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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느리고 오래된 것이 주는 즐거움, 경북 봉화

2016.08.24(Wed) 13:03:55

오랜 시간 닿기 쉽지 않은, 좀 심하게는 오지라는 수식이 붙었던 곳. 물론 여전히 이곳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면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며 숱한 산물이 거쳐 가고, 맑은 자연 속에서 전통이 깊이를 더했던 시절이 여전한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울창한 산과 맑은 물이 늦여름의 위압감을 시원히 날려주는 경북 봉화이다. 

 

봉화 여행의 시작, 들락날락 봉화장 

봉화의 물은 맑고 산은 깊다. 봉화의 산에서 솟은 물은 흘러서 불영계곡을 만들고 울진에 이르러 바다까지 끈기 있게 흐르고, 그 물길을 따라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로 알려진 춘양목이 난다. 송이의 으뜸을 가린다면 봉화를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이 깨끗하기 그지없는 물과 산 덕분이다. 그 대신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봉화는 내륙의 ‘오지’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정치가 싫어 한양을 떠나온 학자, 선비들이 찾아들기에 산 속 조용히 자리한 이곳 봉화만 한 곳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오지역의 대명사로 불리는 승부역에 이르러 기차도 긴 숨을 고르고 강원도로 향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봉화만 한 교통의 요지도 없었다. 경북 내륙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부 내륙으로 이어지는 길도 이곳을 거치는 게 빨랐다. 그래서 오지라는 세상의 선입견과 달리 봉화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영월과 삼척 등에서는 물론 가까운 안동과 영주, 울진 등에서도 이곳으로 모여 장을 봤다.

이렇듯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봉화장(내성장으로도 불렸다)은 전통시장 현대화 프로젝트에 따라 아예 ‘들락날락 봉화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상설시장이 되면서도 원래 매달 끝자리가 2, 7로 끝나는 날에 서던 오일장의 전통을 잊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게다가 봉화를 거쳐 가는 관광 열차의 인기에 힘입어 인근 주민뿐만 아니라 먼 타지에서도 궁금해 찾아오는 그야말로 ‘전국구 들락날락’ 시장이 되었다. 봉화군 소재지인 봉화읍, 그것도 봉화버스터미널 바로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어 굳이 먼 길 운전하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편히 들러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봉화장의 풍경. 나물, 버섯부터 문어, 한우까지. 상인들과 마실 나온 어르신들 모두 즐겁다.

들락날락 봉화장의 오일장날 풍경은 크게 둘로 나뉜다. 산뜻하게 지붕을 올리고 현대화 작업을 마친 상가형 상설시장들이 매일 변함없이 전하는 장터의 생기, 그리고 여기에 더해 장날을 맞아 직접 걷은 나물이며 채소, 군것질거리와 옷가지, 생필품 등을 시원스레 펼쳐놓는 장꾼들의 난전이 그것이다. 시장 입구에는 ‘들락날락 봉화장’ 입간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번듯한 무대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상인과 관광객, 주민 등을 대상으로 정기 혹은 비정기 공연이나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열어 오고 있단다. 공연이 없을 때면 이 무대는 장구경을 나오신 어르신들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잠시 앉아 구경을 하는 곳으로도, 간단한 먹을거리 펼쳐놓고 막걸리 몇 잔 나누는 즉석 테이블로도 변신하기도 해 시골 장터의 정감을 한 몫 거든다. 

그러다 오일장의 차양이 더해지면 이때를 기다린 장꾼들과 장구경을 나선 사람들이 가세해 장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된다. 보통 오일장의 난전은 봉화우체국과 농협을 시작으로 주도로 좌우, 상설시장 내 곳곳에 펼쳐지게 되는데, 푸짐한 족발과 옛날식 도넛, 찐빵 등 간식류에서 화장품, 비누, 간단한 공구 등 갖은 생필품, 봄기운을 전하는 울긋불긋한 화초들, 여러 채소와 과일 등이 부려진다. 상설 어물전이 있긴 하지만, 오일장날만큼은 동해안에서 들여온 갖은 해산물이 풍성함을 더한다. 인도가 비좁다 싶으리만치 옷걸이를 가득 채운 점퍼며 모자, 등산용 바지들이 눈길을 끌고, 밭일에 편하게 입으면 좋을 꽃무늬 바지 등 역시 시골 장터가 아니면 구하기도 힘든 물건들이 어디 숨어 있다 이렇게 다 쏟아져 나왔나 싶을 정도이다.  

