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승마(미나리아재비과과, 학명 Cimicifuga dahurica)
청명한 날씨임에도 침엽수와 활엽수 교목이 울창한 깊은 숲 속의 계곡은 괴괴하고 어둑하다. 약간은 습하면서도 상큼하게 맑은 숲 공기가 골바람 타고 밀려와 산비탈 오르며 솟은 등줄기 땀을 식힌다.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나 보다.
신갈나무, 사스래나무 등 활엽수 교목과 진달래, 철쭉, 관목이 함께 우거진 계곡, 눈부신 가을 하늘에서 숲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한 가닥 빛살을 길게 내 뻗친다. 활동사진 영사기에서 스크린에 쏘는 빛살처럼 빛줄기가 선명하다. 지나간 한 시절 교복 갈아입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켰을 때의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빛살이다.
숲 사이 빛살을 받으며 짙게 우거진 숲 속 어둑한 계곡 길을 돌아가는데 계곡 아래 잡목 사이로 환영 같은 희끄무레한 것이 언뜻 스친다. 발길을 돌려 가까이 다가가니 눈빛승마가 곱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일행 뒤를 따라가느라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걷다가 무성한 잎새에 가려진 계곡 쪽의 하얀 꽃 더미를 지나칠 뻔했다.
짙은 초록에 잠긴 그늘진 숲 속이라서 눈빛승마의 이파리가 유난히도 하얗게 빛났다. 하얀 눈송이가 수북하게 쌓인 듯 길게 늘어진 가지마다 망울망울 겹쳐 핀 하얀 꽃송이, 푸른 수풀 사이에서 비단 자락 치마폭처럼 실바람에 우아하게 한들거리고 있었다.
눈빛승마는 깊은 산 속, 약간 습한 곳에서 자란다. 줄기는 크고 곧게 서며 많은 가지를 낸다. 초가을에 향기가 나는 흰 꽃을 피우는데, 암수딴그루로 원줄기 끝의 원추꽃차례에 작은 꽃들이 겹겹으로 뭉쳐 달려서 눈이 수북이 쌓인 것처럼 보인다. 눈빛승마라는 이름도 눈처럼 새하얀 꽃이 피는 승마 종류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눈빛승마의 꽃말은 ‘산양의 수염’, ‘여인의 독설’이라고 한다. 온갖 초목이 진한 푸른빛에 잠겨 있을 때 유독 하얀빛으로 숲을 밝히는 눈빛승마 꽃이 깊은 산 속에 사는 산양의 수염 같기도 하고 한을 품은 여인이 내린다는 오뉴월 서릿발 같아 보이기도 했나 보다.
눈빛승마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리산, 계룡산, 속리산, 설악산 및 강원도 이북에 분포한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며 뿌리와 줄기는 해열, 해독, 종기 치료 등 한약재로 이용한다.
박대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