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도 지나고 처서를 앞두고 있지만, 무더위는 그대로다. 가을은 기다리기만 한다고 그냥 오지 않는다. 가을을 불러보자. 그래서 가을이 떠오를 트렌치코트 얘길 하고자 한다.
멋쟁이는 계절을 앞서간다. 늦여름에 가을 옷 입고 땀 흘리자는 게 아니다. 가을이 오기 전 가을 옷을 먼저 준비해두잔 얘기다. 이번 가을 어떤 스타일로 자신을 표현할지 고민해두자는 얘기다. 남자가 가을에 옷장 속에서 꺼내는 옷 중 하나가 트렌치코트다. 가을에 트렌치코트 깃 높게 세우고, 코트 자락 휘날리며 낙엽 가득한 길을 걷는 남자의 이미지가 가을의 이미지 중 하나이다.
<카사블랑카>에서 트렌치코트가 멋졌던 험프리 보가트. |
영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가 입은 트렌치코트는 전 세계 남자들에게 가장 각인된 트렌치코트의 이미지이자 가을남자의 이미지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입은 트렌치코트 이미지도 만만치않게 강렬하다. 수많은 남자들이 트렌치코트를 입을 때마다 가을남자가 된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험프리 보가트나 주윤발을 여전히 떠올리곤 한다. 유치해도 어쩌랴. 그게 남자인 것을.
국내 항공사 스튜어디스들이 유독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애용해서 그게 마치 항공사에서 단체로 맞춘 옷인 양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남자는 세련된 슈트를 입고, 여자는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베이지색 버버리의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참 멋스럽다. 남녀 모두가 입지만 원래 트렌치코트는 남자의 옷이다.
트렌치는 참호를 뜻한다.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전쟁의 산물이다. 1차대전때 영국의 토머스 버버리가 군용 레인코트로 트렌치코트를 만들었는데, 1차 대전의 히트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국 군인들에게 확산되었다. 그때부터 트렌치코트가 곧 버버리 코트로 불렸다.
비가 참 자주 내리는 영국에선 특히 비올 때도 입고 비 안 올 때도 입는 레인코트도 되는 트렌치코트의 쓰임새가 좋다. 이것이 일반으로 퍼지면서 남성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우리나라 군대 장교들의 우의도 사병들의 판초우의와 달리 트렌치코트 스타일의 레인코트다. 물론 그리 멋스럽진 않다.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우리가 늘 새겨야 할 말이다. 멋지게 차려입은 옷만큼, 세련된 매너가 필수적이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을 남자를 만끽하는 건 좋지만, 괜히 가을 탄다며 주변 사람 피곤하게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아무리 제멋에 산다지만 패션테러리스트처럼 막 걸치고 다녀서도 곤란하다. 트렌치코트 하나 입는다고 끝이 아니다. 코트 안에 입을 셔츠도 중요하고, 코트 아래로 보이는 바지도 구두도 양말도 중요하다.
모든 옷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트렌치코트는 체형에 잘 맞아야만 멋스럽다. 모든 남자에게 다 잘 어울리는 옷이 결코 아니다. 적당히 나온 배는 코트 속으로 잘 숨기고 벨트를 질끈 묶으면 사라지지만 과하게 나온 배는 안 된다. 즉 그런 사람은 트렌치코트를 아쉽지만 옷장 속에서 꺼내지 말아야 한다. 뱃살을 적당히 뺄 때까진 말이다. 길이도 중요하다. 키가 큰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은 절대 아니지만, 롱코트만큼은 다르다.
나도 철없던 어릴 적 트렌치코트를 좋아했다. 특히 가을엔 자주 입었다. 옷장에 여러 벌의 트렌치코트가 걸려 있었는데, 문제는 하프코트가 어울리는 데도 롱코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땐 낙엽 쓸며 다닌 듯하다. 트렌치코트만 좋아했지 내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에 대해서는 생각이 부족했다. 물론 지금은 트렌치코트를 잘 입지 않는다. 재킷 하나로도 충분히 멋을 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체형에 트렌치코트가 썩 잘 어울리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을남자의 상징 트렌치코트, 트렌치코트의 상징 버버리 트렌치코트. 사진=버버리 홈페이지 |
남자는 나이 들수록 자신에게 맞는 패션 스타일을 알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을에 어떤 남자가 되느냐는 그 남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을에 남자의 감성을 드러내기엔 패션이 제격이다. 만약 당신이 가을을 탄다면 이참에 가을 멋쟁이가 되어보는 것도 좋다. 가을에는 멋지게 입어낼 옷도 많으니까. 그리고 패션에 눈뜬 남자는 결코 쉽게 늙지 않는다.
오늘의 결론! 트렌치코트, 멋지게 잘 입거나, 아니면 아예 안 입거나. 결코 중간은 없는, 어렵지만 매력적인 남자의 옷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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