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 후 고향에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가장 놀란 점은 대한민국에 장애인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영화관은 장애인에게 가격을 절반 정도 할인해주는 ‘장애인 우대할인’을 제공한다. 이 우대할인 표를 나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장애인들에게 발권해주곤 했다.
대학 입학 후 사람이 넘쳐나는 서울에서 생활하던 내가 그렇게 많은 장애인을 만나게 된 건 처음이었다. ‘작은 소도시에도 이렇게 많은 장애인들이 있었다니’라는 생각에 이어 ‘대체 이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250만 명의 장애인이 등록되어 있다. 200만 명가량인 외국인보다 더 많은 수다. 하지만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그들을 만날 일은 많지 않다. 특히 직장 동료로서 장애인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은 공공기관의 장애인 의무고용 비율을 3%, 300인 이상 민간기업은 2.7%로 규정했다. 하지만 30대 그룹 중 이를 준수하는 기업은 여섯 곳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사회적 약자 배려에 가장 앞장서야 할 공공기관의 평균고용률조차 2.8%로 법률이 규정한 비율에 미달하고 있다.
누군가는 ‘현실적으로 장애인이 어떻게 일반 직장에서 일할 수 있나?’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애인 중에는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한 3, 5, 6급 장애인이 총 15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겉으로 봐서는 장애가 있는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또 통계에 따르면 동종업계에서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는 기업 간에도 의무고용비율이 현격히 차이 난다. 이는 업무 특성보다 해당 기업의 의지에 따라 고용률이 달라진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시사한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에는 ‘법률’이라는 강제적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가 탄생하고 낙인찍히는 프로세스를 보면, 우선 편견이 있고, 그 편견이 편향적인 결과를 낳고, 그 편향이 다시 편견을 강화시켜 마침내 편견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설이 되는 되먹임현상을 통해 완성된다.
프로세스의 첫 단계인 편견이 탄생하는 토양은 사회에서 소수자들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소수자들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이야말로 편견을 막는 첫 단계다. 장애인 의무고용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시작이다. 인구의 5%를 차지하는 그들이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대부분의 경우 ‘비효율’을 수반한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시대에 그들에게 일자리를 배려하는 것도 ‘최적위치에 최적자원을 배치’하는 효율성이라는 명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만을 위한 비싼 인프라를 설치하거나, 일자리를 할당하는 일은 모두 경제적 비용을 수반한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처음에는 바쁘고 힘들 때 장애인 고객이 오면 짜증나고 불편했다. 하지만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그만큼의 배려와 그런 배려를 해내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이 아닐까?
마치 우리가 더 나은 도시를 위해 알짜배기 땅에 빌딩을 짓지 않고 수입이 0인 공원을 만들기로 하듯이, 소수자 배려를 위해 사회가 지불하는 비용은 더욱 문명화된 선진 사회를 위한 유지비용이다.
‘소수’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많은 소수자들이 대한민국에 존재한다. 더 나은 사회는 신체와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만 사는 사회가 아니다. 인구의 5%를 차지하는 그들이 언제 어디서나 그만큼의 비율로 우리와 함께하고,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는 사회가 올바르고 완전한 사회다.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야말로 장애를 가진 사회가 아닌가.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남궁민 ‘예술을 빌려드립니다’ Paleto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