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래서 소담 씨는 무슨 주의자인 거예요?” “소담 씨는 사상적 기반이 어떻게 돼요?”
맙소사, 사상적 기반이라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은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거창한 질문을 받는 건 정말 망측한 일이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속으로 드는 마음은, ‘저 따위의 사람에게 무슨 그런 질문을 하시나요?’ 정도랄까. 어쨌든 답을 그렇게 할 순 없으니,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주의자’ 혐오주의자입니다.”
그렇긴 그렇다. ‘혐오’랄 것까지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난 주의자 혐오주의자다. ‘-주의자’를 제 입으로 선언하는 사람 치고 합리적인 사람을, 나는 지금껏 거의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의 ‘-주의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념 대립으로 벌어진 전쟁의 최전선에서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보고 이념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온 분, 어떤 학문의 연구에 일평생을 쏟아붓고 나름의 철학을 완성한 분, 자신이 지지하는 사상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을 몇 알고 있다. 그런데 그분들은 결코 스스로를 ‘-주의자’라고 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이 자신을 ‘-주의자’로 칭하는 것을 경계하고, 아직 ‘-주의자’로 불리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더라.
어떤 사상을 지지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닐 텐데, 스스로를 ‘-주의자’라고 칭하는 사람 중에는 왜 합리적인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해왔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자신의 일평생을 그 연구에 쏟은 이들조차 자신을 ‘-주의자’로 칭하는 걸 경계하는데, 거리낌 없이 스스로 ‘-주의자’임을 선언한다는 건 그만큼 고민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고민이 부족하다는 건, 정말 어떤 철학으로서 ‘-주의’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어떤 처지나 상황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사상을 지지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개인의 처지가 한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로 인해 특정 사상을 지지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상적으로 옳다, 적어도 인류에 더 이로운 사상이다, 라는 판단 없이 ‘그저 그게 나에게 유리하니까’ 그 사상의 지지자가 된 사람을 ‘-주의자’로 칭하긴 어렵지 않을까.
깊은 고민 없이 “나는 -주의자”라고 스스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좌우 불문 모든 바닥에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자칭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를 외치는 이들의 일부 유형은 다음과 같다. 각 사상마다 크게 두 개의 부류가 있다. 나의 주관적인 감상이고, 이게 절대적인 답이라는 의미는 아니니 적당히 재미로 읽어 주시길 바란다.
1. 자칭 보수주의자
TYPE A: 나는 잘산다. 부모 덕이든 내 노오력 덕이든, 나는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있다. 지금 내 심신이 편안하므로, 궁박한 사람들이야 어찌 살든 큰 관심이 없다. 이변이 없는 한 내 자식들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부의 재분배’라든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든지 ‘부자의 사회적 책임’이라든지,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떠들면 조금은 예민해지는 기분이다. 심지어 ‘누진세’ ‘상속세’ 얘기가 나오면 화가 날 때도 있다. 나는 별로 나눠주고 싶지 않은데…. 나는 내가 잘사는 지금의 이 세상이 참 좋은데. 게다가 나는 내 자식들에게도 이 멋진 삶을 물려주고 싶은데, 왜 자꾸 없는 것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인지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진보가 싫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TYPE B: 나는 못산다. 가난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싫다.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부정하고 싶다. 나는 개돼지로 살고 싶지 않다. 남은 생에 어떻게든 이 ‘개돼지’에서 벗어나는 게 나의 목표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 이 가난을 마음껏 비웃어주며 살고 싶다. 나는 1%를 꿈꾸며 노력하는 사람이다. 위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수단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개돼지에서 벗어나 개돼지를 비로소 비웃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다 같이 잘사는 삶 같은 건 결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영원히 개돼지로 살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진보가 싫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2. 자칭 진보주의자
TYPE A: 나는 못산다. 부모가 가난을 물려줬든 내가 삼류대를 평점 1.9로 졸업해 박봉을 받고 살아가고 있든, 어쨌든 난 지금 춥고 배가 고프다. 이 현실이 너무 괴롭다. 가진 사람들이 밉다. 부정축재를 했든 정당히 돈을 벌었든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나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부자들이 정말 싫다. 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싶다. 컴퓨터 리셋 버튼을 누르듯 버튼 하나로 다시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될 수 없으면 차라리 다 같이 망했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박탈감은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학벌주의에 반대하여 학벌을 기재하지 않으며, 대통령을 도둑맞은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절대 내가 가진 현실이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이놈의 썩은 세상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보수가 싫다. 나는 진보주의자다.
TYPE B: 나는 잘산다. 세상은 나에게 안락하고 따뜻한 곳이다. 나는 다행히도, 먹고사느라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어차피 돈은 있으니, 한평생 고상하게 살아가고 싶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사실 나와는 큰 상관이 없다. 그러니 굳이 입바른 소리 하고 미움받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쪽을 택하고 싶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내 일평생 자본주의가 몰락할 일 같은 건 없다. 내 재산이 반 토막 날 일도 없다. 그러니 더불어 사는 삶을 외치지 못할 이유가 대체 무얼까. 나는 따뜻한 사람, 멋진 사람, 개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이들은 나를 ‘패션 좌파’라고 부른다. ‘패션’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최고의 찬사다. 그래서 오늘도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와인 한 잔에 목을 축이고 트위터에 쓴다. “잊지 맙시다! 저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꿉니다!”
