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서서갈비’라는 상호의 고깃집이 꽤 많다.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한 포털을 기준으로 102곳이나 된다. 오리지널 ‘서서갈비’라고 할 수 있는 이 집 사장인 이대현 선생(75)에 의하면 200곳이 넘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 서서 먹는 갈빗집, 서서갈비는 하나다. 노고산동의 노포가 그곳이다. 공식적인 이름은 ‘연남서식당’이다. 서서갈비라는 본디 이름을 쓰지도 않고 영 엉뚱하다. 듣기로, 이미 다른 이가 먼저 상표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누구나 쓸 수 있는 상호가 되어버렸다.
서서 먹는 갈비의 원조, 서울 노고산동의 ‘연남서식당’. |
한겨울에도 이 집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업한다. 오후 서너 시면 고기가 떨어져 문을 닫는다. 대낮부터 양복 입은 이들도 자욱한 연기 속에서 갈비를 굽는 장면은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비친다. 그 덕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버스로 들이닥치기도 한다. 외국인 눈에도 ‘쇼’를 보는 것 같은 드라마틱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이 집 갈비는 전통적인 부분이 있다. 바로 갈비 뜨기다. 갈비를 뼈를 중심으로 좌우로 벌리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요즘은 한쪽으로 얇게 떠나가서 넓게 펴는 것이 유행이다. 이 집은 그저 두툼하고 양쪽 뜨기(일명 나비 뜨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고기를 씹는 맛, 뼈를 뜯는 맛이 좋다. 거칠고 터프하다. 뼈를 자를 때 도끼로 내리쳐서 잘랐다. 요즘은 하지 않는 방법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바로 화력이다. 가스불도 숯도 아닌, 고화력의 연탄이다. 이 사장은 새벽에 출근해서 연탄불 피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연탄불의 화력이 480도 정도 나온다. 그래야 고기가 마르지 않고 촉촉하게 익는다. 놀랍게도 이 온도는 나폴리 피자협회의 준수사항이다. 열이 좋아야 피자가 마르지 않게 익는다고 해서 그 온도를 규정해놓았다. 그런데, 이 갈빗집의 온도가 그것이라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간단치가 않다.
“온도가 세야 고기가 맛이 있어요. 훅, 하고 익는 거예요. 게다가 서서 먹으니까 고기가 천천히 익어서는 안 됩니다. 빨리, 고기맛이 살아나도록 익힙니다.”
뼈를 중심으로 좌우로 두툼하게 벌린 전통적인 방식의 갈비를 먹을 수 있다. |
이 집이 유명해진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인데, 나중에 필자가 <백년식당>에 장문의 인터뷰―가게 업력(業歷) 반세기가 넘어서 최초의 본격 인터뷰였다고 한다―를 했는데, 이 사장이 고생한 얘기가 특별히 인구에 회자되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에서 술을 파는데, 그는 학교도 못가고 바닥에서 널빤지를 깔고 먹고자면서 일을 했다는 얘기 등이 화제를 모았던 것이다. 그렇게 키운 가게인데, 지금도 새벽처럼 나와 연탄불을 피우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거칠어진 손에 대한 기사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집의 특징 중에는 밥을 팔지 않는다는 것, 김치가 없다는 것도 있다. 다 사연이 있다. 전쟁통에 적의 포탄이 떨어져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고 만 것. 그때부터 그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원래 인근에서 기와집을 짓고 갈았던 부잣집 소년의 고달픈 인생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집에도 의자가 있었다고 한다. 각목으로 얼기설기 엮은 것이었는데 술꾼들이 앉다보니 금세 부서졌다. 에이, 그냥 의자 없이 영업하던 것이 지금에 이른다. 처음에 팔던 안주도 갈비가 아니었다. 돼지껍데기와 오뎅이 주 안주였다. 막걸리와 막소주, 청주가 주종이었다. 돼지껍데기는 지금 같은 것이 아니라 비계가 두툼하게 붙은 것이었다.
5·16(1961년) 이후에 갈비도 팔기 시작했다. 당시 갈비는 고급 부위가 아니었다고 한다. 두 손으로 들고 뜯어야 하는 게 점잖지 못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간장에 잰 갈비인데, 그다지 깊고 달게 재지 않는다. 간장 맛이 슬쩍 밸 정도만 해서 굽는다. 그래서 고기 맛이 더 도드라진다.
가게 근처에 서강역이 있었다. ‘마루보시’라고 부르는 물자 하역장이 있었다. 짐꾼들과 지게꾼들이 몰렸다. 신촌이 활황의 시대로 들어가던 무렵이다. 당연히 이 선생의 목로집이 잘되었다. 하루종일 일하고 바닥에 누워 자는 일이 일과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서울의 명물집이 되었다.
“쌀 세 홉을 사려고 열심히 일했지. 그게 있어야 우리 식구가 먹고사니까. 학교? 일해야 하는데 학교는 무슨.”
원래 상호도 없이 실비집이었던 이 집의 명물 중 하나는 또 드럼통이다.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주워 식탁으로 썼다. 최대 여섯 팀이 한 드럼통을 놓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불판은 하나! 알아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대낮부터 자욱한 연기 속에서 드럼통 위에 갈비를 굽는 장면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
갈비 양념도 변천사가 있다. 고춧가루를 양념에 썼다고 한다. 조선간장을 썼는데, 짜서 물을 타서 비율을 맞췄다. 차츰 아지노모토 간장이라고 불렀던 왜간장으로 바뀌었다. 구하기 쉬운 데다가 달고 간이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간장에 푹 담근 양념을 쓰지 않는다. 가볍게 묻히듯 한 양념이다. 요새는 양념이 점점 달아지고 오래 담가서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추세다. 시절이 바뀌니 입맛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뜯는 맛’이 있는 쪽을 고수한다.
“갈비는 뜯어야 맛이지. 그리고 갈비가 너무 고급화된 것이 전 불만입니다. 갈비라는 게 살이 모자라서 고급 부위인 등심을 붙이고 있으니 말이지.”
너무 어린 소를 잡는 문화 때문이라고도 그는 말한다. 나이가 대여섯 살은 되어야 소가 맛이 있는데, 30개월도 안 된 것을 잡으니, 살점 맛이 약하고 흐리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부엌을 지킨다. 그를 보자면 조금 일찍 가야 한다.
박찬일 셰프
서울에서 났다. 1999년부터 요리사로 살면서 글도 쓰고 있다. 경향에 <박찬일셰프의 맛있는 미학>, 한겨레에 <박찬일의 국수주의자>(문자 그대로 국수에 대한 연속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단행본으로 한국의 오래된 식당을 최초로 심층 인터뷰하고 취재한 <백년식당>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