고 생명과도 관련 없는 피부과, 성형외과는 인기과고, 보험이라 돈도 많이 안 되고 생명에도 직결되어 위험한 외상외과, 흉부외과는 비인기과다. 비단 의료 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가 이런 논리로 작동되고, 의료계도 이런 논리로 돌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같은 외상 환자의 전원 문의를 해보자. 특이 병력 없는 70세 고관절 골절 환자다. 실은 이 사람은 우리 병원에서 전원을 보낼 리도 없을뿐더러 전화하면 즉시 받아주고 구급차까지 와서 실어간다. 이 환자는 경제적으로 손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특이 병력 없는 외상성 디스크 환자나 단순 염좌로 입원한 환자 등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꼭 중증 외상 환자가 아니더라도, 외상을 입은 중환자 하나 전원 보내기는 정말 힘겹다. 전화를 여기저기 돌려보고도 못 보낼 때가 많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면 무조건 손해만 보는 환자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은 잘 안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자를 다른 병원에 보내고 받는 과정에서 경제적 논리는 생각보다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지방에서 일하는 것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직장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지방에 가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득이 분명할 때다. 직업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거나, 경제적인 보탬이 수도권보다 더 되어야 한다. 의사들도 지방에 교수 자리가 나서 커리어가 쌓이거나, 아니면 페이가 높을 때만 지방으로 간다. 그래서 경제적 이유로 지방에는 백내장 수술하는 안과 의사나, 노인성 질환을 보는 내과 의사, 노인성 골절을 보는 정형외과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외상외과 의사가 지방에 간다고 해보자. 기본적으로 개업은 불가능하다. 취직해서 지방 큰 병원에 간다고 해도 외상 환자의 수가는 기본적으로 무조건 적자다. 환자를 보면 볼수록 손해만 본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일자리를 없애고 관련 분야와 관련된 시설도 다 없앤다. 어디 하나 있다손 치더라도 사회적으로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페이도 넉넉치 않다.
당장 권역외상센터를 지정하자, 그 센터에선 외상외과 의사가 있으면 지원금을 받으므로 채용 공고를 냈고, 외과의사 입장에선 커리어가 쌓일 수 있으므로 그 수요만큼의 외과의사가 각 시도 중심병원에 몇 명 더 고용되었을 뿐이다. 이 센터까지 마련해 놓고도, 여기서 다른 시도의 외상 환자까지 치열하게 받아야 할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다. 병원 재정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환자인 데다가 많은 사람의 손이 가고, 잘못되면 책임 뒤집어쓰고 해명하기 바쁘기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2012년부터 뒤늦게 외쳤던, “전국 어디서든 외상 환자를 살린다.” “외상 환자를 무조건 받아 살려라.” 이런 공염불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논리가 해결되지 않아 소 귀에 경 읽기다.
2016년 8월 건강보험공단의 흑자는 20조가 넘었다. 그리고 건보공단 직원들은 최근 5년간 2200억의 성과금을 나눠먹기 했다. 이는 의료 행위 중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분야에서 수가를 쥐어짜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시다시피 ‘외상’은 대표적으로 보험 적용이 되는 분야고, 또 많은 처치가 급박하게 이루어지므로 환수가 쉬운 분야다. 가뜩이나 수가 자체도 낮을뿐더러 병원 입장에서는 적자로 골치 썩이는 분야다. 게다가 ‘소아외상’은 난이도도 높고, 보험 적용은 더 엄격하다. 이런 경제적인 논리 때문에 진짜 외상을 다루는 의료 분야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고, 체계도 말라버리고 있다.
경제적인 논리임을 파악한 정부는 외상센터 건립에 헛된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결국 시스템의 근원은 놔둠으로써 문제를 계속 방치하는 꼴이다. 그 와중 우리나라에선 1년에 3만 명이 외상으로 꼬박꼬박 죽어가고 있다.
극단적으로 외상환자를 보는 병원과 외상을 보는 의사가 떼돈을 벌면 어떨까. 고관절 골절처럼, 외상 환자를 서로 급박하게 데려가서 자기 병원 수술방에 한시라도 빨리 밀어 넣으려고 아우성이지 않을까? 그리고 지방 어디든 외상외과 의사가 넘쳐나 누군가 다치면 달려들어 살려내기만을 기다리고 있게 되지 않을까? 현실적이지는 않아도,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보고는 한다.
중증 외상 환자라는 단어는 발음하기에는 참 쉽지만, 실제로 마주하면 너무 끔찍한 단어다. 환자는 죽음 직전의 고통에 계속 발버둥 친다. 수술을 한다고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서 수술한 이후라면, 이제는 나아질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으므로 고통도 견딜 만하다. 여기서 어떠한 조치도, 희망도 없이 마냥 응급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증 외상 환자들은 가만히 보고 있기에도 너무나 딱하다. 수술에 재간이 없는 나라도 어떻게든 수술방에 들어가 고통을 덜어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외상 환자 시스템은 내가 적나라한 글을 써냈던 2013년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2016년에도 사람은 교통사고가 나면 죽는다. 이 생생한 증명을 나는 오늘도 한 기사에서 읽어낸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