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0대들은 데이트 비용을 5 대 5로 더치페이 한단다. ‘알바천국’에서 20대 대학생 897명에게 가장 바람직한 데이트 비용 분담률을 물었는데, 5 대 5로 꼽은 응답자가 무려 58.4%였다. 2014년에는 41.7%였고, 2015년에는 54.7%였다. 3년 연속 증가세에, 이제는 과반수가 더치페이를 지지한 것이다.
더치페이(Dutch pay)에서 더치가 네덜란드를 뜻하는 만큼 각자 내기는 네덜란드를 필두로, 북유럽과 일본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전 세계가 더치페이에 익숙한 건 아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선 남자가 여전히 데이트 비용을 많이 부담한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20대가 달라지고 있다.
더치페이를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일방적 주도권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
여전히 3040에겐 더치페이가 애매하고 어색하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기도 하다. 모든 관계에서 서열을 따졌다. 데이트할 때는 남자가, 직장인이나 선후배가 모이면 제일 연장자나 상위 직급자가 돈을 내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건 체면이나 위신에 앞서 서열 문화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는 남성우월이 강하고, 여성차별이 심한 국가다.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서열화도 강하다. 어찌 보면 남성우월과 나이 서열화를 견고히 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돈과 권력이다. 남자가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차지하고, 연장자이자 선배가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휘두르며 인맥의 고리를 대물림했다.
결국 돈을 내는 자가 관계의 주도권을 가졌다. 따라서 더치페이를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일방적 주도권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데이트에서건, 직장에서건, 선후배 사이에서건 더 이상 권력 관계가 아닌 소통의 관계가 되겠다는 의미다. 더치페이는 서로가 동등해진다는 의미이자, 얻어먹은 것 때문에 누구에게 의존하거나 누굴 봐줘야 할 불편한 상황이 안 생긴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더치페이는 사회적 투명성과도 연관된다.
전 세계적으로 더치페이를 가장 잘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와 북유럽 국가들이다. 신기하게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5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1위를 한 덴마크를 비롯,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즉 네덜란드와 북유럽 4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적은 톱5 국가다. 누구한테 얻어먹거나 기대지 않는다는 건 투명성을 위해 중요한 태도가 된다. 결국 더치페이가 그 사람의 품격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치페이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당일 ‘권보영’이라는 한 여성 네티즌이 고 노무현 대통령과 있었던 개인적 일화를 인터넷에 올려둔 것에서 발췌했다.
호텔 일식당에서 일하던 권보영 씨는 당시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는데, 호텔 일식당에는 정재계 인사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각종 모임이나 회의 등 호텔에서 밥 먹는 일이 많았는데, 대부분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인 접대자리였다. 당연히 고급 음식과 비싼 양주가 주로 소비되었다. 당시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간 권보영 씨에게 노무현 의원은 죽 한 그릇만 달라고 했다. 자리를 마련한 기업 인사가 놀라면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걸로 달라며 하자, “아가씨. 나는 얻어먹는 건 너무 싫고 내 돈 주고 먹을라니까 호텔에서 죽 한 그릇 먹을 돈밖에 없어.”라며 고집스레 죽 한 그릇만 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죽값을 따로 계산하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노무현 의원은 그 식당에 올 때마다 죽 한 그릇만 시키고, 매번 자기가 먹은 죽값을 계산하고 나갔다고 한다. 이런 게 품격이다.
물론 남자가 적당히 지갑을 열 줄도 알아야 한다. 호기롭게 ‘내가 낼게’를 한 번쯤 외쳐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돈 내는 맛에 빠지면 곤란하다. 과거엔 술자리에서 돈도 잘 내고 잔소리도 잘 하면 그냥 선배, 잔소리는 안하고 돈만 잘 내면 좋은 선배, 돈도 잘 안내고 잔소리만 하면 꼰대였다. 결국 좋은 선배는 지갑의 두께가 만들어주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젠 지갑의 두께는 점점 힘을 잃어간다. 돈을 내는 건 더치페이, 간혹 돈이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의 몫일 뿐이다. 돈과 사람은 별개가 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 가야 한다. 그것이 불황의 시대, 우리가 돈 앞에서 덜 주눅 드는 방법일 수 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에서 황정민의 명대사다. 지금 남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 수도 있다. 이해관계가 얽힌 사이에선 밥을 사주지도, 얻어먹지도 말자. 정 누군가에게 뭔가 사주고 싶다면 오래된 친구들한테 밥, 아니 술이나 시원하게 사자. 아니면 가족들에게 청담동 비싼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 사주자. 돈은 그렇게 쓰는 거다. 이해관계 얽인 이들에게 얻어먹는 건 쪼잔하고 품격 없는 짓이다.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겠나, 다만 자기 밥값은 자기가 내자. 밥값 때문에 품격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 KBS 1라디오 <생방송 오늘>을 비롯해 다수 프로그램과 대기업 강연을 통해 최신 트렌드를 읽어주고 있다. 저서로는 <라이프 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 본 오빠들의 귀환>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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