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전국음식의 각축장이다. 허나 서울이 원산지라 할 음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설렁탕, 곰탕, 해장국, 빈대떡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불고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불고기 하면 한일관이다.
한일관은 1939년,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어 6·25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영업을 이어갔을 정도로 생명력 강한 식당이다. 서울사람뿐 아니라 서울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은 한일관을 기억한다. 창업 당시 이름은 일본식의 ‘화선옥’이었다. 나중에 개명한 것은 “한국(韓)에서 일(一)등 가자”는 뜻이라고 한다. 고 신우경 할머니가 개업하여 지금은 압구정을 비롯하여 여러 지점을 거느리고 있는 외식업체가 됐다.
필자도 어렸을 적 한일관을 기억한다. 누구 졸업식, 입학식이거나 어른들 생신 같은 행사 때 갔었다. 지글거리는 노란색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가고, 달콤하고 진한 국물에 밥을 비벼먹던 기억이 선명하다.
원래 한일관이 지금과 같은 형식의 불고기를 판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신문에 한일관이 광고를 냈는데, ‘스키야키’를 판다고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너비아니와 비슷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너비아니는 넙데데하고 너붓너붓하게 쇠고기 등심을 썰어 구워 먹는 방식을 말한다. 궁중에서 먹었다고 하여 궁중불고기라고도 한다. 너비아니는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쇠고기 구이라고도 한다. 간장과 참기름, 마늘 등의 양념을 해서 벙거지 엎어놓은 것 같은 고기판에 구워먹었다. 이는 여러 문헌과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 같은 불고기판은 언제 등장한 것일까.
서울 출신으로 언론인이자 음식평론가였던 조풍연 선생은 ‘미군 드럼통 원조’론을 제기한다. 또 아동문학가이자 미식가였던 마해송 선생도 비슷한 생각을 글로 쓰고 있다. 즉 석쇠나 벙거지 불판을 주로 쓰다가 6·25 이후에 미군 드럼통이 시중에 돌면서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이 나왔다는 것이다. 못으로 구멍을 뚫으면, 고기가 흘러내리지 않고 그 구멍으로 불꽃이 직접 닿아 고기가 맛있게 그을렸다. 또 국물받이가 생겨나 거기에 밥을 비비는 등 효용이 극대화되었다.
최근 필자는 한일관에서 65년부터 일한 김동월 고문(72세)을 만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한동안 석쇠구이와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 구이가 병존되다가 나중에 석쇠구이는 없어졌다고 한다. 이는 육절기의 보급이 결정적이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식 육절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살짝 얼려서 얇게 저밀 수 있는 육절기 덕분에는 야들야들하고 얇은 불고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는 가게나 손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혁명이었다. 가게로서는 고기가 빨리 익고, 양념을 오래 해두지 않아도 맛이 들므로 유리했다. 손님으로서는 등심 대신 더 싼 부위로도 만들 수 있으므로 값이 싸져서 좋았다. 얇으니까 육질이 좀 떨어져도 불고기를 만들 수 있었다(물론 한일관은 지금도 오직 등심만을 불고기용으로 쓰고 있다).
한일관은 가게에서 쓰는 불고기판을 직접 제작해서 썼다. ‘함석 박 씨’라는 이름의 직원이 온갖 금속을 다 제작했고, 구이판도 만들었다. 오래된 가게이다보니 전설적인 주방장도 전한다. ‘코주부 김 씨’라는 주방장이 있었는데 음식을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음식을 배웠던 이력이 있어서 마요네즈 같은 것도 시중에 나오기 전에 직접 만들어서 ‘사라다’를 상에 올렸다고 한다. 당시 한일관은 한정식 매출이 많아서 반찬 가짓수가 꽤 다양했다고 전한다. 김동월 고문의 말이다.
“6인 한 상을 기준으로 값을 매겨서 받았어요. 지금과 같은 국물불고기는 없었고, 석쇠불고기가 나왔지요. 회나 여러 가지 반찬이 많이 상에 올라갔어요.”
당시 직원들은 가게에서 먹고 자는 경우가 많았다. 여직원만 해도 스무 명이 넘는 숫자가 가게에서 숙식했다. 휴일은 거의 없었고 나중에 월 1회, 월 2회 하는 식으로 늘어났다. 현재와 같은 ‘로테이션 휴무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정착되었다.
한일관은 신우경 할머니 작고 후에 딸 길순정 여사에게 이어졌다가 역시 작고하시고, 현재는 두 딸 김이숙, 김은숙 자매에게 대가 이어져 있다. 원래 종로에 자리잡았고(종각 제일은행 뒤편),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다. 도시계획으로 2008년까지 영업하고 압구정으로 본점을 옮겼다.
서울 사람들의 추억의 명소 한일관. 여전히 옛 맛을 지켜가며 성업 중인 것은 독특한 인사관리와도 관련이 있다. 주차관리요원도 정직원이 많고 장기근속한다. 60세가 넘은 직원이 유달리 많은데, 주방 고문인 곽정철 고문, 홀의 관리 담당인 김동월 고문(여)도 모두 칠십 넘겨서도 직원으로 일하고 있을 정도. ‘노포’의 공통점 중 하나가 바로 직원 장기근속이라는 점에서(청진옥, 우래옥 등) 한일관이 가지고 있는 ‘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번 주말은 한일관에서 추억의 불고기와 냉면을 먹고 싶다.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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