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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스업] 더치페이와 남자의 품격

2016.08.08(Mon) 14:44:04

요즘 20대들은 데이트 비용을 5 대 5로 더치페이 한단다. ‘알바천국’에서 20대 대학생 897명에게 가장 바람직한 데이트 비용 분담률을 물었는데, 5 대 5로 꼽은 응답자가 무려 58.4%였다. 2014년에는 41.7%였고, 2015년에는 54.7%였다. 3년 연속 증가세에, 이제는 과반수가 더치페이를 지지한 것이다.

더치페이(Dutch pay)에서 더치가 네덜란드를 뜻하는 만큼 각자 내기는 네덜란드를 필두로, 북유럽과 일본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전 세계가 더치페이에 익숙한 건 아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선 남자가 여전히 데이트 비용을 많이 부담한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20대가 달라지고 있다.

   
더치페이를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일방적 주도권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여전히 3040에겐 더치페이가 애매하고 어색하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기도 하다. 모든 관계에서 서열을 따졌다. 데이트할 때는 남자가, 직장인이나 선후배가 모이면 제일 연장자나 상위 직급자가 돈을 내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건 체면이나 위신에 앞서 서열 문화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는 남성우월이 강하고, 여성차별이 심한 국가다.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서열화도 강하다. 어찌 보면 남성우월과 나이 서열화를 견고히 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돈과 권력이다. 남자가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차지하고, 연장자이자 선배가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휘두르며 인맥의 고리를 대물림했다.

결국 돈을 내는 자가 관계의 주도권을 가졌다. 따라서 더치페이를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일방적 주도권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데이트에서건, 직장에서건, 선후배 사이에서건 더 이상 권력 관계가 아닌 소통의 관계가 되겠다는 의미다. 더치페이는 서로가 동등해진다는 의미이자, 얻어먹은 것 때문에 누구에게 의존하거나 누굴 봐줘야 할 불편한 상황이 안 생긴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더치페이는 사회적 투명성과도 연관된다.

전 세계적으로 더치페이를 가장 잘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와 북유럽 국가들이다. 신기하게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5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1위를 한 덴마크를 비롯,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즉 네덜란드와 북유럽 4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적은 톱5 국가다. 누구한테 얻어먹거나 기대지 않는다는 건 투명성을 위해 중요한 태도가 된다. 결국 더치페이가 그 사람의 품격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치페이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당일 ‘권보영’이라는 한 여성 네티즌이 고 노무현 대통령과 있었던 개인적 일화를 인터넷에 올려둔 것에서 발췌했다.

호텔 일식당에서 일하던 권보영 씨는 당시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는데, 호텔 일식당에는 정재계 인사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각종 모임이나 회의 등 호텔에서 밥 먹는 일이 많았는데, 대부분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인 접대자리였다. 당연히 고급 음식과 비싼 양주가 주로 소비되었다. 당시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간 권보영 씨에게 노무현 의원은 죽 한 그릇만 달라고 했다. 자리를 마련한 기업 인사가 놀라면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걸로 달라며 하자, “아가씨. 나는 얻어먹는 건 너무 싫고 내 돈 주고 먹을라니까 호텔에서 죽 한 그릇 먹을 돈밖에 없어.”라며 고집스레 죽 한 그릇만 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죽값을 따로 계산하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노무현 의원은 그 식당에 올 때마다 죽 한 그릇만 시키고, 매번 자기가 먹은 죽값을 계산하고 나갔다고 한다. 이런 게 품격이다.

물론 남자가 적당히 지갑을 열 줄도 알아야 한다. 호기롭게 ‘내가 낼게’를 한 번쯤 외쳐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돈 내는 맛에 빠지면 곤란하다. 과거엔 술자리에서 돈도 잘 내고 잔소리도 잘 하면 그냥 선배, 잔소리는 안하고 돈만 잘 내면 좋은 선배, 돈도 잘 안내고 잔소리만 하면 꼰대였다. 결국 좋은 선배는 지갑의 두께가 만들어주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젠 지갑의 두께는 점점 힘을 잃어간다. 돈을 내는 건 더치페이, 간혹 돈이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의 몫일 뿐이다. 돈과 사람은 별개가 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 가야 한다. 그것이 불황의 시대, 우리가 돈 앞에서 덜 주눅 드는 방법일 수 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에서 황정민의 명대사다. 지금 남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 수도 있다. 이해관계가 얽힌 사이에선 밥을 사주지도, 얻어먹지도 말자. 정 누군가에게 뭔가 사주고 싶다면 오래된 친구들한테 밥, 아니 술이나 시원하게 사자. 아니면 가족들에게 청담동 비싼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 사주자. 돈은 그렇게 쓰는 거다. 이해관계 얽인 이들에게 얻어먹는 건 쪼잔하고 품격 없는 짓이다.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겠나, 다만 자기 밥값은 자기가 내자. 밥값 때문에 품격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 KBS 1라디오 <생방송 오늘>을 비롯해 다수 프로그램과 대기업 강연을 통해 최신 트렌드를 읽어주고 있다. 저서로는 <라이프 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 본 오빠들의 귀환>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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