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적으론 이해한다. ‘팝컬처’라는 제목을 달고 20대의 놀이문화에 실존이 없다고 비평하는 기자를 이해한다. 포켓몬GO를 위해 속초로 떠난 사람들의 여행엔 자신의 무전여행과 달리 과정이 없고 포켓몬이라는 실존적이지 못한 가상의 결과뿐이기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그를 이해한다. 그의 입장에서 무전여행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속초여행은 배고픔도 없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을 수 있는 버스뿐인, 배움 없는 무근본 행위다.
부장기자가 젊은이들의 속초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부장기자의 속초행에 대한 몰이해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게 무전여행은 사서 고생을 하고 인생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노동력과 숙식의 거래라는 탈을 쓴 민폐의 합리화다. 무전여행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 민폐의 공공화, 비용의 외부화를 통한 개인 이익의 사유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근원적 한계로 인해 타인의 일부밖에 이해할 수 없다. 행위의 기승전결인 동기, 행위, 과정, 결과 중 결과밖에 이해할 수 없다. 기실 결과의 전부도 아닌 결과의 일부밖에 알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타인을 그의 소득, 자동차, 회사의 지위로 판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포켓몬고를 즐기기 위해 속초 청초호유원지 엑스포공원에 몰려든 사람들. 사진=연합뉴스 |
부장기자의 속초행 품평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품평은 저열하고 나쁘다. 본인의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른 타인의 경험의 우열을 나누기 때문이다. 가벼운 유희마저 정성적으로, 정량적으로 판단해 우열을 나누는 행위가 너무 구식이기 때문이다.
여가 시간에 소주를 먹든, 맥주를 먹든, 수박바를 먹든, 돼지바를 먹든 하등 상관없다. 아이돌 음악을 들으면 무지몽매한 대중이며, 클래식을 들으면 교양 있는 현대 서울 사람인가.
기자에게 묻고 싶다. 무전여행을 통해 본 바다와 바위만이 진짜 속초인가. 포켓몬GO로 즐긴 속초도 진짜다. 진짜는 개인이 느낀 현상이다. 타인이 규정한 진짜는 그 사람만이 느낀 현상이며, 온전한 개인이 느낀 진짜가 아니다. 현상과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미술작품의 가치를 주식시장과 달리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개인의 경험을 수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개인 경험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무전여행으로 즐긴 속초가 진짜고 포켓몬GO로 즐긴 속초가 가짜라면, AR게임과 무전여행 중 무전여행이 더 우등한 것인가?
그냥 ‘지 꼴리는’ 대로 가는 거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가수엔 우열이 있지만, 장르엔 우열이 없다. 빅뱅과 해리빅버튼을 비교할 수 없다. 장르가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무전여행과 AR은 아예 궤를 달리한다. 우열을 판단할 수 없다. 서든어택과 오버워치는 비교할 수 있으나, 서든어택과 스타크래프트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속초에는 아무 일이 없다.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변함없는 것처럼.
구현모 필리즘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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