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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5] ‘그 사람을 가졌는가’ MB 캠프의 태동

2005년 2월 이명박 사단 첫 MT에서 함석헌의 시 읊으며 대권을 향한 진군

2016.10.06(Thu) 14:19:32

# ‘신화는 없다’로 오래전부터 대선 인프라 깔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 때부터 교회에 신앙 간증을 다녔다. 그의 신앙 간증은 사실상 그의 책 ‘신화는 없다’를 이야기로 푸는 것이었다. 이 책은 실제로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매우 잘 쓴 책이다. 스토리도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 이명박은 보통 모태 신앙에 대한 이야기로 간증을 시작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 중학생 풀빵장사, 이태원 환경미화원, 대학 입학과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투옥, 현대 입사, 고속성장의 주역 등등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청중들은 울었다 웃었다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 역시 10여 차례 동행하며 반복해서 들은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들을 때 마다 가슴 뭉클, 눈시울을 붉힐 정도다. 이런 내용이 조금씩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이명박을 초청했다. 처음에는 큰 교회에서 하다가 나중에는 여러 교회가 합동으로 체육관을 빌려서까지 초청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간증은 안철수가 했던 ‘청춘콘서트’ 이상으로 호응이 컸다. 이명박은 간증을 통해 안철수의 청춘콘서트보다도 훨씬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만큼 대선에 출마하기 오래전에 이미 전국에 대선 인프라를 깔아 놓은 셈이다. 간증을 하기 위해 제주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으니 말이다. 특히 전라도 쪽에 많이 갔다. 호남은 기독교세가 강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한나라당 취약 지구가 아닌가. 이명박은 간증을 내세워 오래전부터 호남 공략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은 간증을 통해 안철수의 청춘콘서트보다도 훨씬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선에 출마하기 오래전에 이미 전국에 대선 인프라를 깔아 놓은 셈이다.


나도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며 내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명박이 시장이 되면 우리 교회에 모시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이명박이 시장에 당선된 뒤 “제가 다니는 교회에도 오셔서 간증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명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가 거기까지 가야 돼?”하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 이미 오신다는 플래카드 다 붙여놨는데요”라고 했더니 이명박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낙을 했다. 

 

‘신화는 없다’가 의미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이명박은 스토리텔링이 있는 사람이다. 그 결정체요 완성품이 ‘신화는 없다’다. 스토리텔링은 정치인에게 긴요하고도 강력한 무기다. 스토리텔링이 없는 사람은 잘나가다가도 막판에 힘을 못 쓴다. 본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맹형규, 손학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물들은 괜찮은데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알맹이가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이상득은 이명박의 간증을 내심 못마땅해 했다. 이상득은 “얘기가 많이 과장됐어. 자기를 내세우려고 가족들을 바보 만들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주변에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간증에서 가족 얘기를 하다보면 상대적으로 자신이 폄하되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이상득은 평소에도 이명박보다 자신이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서울대 나오고, 정치도 대선배이니 그런 생각을 가질 만도 했다. 

 

 

# 이명박이 첫 MT에서 읊은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2005년 2월, 소위 ‘이명박 사단’의 첫 MT가 있었다. 장소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한 평범한 수련원이었다. 30명 가까운 인원이 버스 한 대를 타고 갔다. MT를 가기 전 나는 이명박이 큰 기업을 오랫동안 경영했으니 인적 네트워크가 막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처에 숨어 있는 ‘이명박 인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그것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주요 참석자는 이종찬, 김백준, 백용호, 이춘식, 정태근, 박영준, 강승규 등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재오는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인물들 외에 기대했던 새로운 거물 인사는 없었다. 도착 후 토론도 하고 등산도 했는데, 한편으로 실망하고 한편으로 놀랐다. 이 멤버로 대권까지 가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향후 이명박의 대권가도에서 그가 쌓아온 기존의 역량들에 적당히 얹혀 가려는 마음도 있었는데…. 나는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이명박 사단’ 가운데는 일명 영등공신과 일등공신이 있었다. 영등공신은 백용호였다. 내 지역구(서울 서대문을) 선임자였던 백용호는 제15대 총선 때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동아시아연구원으로 이명박을 찾아가 대권 도전을 권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마치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처음 왕권을 얘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등공신은 나와 이춘식, 정태근 등이었다. ‘이명박 패밀리’ MT의 구성원들은 훗날 ‘이명박 사단’의 핵심인 안국포럼 멤버로 이어졌다. ​

