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은 구체적 형상을 빼버린다는 말이다. 구체적 형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실감나게 재현하거나, 신화 또는 역사적 사실 등을 설명하기 위해 그린 모습이나 정경 등을 말한다. 우리가 ‘회화’라고 했을 때 쉽게 떠오르는, 형태가 분명한 그림 혹은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림을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추상은 형상이나 이야기가 없는 그림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용이 없는 추상화는 감상을 위한 미술이 아니다. 그러면 추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화면 구성이나 제작 방법 같은 것을 찾아내면 된다. 즉 점, 선, 면 그리고 색채 배열에서의 조화로움이나 어떤 재료와 기법으로 제작했는지를 염두에 두고, 이것이 새롭게 처음 시도한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다. 이를 미술 용어로는 ‘조형’이라고 부른다.
결(2009), 140x140cm, 한지에 먹과 채색.
조형의 근본을 추적해 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만나는 추상 미술이 ‘절대주의’다. 이 계열을 대표하는 화가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캔버스를 ‘흰색 위의 흰색’이란 제목으로 발표하여 순수 추상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추상은 더 나아갈 길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추상 미술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한 방식 중 하나로 굳건하게 살아남았고, 금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추상 미술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1930년대 말부터 추상 미술은 생존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유럽에서는 정해진 형태가 없는 그림이라는 뜻으로 ‘앵포르멜’이라 불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액션페인팅’으로 나타났다. 추상 미술이 찾아낸 새로운 생존 방법은 추상적인 방식에 이야기를 집어넣어 표현하는 것이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추상표현주의’로 불렸고 국제적인 미술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추상 미술 언어를 개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홍순주의 추상 회화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의 작업은 추상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제작 방식 자체에서도 추상성을 보여준다. 의도를 갖지 않고 마음을 비운 상태로 붓질을 한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버린 그림인 셈이다. 무념무상에서 나오는 행위의 흔적이 빚어낸 작업으로 그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홍순주는 ‘결’이라는 주제를 꾸준히 다루고 있다. 결은 물질이 일정한 규칙으로 짜인 상태를 말하는데 그의 작업에서는 천의 직조 구조로 나타난다. 마치 모시 같은 옷감이 여러 겹 겹쳐서 우러나는 은은한 공간의 느낌이다. 먹색을 바탕으로 무수한 붓질의 흔적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화면의 깊이에서 정신성이 강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 정서를 다듬어온 선비 정신 같은 고결하고도 담박한 느낌이다.
한국적 미감은 정서나 정신성에서 나온다. 정서나 정신의 문제를 추상 언어로 접근하는 홍순주의 작업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전준엽 화가·비즈한국 아트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