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우리 집에 놀러오면 가장 즐기는 것이 TV로 만화를 보는 것이다. 자기 집에선 마음대로 보지 못하던 만화를 외가에 와서는 실컷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네모바지 스펀지 밥>이다(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 시들한 것 같긴 하다).
어른들 중에도 팬이 많은 이 만화를 방영해주는 채널의 이름은 ‘니켈로디언’이다. 175개의 나라에서 3억 5000만 가구가 시청한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어린이 채널이지만, 정작 이름은 소박하다. 미국의 5센트 동전을 흔히 니켈(nickel)이라고 하는데 입장료가 5센트였던 20세기 초의 영화관 ‘니켈로디언(nickelodeon)’에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서 100년 전에는 5센트가 큰돈이었으면 어쩌지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인플레이션 계산 웹사이트에서 계산을 해보니 요즘 돈으로 1.22달러, 약 1350원이다. 소박한 이름, 맞다.)
흔히 ‘니켈’로 불리는 5센트 동전. |
5센트 동전이 니켈이란 별명을 얻은 건 구리와 니켈로 이루어진 합금인 백동으로 만들기 때문이다(50원, 100원, 500원 동전도 구리-니켈 합금으로 만든다). 일상에서 가장 접하기 쉬운 니켈은 동전에 들어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절반 가까이의 니켈이 스테인리스강의 제조에 사용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합금이나 도금의 용도로 쓰인다.
니켈은 잘 부식되지 않거나 열에 강한 성질 또는 특정 온도에서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성질 등을 가진 합금을 만들어 여러 분야의 부품에 쓴다. 지금은 리튬 전지에 밀려 쓰임새가 많이 줄었지만 충전해서 쓸 수 있는 전지를 만드는 데도 쓰고, 강한 자석을 만들기도 하며, 화학공업에서는 촉매로도 사용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되는 니켈은 철 운석에서 니켈-철의 합금 형태로 발견되기에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철 운석이 발견되는 양이 그리 많지 않고 합금된 형태 그대로 사용했기에 니켈이란 금속을 따로 발견해서 사용한 건 아니다(백동에 니켈이 들어 있다는 걸 안 것이 1822년이다).
지각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니켈은 다른 물질과 화합된 광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니콜라이트(niccolite, 홍비니켈석)이다.
비소와 니켈의 화합물이 주성분인 니콜라이트는 구리 광석과 비슷하게 보여서 중세 독일 광부들은 여기서 구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비소화합물의 유독한 증기가 나와서 오히려 고생만 했기에 못된 귀신(악마)의 소행으로 여겨서 악마의 구리(Kupfernickel, 쿠페르니켈)라는 이름을 이 광석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1751년, 니콜라이트에서 은백색 금속을 순수하게 분리한 크론스테트 남작이 Kupfernickel에서 구리(Kupfer)를 빼고 이 금속을 니켈이라 명명했다.
이후 19세기 들어서 니켈 광석에서 본격적으로 니켈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동전을 만드는 데 니켈을 사용한 것도 이때부터다(제작비용 문제로 요즘은 많은 나라에서 동전의 니켈 함유량을 줄이거나 니켈 이외의 금속을 사용한다).
니켈-철 운석 조각. 출처=위키미디어 |
대체로 안전하지만 악마의 구리라는 옛 이름답게 니켈이 못되게 굴 때도 있다. 그중 하나가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미 유럽연합(EU)에서는 장신구 등에 사용되는 금속의 니켈 함량의 최솟값을 정해 규제하고 있다. 혹시 알레르기 피부염이 있다면 장신구, 옷, 휴대폰 등과 같은 물건의 금속 부분과 접촉하는 것을 멀리해 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또 여러 니켈 화합물들이 발암물질인 것으로 알려져 니켈 제련 공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흡입 허용치 기준도 마련되고 있다. 그 외에 식품이나 물을 통해서 섭취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환경오염이나 니켈 도금 식기의 사용 등으로 인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의 콩팥이 대부분의 니켈을 걸러 소변으로 내보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으로 많은 양의 니켈이 지속적으로 체내에 들어오는 경우에는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업체의 정수기에서 니켈이 떨어져 나왔고 업체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겨온 것이 밝혀져 많은 소비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변함없는 패턴을 보게 된다. 사실을 은폐·축소하려는 업체, 안전 기준이 없거나 부실한 것, 누구 편인지 모르겠는 당국, 그리고 늘 덧붙여지는 마지막 한 마디 “별 걱정 말고 가만히 있으라”.
정수기 업체에서 올린 사과문의 일부. |
악마의 구리라는 이름이 이렇게 되살아나는 것 같아 서글프다. 과연 악마는 누구인가.
정인철 사이언스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