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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현자타임] 일련의 보도통제에 대한 단상

2016.09.23(Fri) 09:45:58

얼마 전 충격적인 기사가 하나 있었다. 요지는 이러하다. 2014년 5월,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당시 KBS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특정 기사를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 김 국장은 당시 통화내용을 녹음했고, 통화내용은 며칠 전 <경향신문>에 공개됐다.

 

대화내용은 코미디다. 이 시기에―세월호 시기다―해경을 때리는 게 말이 되냐, 하필 오늘 대통령이 봤으니 내일 아침 보도는 막아달라, 한 번만 살려달라 등등. 청와대 홍보수석이라는 사람이 보도국장에게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왜냐고? ‘대통령’이 보고 노했으니까.

 

이 내용이 퍼진 계기도 코미디다. ‘내부고발’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김시곤 보도국장은 ‘쓰레기’다. 김 국장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교통사고 사망자와 세월호 사망자의 숫자를 비교했다. 4대강에 관한 비판적 보도를 막고, 용산 ‘참사’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등 언론의 품격은커녕 인간의 품격도 보여주지 못했다.

 

   
▲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과거 청와대 홍보수석일 당시 KBS에 세월호 관련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음이 드러났다. 이 대표가 청와대에서 기자 브리핑을 하던 모습. 사진=청와대 제공

 

청와대라는 거대 권력이 저거는 보도하고, 이거는 보도하지 말라고 말하는 작태는―작태다. 작태의 뜻은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고, 정치적이다―자기네가 원하는 현장만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원치 않는 현장은 시민들에게 소외시키고 사회에서 제거한다.

 

대개 그들이 원하는 현장은 대통령이 행사장에 나타나 새마을운동을 언급하거나, 창조경제라는 허울뿐인 단어를 지껄이는 곳이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수행원 그리고 그들에게 선택받은 몇몇의 시민들은 웃고 있다. 프라임 타임에 TV나 인터넷을 통해 보는 우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그들이 원치 않는 현장은 행정부의 나태와 태만이 드러나는 곳이다. 복지 예산이 100조지만 여전히 저소득층이 죽어나는 현장, 해경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300명이 수장된 현장, 청와대의 치적이라 불려야 하는 순방이 ‘성추문’이라는 민낯을 보이는 장소 말이다.

 

이런 기사가 나올 때마다 권력을 가진 의사결정권자는 울상이다. 왕이 저 기사를 보면 얼마나 분노할지, 얼마나 욕먹을지를 고민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저 기사를 보는 우리의 표정은 일견 밝아 보인다. 하지만 그 밝음은 ‘역시나 니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식의 썩은 미소다. 저 현장을 보도하지 않는 공영방송에 보내는 조소이기도 하다.

 

권력은 왜 존재하는가. 사회를 향해, 사회를 위해,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개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미약하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를 믿는다. ‘서로’는 국방과 치안을 위임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는 정부요, 그 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이다. 위에 언급한 의사결정권자는 매우 강해보이지만, 끽해야 우리가 위임한 무엇밖에 안 된다. 행사장에서 90도로 인사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대통령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며, 권력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권력이라는 추상적인 한자어도, 까고 보면 이기적 개인들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이기적일 때의 부작용은 미약하다. 끽해야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정도다.

 

하지만 권력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면, 위험하다. 그 폐해의 규모는 가늠하기 어려우며, 고치기도 어렵다. 그래서 언론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권력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하고 권력의 이기를 억제하기 위해. 일종의 ‘사전규제’다. 행정부라는 거대 권력을 배라고 치면, 언론은 그 배의 키가 우리 사회를 향하는지 지켜본다.

 

보도를 통제하려 한 청와대의 모양새는 초라하다. 매년 시즌마다 돌아오는 감사를 피하는 피규제기관인 셈이다. 아니다, 감사기관을 규제하는, 어떤 분야를 감사받을지 정하고 어떤 분야를 피할지 정하는 오만한 기관이다. 어느 곳보다 공공을 위해야 하는 기관이, 공공을 위해선 어떤 회초리도 기꺼이 맞아야 하는 기관이, 스스로 공적기관임을 포기했다. 임기가 끽해야 2년도 남지 않은 정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했다. 권한을 위임받은 주제에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자기네들의 실수는 가리고, 공적만을 치장하려는 행정부는 정당하지 않다. 촌스럽고, 구태의연하고, 역겹다. 그렇게 시장을 살리자는 행정부가, 자기네에 비하면 끽해야 사고파는 권한밖에 없는 기업도 지키는 규칙을 깼다.

 

사전규제를 받아야 하는 시장에, 사전규제를 부정하는 사업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사전규제를 피한다는 문장 하나는, 기업 자체를 시장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다. 스스로가 존재하기 위해 받는 최소한의 견제마저 부정하는 행정부는 사회를 향하기는커녕 권력자들만을 향하며 존재해선 안 됨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구현모 필리즘 기획자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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