 

이날 첫 MT에서 이명박은 시를 읊었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였다. ​

 

첫 MT 멤버가 이후 ‘이명박 사단’의 핵심이 됐고 ‘안국포럼-대선 후보 경선-대선-대통령직인수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2007년 12월 26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현판식을 한 뒤 ​이경숙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과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기자단


그 사람을 가졌는가(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袋)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死刑場)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한마디로 이제부터 동지로서 대권을 향해 자신과 함께 가자는 의미였다. 그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를 읊는 이명박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대권을 향한 진군은 그렇게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 실무 역량을 중시한 이명박 캠프

 

이 첫 MT 멤버가 이후 ‘이명박 사단’의 핵심이 됐다. ‘안국포럼-대선 후보 경선-대선-대통령직인수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 이화여대 김원용 교수팀(강만수, 김용태 포함)이 2005년 후반에 합류하고, 여기에 조해진, 이태규, 박재성, 권택기, 송태영, 백성운 등 실무 그룹이 추가로 결합해 안국포럼이 발족한다. 

 

나는 이 정도로는 안 되고 사람들을 더 끌어들이고 보강하여  캠프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6년 중반에는 류우익, 곽승준을 중심으로 한 국제전략연구원(GSI) 그룹도 합류했다. 백용호는 바른정책연구원이라는 200여 명의 교수 그룹을 조직했는데,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뒤 김태효 등 이곳 출신 교수들이 정부 요직에 많이 진출했다. 이처럼 ‘이명박 사단’은 이들 네 줄기에 서울시 공무원 출신 그룹까지 더해져 대강 다섯 그룹으로 이루어졌다. 

 

이명박 캠프는 실무 역량을 중시했다. 안국포럼 멤버는 실무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 위주로 돌아갔다. 2006년 말까지 캠프에 가담한 현역의원은 내가 유일했다. 당시만 해도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낮은 데다가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당대표를 하던 시절이라 다들 박근혜의 눈치를 보았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 캠프에서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될 일을 국회의원들이 모여 오전 내내 회의를 하곤 했다. 반면 이명박 캠프에서는 실무 역량을 중시했고 의사 결정도 빨랐다. 이회창 후보의 대선 유세 당시 모습. 사진=비즈한국DB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는 국회의원들을 포진시키는 것은 겉으로 그럴 듯하게 세를 과시할 때나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장에서 실제로 일하는 것은 실무자들이다. 실무자들 위주로 일을 해야 진도가 착착 나가지, 흔히 교수나 국회의원들을 불러 일을 하면 겉만 번지르르 할 뿐 일의 진행이 잘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시 이명박 캠프의 의사 결정은 빨랐고 실무자들은 힘들어도 보람을 갖고 일했다. 

 

광역단체장 선거나 대선 같은 큰 선거를 치를 때 캠프에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전략 회의를 한다면 그 선거는 날 샌 선거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 후보의 사무실에 방문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회창의 측근이었던 7인방이 여의도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오전에 시작한 회의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끝났다. 

 

무슨 중요한 회의를 했는가 싶어서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곧 발간 예정인 이회창의 책 제목을 정하는 회의를 연다고 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 회의만 했을 뿐 제목도 정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런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될 것을 오전 내내 회의를 하다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운영되는 캠프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이명박 패밀리’는 서서히 조직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대권 준비에 들어갔다. 말이 필요 없었다. 누구도 ‘대권’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다들 대권을 향해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교통개혁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이루어진 첫 MT는 대권을 향한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정치를 잘 모르던 이명박은 노련한 정치인인 형 이상득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다. 2008년 1월 21일 이상득 국회 부의장이 특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이명박 당선인에게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대표의 친서를 전달하는 모습.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명박을 만나 돌아가는 현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명박을 대변해 국회에서 앞장서 싸우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이명박은 열려 있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 전까지 이명박 캠프는 위아래와 옆으로 소통이 원활하고 유연하며 기동성이 뛰어난 구조와 분위기 속에서 일했다. 

 

한편 이명박이 시장으로 있을 때부터 이명박 주변에서 사실상 제일 힘센  실력자는 이상득이었다. 나나 정태근도 이명박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이상득에게 달려가곤 했다. 이명박에게는 이상득이 유일하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명박은 정치를 잘 모르니 노련한 정치인인 이상득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다. 두 사람은 수시로 통화했으며, 이상득은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종 일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비즈한국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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