3. 자칭 자유주의자
TYPE A: 난 똑똑하다. 심지어 금수저도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좋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늘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공부든 다른 것이든 남들과의 ‘경쟁’에서 져본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마 흙수저였어도 난 성공했을 것 같다. 어떤 직업을 택했어도 나라면 무난히 잘 해냈겠지. 솔직히 멍청한 사람들을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들은 어찌 저리들 멍청할까. 나는 경쟁을 사랑한다. 경쟁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당당히 같은 출발선에서 뛰자! 다음 생에도 나로 태어나고 싶은 나는 ‘자유주의자’다.
TYPE B: 난 똑똑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멍청이들을 보면 혐오감이 든다. 내가 저 멍청이들을 혐오하지 않으면, 나도 똑같이 멍청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무한 자유경쟁을 외치는 사람들, 솔직히 좀 멋있어 보인다. 귀를 막고 “경쟁은 아름답다!”를 외치고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도 꽤나 멋진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기회의 균등이라든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든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쩐지 좀 찌질해 보인다. 나는 절대 저 찌질이들의 편에 서고 싶지 않다. 그들의 편에 서는 게 어쩌면 내 삶을 위해서는 더 나은 일이겠지만, 그걸 알면 내가 멍청이가 아니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멋있어 보이고 싶다. 그런 사람이 못되니, 그렇게 보이기라도 하고 싶은 나는 ‘자유주의자’다.
나는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생각하지 못한다. 사실 그걸 생각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나인데 어떻게 내가 아닐 수 있을까. 사람들은 ‘다음 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늘 내가 ‘나’로 다시 태어나는 걸 당연스럽게 전제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난 건 내 노력도 운도 아니요, 그저 ‘우연’ 이었음을 우리는 자주 잊고는 한다.
어떤 사상이나 정치, 제도, 사회에 대해 생각할 때 ‘진정성’ 있는 고민이란 과연 어떤 걸까. 내가 다음 생에 지금의 나와는 정반대로 태어난다고 생각해보면 꽤 간단해진다. 내가 지금 잘살고 있다면 다음 생에는 빈민으로 태어날 거라고 생각해보고, 내가 지금 못산다면 다음 생에는 부자로 태어날 거라고 생각해보고, 내가 지금 똑똑하다면 다음 생에는 지능이 낮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고. 그 가정하에서도 지금 나의 생각과 주장에 변함이 없다면, 그래도 그 주장은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든 내가 반대편에 놓이는 상황을 한 번 가정해 본다면, ‘빈익빈 부익부’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주장, ‘부자는 다 나쁜 놈들’이라는 주장, ‘똑똑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멍청한 사람들이 좀 힘들게 사는 거야 당연하다’는 주장, ‘경쟁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주장 같은 건 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자신의 현재 처지로 인해 어떤 정당이나 특정 사상을 지지하는 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전생이니 환생이니 그런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다음 생에 네가 뭘로 태어날지 생각을 해보고 말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일반 국민들이 전부 진지하게 사상적인 고민을 거쳐 자신의 한 표를 던지길 기대한다는 건 당연히 무리한 일이고, 그래야 한다고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이거나 자칭 ‘-주의자’라거나 특정 사상 혹은 정당의 선두에 서서 대중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단지 이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주장을 한다”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에 해를 끼치기가 쉽다. 내가 이러이러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어서 ‘-주의자’가 된 사람의 주장이 논리성이나 설득력을 갖기 어렵고, 그만큼 ‘병크’를 터뜨리기도 쉽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이 글의 배경이 된 ‘깨달음’을 얻은 건 못난 나 자신으로 인해서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는데, 내가 ‘옳은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 중에는 ‘나에게 유리한 것’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십 대의 어느 날엔가 문득 깨닫게 된 일이 있었다. 헬렌 켈러가 만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그 정도였을까. 몇 날 며칠을 밥이 안 넘어갈 기세로 울적했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정반대의 나로 태어나는 상상 해보기’도 그때 스스로 만든 법칙이다. 다음 생에 정반대의 나로 태어나는 상상을 해본 뒤, 그래도 여전히 내 주장이 적절하다고 믿을 때에만 무언가를 말하고 쓰기로 나는 결심했다.
철저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인간은 늘 자신을 평균으로 놓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 경계로 삼고자 절반쯤은 진지하게, 또 절반쯤은 웃으며 이 글을 썼다. 스스로 ‘-주의자’를 선언한 분들 중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터인데, 그런 분들은 쓰지 않고 생략한 ‘TYPE C’에 속한다고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혹자에게 불편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가 그렇다는 의미도 전혀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개똥철학에 불과할 수 있으니, 이 글을 읽다가 ‘이건 아니다’ 싶은 부분이 있거든 그저 비웃고 넘어가 주시길 소망한다. 어쨌든 나는 자칭 ‘-주의자’들이 자주 불편하다!
정소담 칼럼니스트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