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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현자타임] 가습기 살균제와 공동체

2016.08.11(Thu) 11:24:42

아토피가 있다. 건조하면 피부가 갈라지고, 간지럽다. 긁으면 피가 난다. 아프냐고? 아프다기보단 시원하다. 시원해서 피가 날 때까지 긁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가려움이란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손을 목 뒤로 올리게 만든다. 양상군자처럼 점잖은 척하지만 기실 독한 놈이다.

제 자식의 피를 누가 보고 싶을까. 아토피약을 바르고, 먹였다. 그래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당장 방이 건조하면 아이는 기침을 하기 마련이다. 피가 날 때까지 긁고 싶고, 폐에서 쇳소리가 나올 때까지 기침을 토하고 싶다. 긁고 기침하는 아이를 보면 어미의 속은 타들어간다. 피가 나온 건 내 목덜미, 엉덩이, 등허리인데 아픈 건 엄마였다. 내 어미가 그랬고, 내 어미의 어미가 그랬다. 모성이 교육되는 것인진 모르겠으나, 부모란 존재는 대부분 그러했다.

어떻게 해야 방이 덜 건조할까. 가습기를 켠다. 연두색 가습기엔 흰색 주둥이가 있었다. 밥주걱 같이 생긴 주둥이에선 어릴 적 할아버지의 담배연기 같은 놈이 쉬지 않고 나왔다. 이비인후과 기계보단 부드러웠고, 맛도 없었다. 그저 수증기였기 때문이다.

가습기를 켜고 나니 좀 나았다. 방이 덜 건조하니 코와 입이 덜 마르고 기침을 하지 않는다. 기침을 덜하니 스트레스를 덜 받고, 피부도 덜 민감해진다. 아토피는 근본적으로 면역질환이라 몸 상태에 크게 영향 받는다. 가습기 하나가 가져온 작은, 아주 작은, 아니 작지만 큰 변화였다.

지금 그 가습기는 없다. 커가면서 건조함에 대한 내성이 커졌다. 담배도 안 피우니 그럴 일이 더 없다. 필요가 없어지니 보이지도 않는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버렸나보다.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 지금 내 목덜미에는 여전히 피딱지가 있고, 피가 날 때까지 긁지만 가습기가 필요하진 않다.

내가 필요 없다 해서, 쓰는 사람이 없지 않다. 내 코가 건조함에 내성이 생길 때, 내 편도선이 잘릴 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 때도 가습기는 팔렸다. 건조함에 취약한, 날것에 가까운 새 생명들은 그때도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난다. 자식들의 생김새는 제각각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모양새는 대부분 비슷하다. 정상가정에 대한 환상이 아니다. 부성애와 모성애를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 사람의 생활이 그러하더라. 자식이 생기면 유모차를 사고, 옷을 사고, 자기 먹을 걸 줄여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분유를 사주는 것처럼 말이다.

가습기를 사고 아이의 방에 놓아주니, 안심이 되는데 걱정이 된다. 이 가습기에 내가 알지 못하는 균이 있어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치면 어떡하나. 먹이는 거 하나하나도 걱정되는 판국에, 아이의 숨은 더더욱 걱정된다. 음식은 토할 수라도 있지만 숨은 안 쉬려야 안 쉴 수 없다. 아이의 호흡과 부모의 걱정은 비슷한 모양새다. 뗄 수 없다.

그렇게, 살균제를 샀다. 발명가에게 감사할 정도로 이렇게 신기한 물건이 있었냐며 살균제를 샀다. 살균제에 써 있는 매뉴얼처럼 살균제를 가습기 안에 풀고 가습기를 켰다. 아이의 폐를 감싸줄 줄 알았던 가습기는 아이의 폐를 종이처럼 굳게 했고 파괴했다. 노벨상을 줘야 한다고 칭찬한 부모는, 아이를 잃고 목 놓아 울고 있다. 칭찬하던 목으로 아이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고 있다. 아이는 목으로 살균제를 마셨고, 죽었다. 부모는 아마, 그 살균제를 칭찬하던 자기의 목을 아이의 목과 바꾸고 싶지 않을까.

   
지난 5월 25일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를 만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모임 대표단. 사진=박은숙 기자

‘가습기 살균제가 폐를 굳게 만들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는 문장은 어떠한 주장이 아니다. ‘사람이 숨을 못 쉬면 죽는다’는 문장과 같다. 정합논리이자 정언명령이다. 저 문장은 약자의 고통 앞에 쓰러지지 않는 기득권의 벽처럼 공고하다. 저 문장에 우리의 어떠한 절망, 절규가 끼어들어갈 틈이 없다.

문제가 생겼을 때,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미세먼지가 생기면 고등어를 먹지 않고, 대중교통을 탄다. 블랙아웃이 터지면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켜고, 선풍기 대신 부채를 든다. 원전이 문제면, 원전의 부실한 부품은 자기네들이 다 만들어놓았으면서 전기를 많이 쓰는 우리가 죄인가 싶다. 어쨌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구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도, ‘가습기 살균제가 폐를 굳게 만들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라는 문장을 고칠 힘은, 예방할 힘은 없다.

그 힘은 공동체에, 정확히는 공동체의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에게 있다. 국회의원들이 할 일은 차가운 벽돌 같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 첨언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가습기 살균제가 폐를 굳게 만들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는 문장 뒤에 어떠한 해결책을 넣을지, 어떠한 문장을 첨언해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시민들에게 ‘여긴 아직 있을 만한 공동체다’는 인식을 줄지 고민해야 한다. 자기네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이 재임하지 않던 시기에 문제의 근원이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주둥아리는, 이 시대에 필요한 주둥아리가 아니다.

많은 변화는 분노에 기인한다. 뚱뚱한 학생은 자기를 비웃는 듯한 사람들에게 분노해 살을 빼고, 성적이 낮은 친구는 자기보다 성적이 높은 친구의 비웃음에 분노해서 공부한다. LOL 채팅창의 패드립은 다른 플레이어를 화나게 하고, 좀 더 피시방에 매진하게 한다.

분노는 강한 원동력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분노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오늘이다. 사람들은 오늘에 분노하고 내일 바뀐다. 미래라는 단어는 너무나 추상적이다. 당장 10년 뒤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데, 무슨 미래냐. 사람들은 소박하게 달라진 ‘내일’을 바란다.

그 내일이 바뀌지 않을 것 같을 때, 이 공동체가 안녕한 내일을 보장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시 분노한다. 이때의 분노는 앞을 향한 것도 아니고 뒤를 향한 것도 아니다. 이 분노의 방향은 사람의 땀구멍과 일치해 전방위적이다. 땀구멍에서 땀을 배출하듯이 분노를 배출한다. 그 분노는 우리의 이마에서, 겨드랑이에서, 갈비뼈 사이에서 분출되어 만인을 향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여기서 시작된다.

공동체의 파괴를 막기 위해선 위정자가 똑발라져야 한다. 문제의 책임을 논하기에 급급한 지금을 넘어, 문제의 해결책을 논하는 내일로 바뀌어야 한다.

이 공동체에 왜 머물러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공동체에서 나와야 한다. ‘여기가 살만하니까’라는 대답이 나와야 건강하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구원은 아름다울 수 있으나 올바르지 않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사회가 개인에 대한 구원이 된다는 교과서 같은 답이 나오긴커녕 ‘각자도생이 정답이다’라는 말만 가득하다. 허무할 정도로 올바르지만, 그만큼 공허하고 의미 없는 문장이다.

구현모 필리즘 기획자

비즈한국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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