5일장터와 상설시장을 찬찬히 돌다 보면 봉화가 지닌 특유의 색깔도 진하게 스며나오는 것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우선 봉화가 자랑하는 한우가 상당히 비중 있게 한 자리를 차지해 그 존재감을 확인하게 한다. 여기에 상설 점포, 난장 가릴 것 없이 튼실해 보이는 버섯류들이 그 뒤를 잇는다. 모두 봉화의 청정한 산과 물에서 난 대표 특산물들이다. 또한 어물전을 지나다 보면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상에는 문어를 꼭 올려야 하는 경북의 전통을 말해 주듯 큼직한 문어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가까운 울진과 영덕을 포함, 강원도의 여러 항구에서 들여 온 귀하디귀한 문어는 장날 최고의 인기 아이템으로 대접 받는다. 맑은 산 속에서 주민들이 직접 캔 나물들도 여기저기 부려진다. 

그중 한 좌판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다 사진 찍기를 청하자 주인아주머니가 “사람도 나옵니껴?” 하고 되물으신다. 그렇지는 않겠다고 웃으며 답하자 마음대로 다 찍어 가라신다. 장이 넉넉하니 사람들의 인심도 닮아 간다. 전국의 많은 시골 장들이 현대화를 거치는 동안 되레 예전의 푸근함을 기대하기 힘든 경우가 적지 않은데, 적어도 이곳 봉화에서만큼은 예외인 듯 해 반갑고 다행스럽다. 

 

멋스러운 은둔의 시간을 들여다본 여행

봉화장을 벗어나 봉화읍내에서 머지않은 곳, 마을 어귀에 오랜 정자와 연못이 말 그대로 그림처럼 어우러진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은 봉화군 봉화읍 거촌2리 황전마을이었다. 36번 국도에서 벗어나자마자 푸근한 논과 마을의 정경이 먼저 반기는 가운데 과연 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우아하면서도 소담스러운 정자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황파 김종걸(金宗傑)이 효종 1년(1650년)에 건립한 도암정(陶巖亭)이다. 

   
손꼽히는 명당마을인 닭실마을의 고즈넉한 정경.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이 정자는 긴 세월을 말해주는 듯 묵은 나무의 색과 향을 은은히 피워내고 있다. 뒷면에 토담을 쌓아 뒤를 든든히 했는데, 무엇보다 정자 앞의 연못과 어우러짐이 기가 막힐 정도다. 정자 마루에 오르면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어진, 주역의 이론에 따라 직사각형으로 조성된 연못과 너른 마을의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연못 가운데는 작은 섬도 만들고 그 자리에 훌쩍 키가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지극히 인공적인 조경이긴 하나 그 정도가 억지스럽지 않고 또 주변이 탁 트여, 실제 정자와 연못의 규모는 작되 결코 왜소해 보이지도 않는다. 도암정 뒤로 황전마을이 시작되는데, 인적도 드물고 주위도 조용해 산 중턱의 여느 정자와 다를 바 없는 운치를 품었다.

더욱이 정자 바로 옆으로 수령 280년의 느티나무 보호수가 우람한 둥치와 무성한 가지, 잎을 드리우고, 이 나무 뒤를 ‘천년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석군이 받쳐 주고 있어 그 전경이 기묘하기까지 하다. 여기에 7월이 지나면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어오른다 하니 그때를 맞춰 들러도 좋을 것이다. 푸른 잎 무성한 보호수와 500년 된 정자의 자태, 아담한 정자와 천년바위 등 어디서도 쉬 찾아보기 힘든 조합이 그제야 완성될 터이기 때문이다. 

