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한 고 유일한 박사는 기업의 사회환원을 실천한 기업가이자 일제강점기에는 열혈 독립운동가로 활동해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유한양행은 유 박사의 창업정신을 이어받아 대표적인 ‘착한 기업’, ‘민족기업’으로 꼽힌다.
이런 유한양행에게도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으니, 유 박사의 동생 고 유명한 전 사장 재임 시절 이뤄진 친일 행각이다. 유한양행은 <유한 50년사>(1976)나 홈페이지 등에서 ‘유명한 시절’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반복된다. 아픈 역사는 더더욱 그렇다. 2016년 8·15를 맞아 <비즈한국>이 그 기록을 남긴다.
유한양행이 일본군에 전투기 비용으로 5만 3000원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자 지면. 출처=미디어가온 |
유일한과 유명한의 일생은 완벽한 대척점이다. 유일한은 1895년 평양 재력가 유기연의 장남으로 태어나 1904년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일한은 당시 유한양행을 통해 의약품 생산 외에도 위생용품 수입 등을 통한 국민생활 향상, 화문석 등을 수출해 민족자본 형성에도 힘썼다.
1938년 사업 활성화를 위해 다시 미국으로 출국한 유일한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돼 임시정부 후원 등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입국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유일한은 1942년 재미 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고 유일한 박사. 출처=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유일한은 만 50세의 나이에 강도 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으면서 미국의 한국 본토 침공 작전인 ‘냅코(Napco)’ 작전에 참가할 만큼 열혈 애국자였다. 이 시기 그를 대신해 유한양행을 이끈 인물이 바로 동생 유명한이다.
유명한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등에 따르면 유명한은 1941년 8월 경성부에 있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해 국방헌금 1만 원을 일본 제국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헌납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때인 1941년 12월 유명한과 유한양행은 전투기 제작비로 자신과 회사 명의로 5만 3000원을 종로경찰서를 통해 일본군에 헌납했다. 각각 2만 7000원은 유한양행 명의로, 유명한 본인 명의 1만 원, 만주유한공사 명의로 1만 원, 유한무역주식회사 5000원, 직원 명의 1000원이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은 무리가 있으나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12~15원이었고 1000원이면 기와집 한 채도 거뜬히 살 수 있었다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감안할 수 있다.
더욱이 당시 조선 최고 재벌이었던 화신의 사주 박흥식이 전투기 제작비용으로 헌납한 금액이 3만 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한양행과 유명한의 헌납 금액은 천문학적임에 틀림없다. 유명한 시절 유한양행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왕의 군대인 황군에 대해 ‘皇軍武運長久(황군무운장구)’를 쓴 광고를 하기까지 했다.
유일한과 막내 동생 유특한(유유제약 창업주)은 친일행각을 한 유명한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의절했다. 이때 유일한 박사가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놈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놈은 모른다”다.
유명한은 해방 직후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로부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유명한은 1945년 10월 26일에는 조선약품공업협회의 사무부 위원으로, 1948년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일한과 유특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친일을 이유로 거절당하고 같은 해 전쟁 중에 사망했다.
창립 당시 유한양행 사옥. 출처=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
유한양행은 이러한 유명한 시절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유한 50년사>나 유한양행·유한재단 홈페이지에 유명한 시절이나 유명한 사진 등 기록조차 찾을 수 없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당사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창업주 때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고 있고 유일한 박사 유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며 “유명한 전 사장도 그 경영인 중에 한 명일 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기업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유명한 사장의 결정으로 보인다. 그래도 유명한 전 사장 시절에 대해선 절대 미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50년사를 발간했을 당시 임직원들이 현재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있어 유명한 전 사장 시절 기업사를 그렇게 기술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유 전 사장 시절 친일행각에 대해선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이후에 알았다”며 “기업 역사에는 밝음이 있다면 어두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두운 역사를 다 알리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후에 있을 100년사 발간에서 유명한 사장 시절을 자세히 기술할지는 현재로선 어떠한 입장도 내놓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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