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했던 걸까. 현대자동차가 국내 시장에서 궁지에 몰리는 형국이다. 2001년만 해도 48.5%에 달했던 국내 시장 점유율이 2010년 41.8%로 떨어지더니, 올 들어 37.3%까지 하락했다. 도로를 달리는 차 2대 중 1대가 현대차였는데, 이젠 3대 중 1대로 줄었다.
현대차의 국내 시장 장악력이 이만큼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고에 대한 안일한 대처와 불만족스런 서비스가 고객과의 거리를 벌려놓았다. 국내 소비자는 수입차를 선호하고, 감성과 안전 수요가 높다. 해외 제조사들은 국내 소비자의 성향을 전략적으로 공략했고 성공적으로 틈새를 메웠다.
특히 낮은 가격에 신제품을 잇달아 출시함으로써 현대차가 자랑하는 가격경쟁력을 무너트렸다. 이를 두고 마케팅·전략 전문가들은 ‘본진(本陣) 공략’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현대차 아성 붕괴의 조짐은 국내 자동차의 핵심 시장인 중형차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중형차 시장을 제압해온 현대자동차 쏘나타가 처음으로 왕좌에서 내려왔다. 출처=현대자동차 |
중형차 시장은 쏘나타가 제압해온 곳이다. 2010년 4월 기아차의 K5가 등장하기 전까진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올 3∼4월 르노삼성의 SM6와 쉐보레 말리부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자동차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말리부는 올 6, 7월 각각 6068대, 4618대를 판매해 2개월 연속 가솔린 중형 세단 1위를 기록했다. 한국GM이 이 시장에서 월 1위를 기록한 것은 2002년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같은 기간 쏘나타는 4813대, 3578대 판매에 그쳤다. 말리부는 1964년 처음 등장해 1000만 대(지난해 10월 말 기준) 이상을 판매한 GM 베스트셀링 카. 이번 9세대 모델은 주행 성능 면에서 동급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가격은 1.5터보 모델이 2310만 원으로, 미국 현지 판매가보다 300만 원 저렴하다. 옵션이 없는 쏘나타 최저 트림과 비슷하다.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르노삼성의 SM6(유럽명 탈리스만)도 현대적인 디자인과 인테리어로 쏘나타를 바짝 추격 중이다. SM6의 가격도 파격적이다. 유럽 현지에서 SM6의 판매가는 3500만 원 이상인데, 국내에선 최상 트림이 3190만 원으로 300만 원 이상 싸다. 인테리어와 일부 편의 설비, 파워트레인과 새시 구성 등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가격을 낮춘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생겨난 소비자의 감성적 결여를 GM과 르노가 채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브랜드 마케팅 전문가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이 성장에 한계가 오자 주요 시장의 새로운 수요를 발굴하기 시작했다”며 “한국 소비자의 니즈를 적절한 가격 정책으로 정확히 파고든 사례”라고 평가했다.
약진하고 있는 르노 SM6(위)와 쉐보레 말리부. 출처=각 사 |
현대차의 안방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적인 가격 정책은 일본 기업들이 먼저 시작했다. 도요타 캠리와 혼다의 어코드는 2010년께부터 3000만 원대 후반∼4000만 원대 초반의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2015년 출시한 새 모델은 이전 모델보다 오히려 가격을 300만 원가량 인하했다. 현재 캠리의 가격은 3370만 원, 어코드는 3540만 원(2.4)이다. 모두 풀옵션.
이들 모델은 중형이지만, 배기량이 2400∼2500㏄로 현대차 그랜저와 직접 대결을 펼칠 수 있다. 그랜저 2.4의 풀옵션 가격은 3090만 원. 도요타·혼다로선 현대차와 준대형 시장에서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이는 또한 현대차의 국내 판매가격 인상을 봉쇄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유리한 승부를 펼칠 수도 있다. 현대차는 해외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저가 정책을 취하는 대신, 국내에서 수익을 충당하는 형태의 영업전략을 택해왔다. 국내 시장에서 가격을 올리지 못하면, 해외에서의 영업이나 가격 정책에 제약이 걸릴 수도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도요타와 혼다가 한국 시장에서 적자를 기록한다고 해도 현대차의 가격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보고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현대차가 가격경쟁력과 마진 문제로 경차·소형SUV 시장에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이 시장은 QM3, 트랙스, 스파크 등 해외 제조사가 장악한 상태다. 현대차가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9% 천정에 부딪혀 고전하는 사이 조금씩 국내 시장을 잠식당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고급차에만 매진할 것이 아니라 중저가 모델 등으로 수익 채널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업계 관계자는 “장치산업의 특성상 여러 차종을 저렴하게 많이 파는 것이 수익 창출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며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시장의 신뢰를 얻으면 국내·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지향해야 할 곳은 벤츠·BMW가 아니라, 도요타라는 얘기다. 도요타는 중저가 브랜드지만, 높은 품질과 성능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특히 고급차는 독일 등 유럽이라는 인식 탓에 한국 제조사는 고급 브랜드로서 태생적 한계가 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