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는 있었다. 금지 약물 투약으로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박태환 선수가 기자회견장에서 올림픽 출전 기회를 달라고 무릎을 꿇었을 때, 여론은 싸늘했다. 원칙의 문제인데 이게 무릎 꿇는다고 될 일인가, 하는 불편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는 말에는 야유마저 일었다.
그 싸늘함은 비단 박태환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어제 열린 리우 패럴림픽 개막식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아, 얼마 전에 올림픽 했었지. 예전 같았으면 올림픽 후유증 같은 것이 아직 남아 있을 법도 했다. 브라질과의 시차로 경기가 주로 새벽시간에 있었으니 우리 선수들 경기 보느라 밤낮이 바뀌었다든지, 올림픽이 끝나니 일상이 너무 무료해 견딜 수가 없다든지 하는 후유증. 그런데 나는 불과 보름 전에 올림픽이 열렸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다른 국가들의 메달 개수까지 달달 외울 지경으로 나는 이 세계인의 축제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리만치 시큰둥했던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참 신기한 일인 게, 주변 사람들도 전부 그랬다. 여론도 비슷하게 흘러 ‘목표했던 10-10 실패’라든지 ‘아쉬운 은메달’이라든지 하는 기사가 나오면 악플이 쏟아졌다. 왜 그리 승부에 집착하느냐, 운동 경기에 목숨 걸 일 있느냐, 올림픽이 뭐 대수냐는 반응들.
군중이 일제히 싸늘해진 이유는 뭘까. 혹자는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만큼 국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선진국일수록 국제경기 결과에 무심하다고들 하지 않나. 심지어 어느 나라에는 전업 운동선수가 아닌 국가대표가 있을 정도라고 하니, 목이라도 맬 기세로 국제경기에 집착했던 그간의 호들갑이 오히려 지나쳤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울먹울먹하는 선수, 이제 우리는 그런 걸 보고 따라 울지 않는다. “쟤 왜 저래?” “드라마 찍니?” “금메달 따면 네가 좋지 우리가 좋아?” 일제히 찾아온 이 ‘무심함’이 나는 참 반갑다. 우리는 드디어 개인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국뽕’의 마취는 이제 막 풀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들린다. 추석을 앞두고 “제사상에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것들 전부 근거 없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론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홍동백서고 뭐고 대체 제사를 왜 지내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반응들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도 꽤 흔한 풍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명절을 대하는 자세는, 올림픽에 대한 무심함처럼 일제히 바뀌긴 어려울 것 같다.
미친 천재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을 한 번 떠올려 보자. 허생은 변 씨에게 만 냥을 꾸어 나라의 과일을 모조리 사들인다. 얼마 안 가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어 허생은 큰돈을 벌어들인다. 이 매점매석이 가능했던 건 과일값이 몇 배로 뛰든 무조건 과일을 사야만 하는 양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몇 가지 측면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의 제재와 주제의식은 ‘헬조선’ 세 글자로 능히 대체가 가능하다. 작가 박지원은 작품에서 허생의 입을 빌려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며 “전부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이냐”고 꾸짖는다. 가히 이 땅의 모든 며느리들에게 찬탄을 받을 사이다 발언이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제사상을 차리는 건 양반의 뿌리를 가진 집안인 양 과시하려는 문화로 인해 생긴 것이라지. 허생은 이미 300년 전부터 조선 양반들의 허례허식을 꿰뚫고 꾸짖는 수준이었는데, 뿌리라도 양반이고 싶은 과시욕이라니, 원.
지나친 제사문화와 되도 않는 예법 타령이 사라지는 건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제사상 차리는 데 ‘법도’ 안 지키면 조상님 뵐 낯이 없다고 믿는 어르신들께서 아직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계시는 까닭이다. 그 어르신들께 <허생전> 일독을 권하여 드리고 싶지만, 물론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허생은 묵적골에 살았다. 허생에게 격한 꾸짖음을 들은 당시의 어영대장 이완이 도망쳤다가 이튿날 다시 찾아가보니, 집은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허생 같은 이가 살 수 있는 조선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가위 명절을 앞둔 2016년의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허생이 살던 때로부터 3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는 종적을 감춘 그 남자를 맞을 준비가 아직도 덜 되었다. 그래도 법도 따지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니 썩 반갑다. 허 선생 보시기에도 여간 좋은 광경이 아닐 게 분명하다.
‘2030현자타임’에서는 대학, 기업체, NGO, 스타트업 등 다양한 분야에 있는 2030 청년들의 생생하고 솔직한 목소리를 전해드립니다.
정소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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