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노포가 많은 도시이다. 도시 역사가 오래되었고, 옛 도심이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6·25 이후 임시정부로 피난민이 몰려 전국적인 문화와 인구의 용광로 역할을 했고, 항구도시로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도 그렇다.
부산의 음식문화는 몇 가지 특이한 구석이 있다. 우선 돼지고기 문화다. 이북 피난민의 순대와 국밥 문화가 이식되었다고 한다. 부산의 돼지국밥이 대표적이다. 이북 피난민에 의해 냉면이 전해졌고, 이는 부산식의 밀면으로 변종문화가 되었다. 초량에 중국인 거리가 있어서 그쪽으로도 음식문화가 발전했고, 순수한 부산식 해산물 문화도 살아남았다.
가난한 도시의 문화는 부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그 시절, 한 잔의 술은 위로가 되었다. 1959년 생긴 마라톤집은 바로 생생한 증거다. 이름도 특이하다. 나는 우연히 이 집을 알게 되었다. 출장 등으로 자주 부산을 다녔는데, 서면에서 특이한 정서의 이 집을 발견한 것이다. 가게 상호도, 메뉴도 특이했다. 메뉴에 마라톤이니, 재건(再建)이라는 60년대 정서의 이름이 들어간 메뉴도 특별했다.
창업주 김원희 씨와 아들이 함께 찍은 마라톤집의 옛 사진(왼쪽)과 현재의 마라톤집. |
이 식당은 민병현, 김원희 부부에 의해 생겨났다.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회사를 다녔던 민 씨였지만, 생면부지의 부산으로 피난 와서 먹고살 방도가 없었다.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된 구 부산상고 옆 담벼락에서 포장마차 장사를 시작했다. 옛 일본식 메뉴였다. 청주와 막소주, 막걸리에 어묵탕을 비롯한 안주를 팔았다. 자갈치시장에서 떼어온 싱싱한 해물을 넣고 부침개를 팔았는데, 이게 소문이 나버렸다.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쇼트닝(돼지나 소기름)에 지져낸 해물파전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줄을 서서 먹었다고 한다. 지방과 단백질 부족 시대에 그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을 끌었던 것이다. 그 무렵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리 선수가 메달을 따면서 사회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부침개에 그 이름이 붙었다. 달리듯 얼른얼른 앞사람을 재촉하며 먹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작명은 누가 했는지 모르고, 당시 단골의 공동창작이라고 해야겠다. 나중에 정식으로 가게가 될 때 상호도 마라톤집이 되었다. 부산 시내에서 이 가게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해산물로 볶은 요리는 ‘재건’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새로운 사회 만들기 구호가 바로 재건이었던 것이다.
이 가게는 오래된 술집이지만 젊은이들에게도 아직 인기가 있다. 값이 싸고, 늦게까지 영업하는 선술집 분위기가 나기 때문이다. 노인 손님도 여전한데, 주로 초저녁에 1층의 어묵 바 자리를 차지한다. 옛 정취가 난다고 한다. 어묵 맛이 일품이다. 조금 늦게 가면 자리가 없다. 현재 며느리 조광희 씨(57)가 부엌을 맡고 있다. 창업자인 할아버지 민 씨는 별세했고, 할머니 김원희 씨는 은퇴했지만, 간혹 나와서 단골들을 만나기도 한다.
마라톤집의 명물, 전통의 어묵탕. 어묵 맛이 일품이다. |
이 술집에는 재미있는 메뉴가 있다. 넥타이라고 하는 것이다. 청주는 됫병들이를 사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콜라병에 덜어 데워냈었는데, 이때 생겨난 유별난 주문법이 바로 넥타이다.
“백화수복과 금관청주가 있는데, 백화수복이 더 비싸거든요. 문제는 콜라병이 다 똑같잖아요. 구별하기 위해 수복을 담은 콜라병에는 빨간색 철사를 걸어두었어요. 그게 넥타이 닮았다고 사람들이 또 ‘넥타이 한 병!’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어요.”
며느리 조 씨의 설명이다.
서면은 대표적인 젊은이의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마라톤집은 아직 혈기왕성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젊은 손님도 좋아하는 집이다. 우선 맛있고 값이 싸기 때문이다. ‘찌짐’이라고 부르는 마라톤 해물파전과 재건이 모두 만 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조 씨가 새롭게 만든 메뉴도 인기가 있다. 빈대떡 같은 것들이다.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안주로 젊은이에게 아직은 마라톤집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혹시 부산에 가게 되면, 느지막한 시간에 들러보시라. 드물게 보는, 우리 혼돈의 역사가 만들어낸 부산 피난민 스타일의 술집이 흥성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건 어쩌면 현대사의 학습장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전쟁, 굶주림, 그 와중에도 술꾼들이 있었고 우리는 마셔왔던 것이니까.
박찬일 셰프
서울에서 났다. 1999년부터 요리사로 살면서 글도 쓰고 있다. 경향에 <박찬일셰프의 맛있는 미학>, 한겨레에 <박찬일의 국수주의자>(문자 그대로 국수에 대한 연속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단행본으로 한국의 오래된 식당을 최초로 심층 인터뷰하고 취재한 <백년식당>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