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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아직도 부산으로 향하지 못하는가

‘부산행’을 위한 뒤늦은 변명

2016.08.13(Sat) 13:21:42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신파이지만, 신파가 아닌가

신파는 지겹다. 그래서 혹여 혹평을 하는 자들 중, 신파를 논하며 <부산행>이 지겹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산행과 같은 재난’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가정하면 신파가 될 수 없고, 신파는 곧 재난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눈물을 흘리길 유도하는 나와 관계없는 ‘비현실’로서의 신파는 지겹지만,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우리와 밀접한 ‘현실’로서의 신파는 결코 지겨울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 비극이란 것이다.

   
 

특히, ‘현실로서의 신파’가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남녀의 사랑처럼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반에 관한 성질의 것이라면 좀비처럼 끔찍할 수밖에 없다. <장한몽>의 심순애가 낭만적 사랑이냐 다이아몬드냐에 흔들렸던 것과 같은 한 ‘개인의 갈등’과 <부산행>에서 기차에 타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모조리 흔들리는 ‘시스템적 갈등’은 같은 신파라도 그 크기와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겹다고 까기에는 현실로서의 신파는, 사회 구조로 기인한 신파는, 웃어넘기기엔 거대하고 버겁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로서, 그것도 시스템적 갈등으로 말미암은 사건이, 2014년 4월 우리나라에 있었다. <부산행>과 같은 ‘시스템적 갈등’이 집약된 배에 타고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있었고, 그 배는 침몰했다. 세월호의 승객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고자 필사적으로 창문을 깨기 위해 의자를 던졌고, <부산행>에서 좀비를 피해 탈출하려는 무리들도 열어주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온몸을 던졌다. 하지만 끝내 배와 기차에서, 그 누구를 구하지 못했고 희생자만 남았다.

<부산행>이 환영(幻影)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스크린보다 더욱 선명한 재난, 세월호 사건이 우리 현실에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지겨울 수 없는 것처럼 <부산행>은 현실로서의 신파이기에 지겨울 수 없고,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좌우하는 시스템적 갈등이기에 공포스럽다. 좀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좀비를 ‘폭도’로 표현하는 시스템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단지 <부산행>의 사건이 딸이 아버지에게 부산에 가자고 해서 발생한, 개인으로 촉발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지겨운 신파지만, 모든 일련의 사건이 시스템으로 인해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불가피하게 촉발된 희생으로 본다면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이고, 가장 끔찍한 ‘현실 풍자 영화’가 된다.

사실, 돌아보면 사람들은 신파를 신파적이라며 싫어하지만, 신파라고 좋아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딸을 구한다는 이 영화의 중심 서사는 신파의 대표 격인 <7번가의 기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역시 유사한 플롯인 <괴물>을 신파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산행> 역시 마냥 신파라고 부를 수 없는 지점에 발을 딛고 있는 이유는 <부산행>은 여전히 인양되지 못한 세월호 사건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의 발로요, 그것에 대한 처절한 투영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아직도 부산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는가

   
 

캐릭터의 면면을 보면, 먼저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펀드매니저, 공유가 전면에 있다. 개미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고 있는, 그래야 살아남는, 하지만 딸에 대한 본능적 부성애를 지니고 있는 ‘아버지’다. 이타성이라곤 개나 줘버린 그는 오직 가족인 딸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소시민적이고, 타산적인 인간으로서 묘사된다.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느끼지만, 신경 쓰지 않고 외면하며 살아야 하는,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99%’의 아버지들과도 다르지 않게 묘사된다.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에, 순수하고 순진한 ‘딸’은 그런 잔인한 시스템을 알 턱이 없고, 그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딸은 도덕책의 이야기를 읊는다. 약한 사람을 돕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류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발언들. 작중 그러한 영향은 어머니에게서 받았다고 나온다.

아이러니하게 딸의 인간성은 어머니를 보러 부산행 기차를 탐으로써 문제가 된 ‘시발점’이기도 하지만, 해결점으로서의 ‘종착점’이 되기도 한다. 좀비와 함께 가는 버스를 타게 하는 계기가 인간적인 어머니에 대한 갈망이었던 반면, 좀비를 이겨내는 어쩌면, 좀비와 같은 비인간성을 이겨내는 것 또한 이 딸에게 고스란히 전염되어 있던 너무나 인간적인 모성애와 같은 ‘협력과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부산에 있는 ‘어머니’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부산에 존재하는 추상적 관념으로서 그녀는 얼핏 후면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딸로서, 그녀의 사상과 행동으로서 어머니의 자아가 현현(顯現)된다. 딸을 전면에서 구하는 처절한 부성애는 육체로, 딸을 후면에서 구하는 모성애는 인간성으로 실현된다.

한편,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좀비영화가 아니라, 좀비와 같은 비인간적인 시스템, 불합리한 시스템 속의 개인이 좀비화된 상황에서 극도의 비인간성을 이겨내는 근본적인 것은, ‘부산’이며 ‘행’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에 있는 존재가 어머니이며, ‘행’에 있는 존재가 아버지이며, 그 사이에 딸이 있고, 그 지점에 ‘사랑’이 있고 그것을 둘러싼 ‘협력과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악역으로 불리는 김의성조차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의 노력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인 천마고속 상무였을 뿐, 그 시스템을 흔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가 살아야 할 이유도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이는 마지막 대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가 부산으로 향하는 방법은 명백해졌다. 부산으로 가는 길에 부성애와 같은 마음으로 희생해야 하며, 모성애와 같은 지점을 설정해야 한다. 왜 부산만큼은 좀비로부터 안전했는가를 질문하자. 마지막, 동굴 속에서 벗어나며 살아남는 사람들이 왜 ‘들’인지 고민해보자. 좀비와 같은 시스템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징해진다.

왜 우리는 여전히 문을 닫아걸고만 있는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마동석처럼 좀비와 처절히 싸우고 희생하며, 또 서로 협력하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하지 않는가. 어느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성장이 답보되어 있다면, 어쩌면 모조리 상실되고 닫혀버린 인간성에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도덕책 같은 이야기이고, 너무나 뻔해서 민망한 문장을 꺼내보고자 한다. ‘인간적인 곳은 인간에겐 여전히 너무나 안전하다’는 것.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곳에선 침몰될 수도, 좀비화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아직도 부산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는가.

심이준 사랑연구소 연구소장

비즈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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