황전마을은 봉화군이 지정한 효 시범마을이기도 하다. 이만한 풍광과 아늑한 마을 분위기인데, 사람의 성정이 나쁠 것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효를 모범으로 삼는 마을이라는 사연에 쉽게 수긍하고 남을 정도이다. 

봉화에서 마을 전체가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당 마을로 유명한 닭실마을을 빼놓고 여행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을을 들어서기 전 먼 진입로에 잠시 서서 그저 평범한 이의 눈으로 내려다 봐도 과연 명당이다 싶다. 험하지 않은 산이 폭 하니 마을을 감싸 안고 그 마을은 앞으로 너른 들을, 실개천을, 그리고 그 너머 역시 험하지 않은 산자락을 두고 있다. 산도 마을을 가리지 않고 마을도 산을 헤치지 않는다.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금계포란형)의 이 마을을 두고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그의 책 <택리지>에서 조선의 4대 길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마을 이름도 그 금닭을 따 ‘유곡리’ 혹은 ‘닭실마을’로 불린다. 

원래 안동 권씨 집성촌인 이곳은 마을의 가옥들이 횡으로 기다랗게 조성된 것이 특징인데, 한결같이 옛 모습 그대로 와가(瓦家)의 외관을 띠고 있으며, 비교적 요즘에 지어진 곳들도 옛 양식과 분위기를 헤치지 않는다. 옛 한옥마을이라 하면서 그 속은 마치 테마파크처럼 보여주기에만 급했던 여러 곳들과 달리 이곳에서는 여전히 안동 권씨의 후손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는, 그야말로 ‘현재진행형의 과거’를 만나는 마을이다. 야트막한 흙담을 따라 걷는 마을길에서는 함께 여행을 떠났던 아이가 모르는 어르신을 만나도 절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하게 하는 묵직한 품위까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곳 닭실마을을 상징하는 인물은 충재 권벌(1478∼1548)이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모두 겪었고, 낙향과 복직을 거듭하는 등 질곡의 삶을 살았으나 적어도 이곳 닭실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던 듯하다. 이를 짐작케 하는 곳이 그가 즐겨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곤 했다는 청암정(靑巖亭)이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청암정(왼쪽)과 우아하면서도 소담스러운 도암정.

충재 종택 서쪽에 자리한 이 정자를 마주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벌리고 만다. 집 안에 어찌 이런 광경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한 것이다. 커다랗고 널찍한 거북바위 주위로 실개천이 유유히 흐르는 듯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바위 위로 6칸 트임 마루와 작은 문간방을 둔 비교적 규모 있는 정자가 올라 있다. 연못 주위에는 수령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수목이 어우러져 마치 숲 속 바위에 올라앉은 정자와 마주하는 기분이다. 이 광경이 놀랍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해 사람들은 한참을 둘러보고 올라보고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눈이 내리면 그 설경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기에 다가오는 계절을 또 한 번 기다려보게 한다. 

닭실마을은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한과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권씨 일가와 며느리 등이 한데 모여 한과를 만드는데, 그 유명세는 전국에 걸쳐 있을 정도이다. 봉화군이 자랑하는 특산물 가운데 한과가 빠지지 않는 것도 이 고풍스럽고 우아한 마을의 옛 솜씨 덕분이다. 

 

여행 정보 

-봉화 일반 관광 문의: http://culture.bonghwa.go.kr
-들락날락 봉화장 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신시장1길 12
*중부내륙순환열차(일명 ‘O-train’)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봉화를 찾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는데, 이 가차가 정차하는 봉화역은 들락날락 봉화장과는 거짓말 조금 보태 돌 던지면 닿을 정도여서 장날에 맞춰 여행을 온다면 하루 동안 장터 곳곳을 실컷 둘러 보고 편히 되돌아 갈 수 있다. 우리나라 중부내륙의 절경도 맛보고, 그 내륙의 대명사라 해도 좋을 봉화에 들러 이곳 사람들의 생기 있는 하루와 풍성한 이 지역의 산물을 경험해 보기 좋을 듯하다. 

-도암정 주소: 봉화군 봉화읍 거촌2리 황전마을 
-닭실마을 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비즈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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