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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알면 알수록, 경주

2016.08.04(Thu) 12:54:52

천년 세월 동안 수도로 ‘군림’했던 도시인지라 경주는 곳곳이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적들로 가득하다. 직접 여행한 이들은 그 방대함을 절감한다. 반면 꽤 많은 이들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이 도시를 들른 탓에 더 없이 익숙하다는 착각에 다시 찾기를 망설이곤 한다. 다시 차근차근 경주를 짚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봉분이 물결치는 웅장한 광경을 마주하다

경주를 여행하다 보면 농토도 아니고 개발을 앞둔 땅도 아닌데 그냥 버려진 듯 황량한 들판을 종종 보게 된다. 땅을 팠다 하면 유물이 나와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지경이 빚어낸 독특한 풍광이다. 그래서 발길 닿는 어디라도 여행자의 발걸음을 늦추게 할 것만 같다. 이 막연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가능한 욕심을 줄일 것, 그리고 크게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 여행하고 나머지는 다음 여행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한 이번 경주 여행에서는 세 곳을 집중해 둘러보기로 했다. 옛 수도의 중심지 일대인 시내의 역사유적 지구, 보문단지와 불국사, 남산 등을 아우르는 부심 지역,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또 다른 정취를 맛보는 동해안권 등이다. 여행 일정도 2박 3일 정도는 잡아야 안심할 수 있다. 경주를 잘 알수록 하루이틀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고, 경주의 면적이 서울의 두 배나 된다는 현실적인 공간감도 한몫했다.

   
거대한 봉분 중 20여 기가 모여 있는 대릉원. 왼쪽에 ‘그 유명한’ 천마총 입구가 보인다.

첫 동선은 경주의 구도심에서 출발했다. 우선 경주 시내의 역사유적 지구에서 대릉원과 계림, 황룡사지와 그 일대, 동궁과 월지 등을 꼭 챙겨봐야 한다. 특히 대릉원은 5, 6세기를 중심으로 조성된 경주 전역의 150여 기의 거대한 봉분들 가운데 20여 기가 모여 있는 유적지이다. 왕 혹은 최소한 왕의 직계가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이 물결을 이루듯 웅장하게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 많은 봉분들이 외관상으로는 거의 흠 없이 유지되고, 훗날 그 속에서 숱한 부장품을 꺼낼 수 있었던 건 그들의 특별한 봉분 조성 양식에 비결이 있다. 평지에 관을 놓고 그 위를 덧씌운 뒤 큼직한 돌과 흙을 쌓았다. 만약 도굴꾼이 애써 봉분을 파 들어가기 시작하더라도 마치 연쇄반응처럼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돌과 흙은 그간의 수고(?)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벽돌을 쌓거나 흙으로만 봉분을 덮어 부장품의 도굴이 심각했던 백제의 고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미추왕릉 하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 대신 발견된 지역, 주요한 부장품의 이름을 따 ‘천마총’, ‘황남대총’ 등으로 불린다. ‘총’은 발굴은 되었으나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무덤을 따로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이 가운데 대릉원 최고의 명소는 그 유명한 천마총이다. 화려한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눈부신 부장품과 더불어 자작나무 말안장 덮개에 그려진 흰 천마의 그림 덕분에 붙은 이름이다. 무덤의 절반을 잘라 박물관처럼 활용하고 있어 옛 신라인의 삶과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특이한 경험이 가능해 경주 여행의 통과의례 같은 곳이다.

대릉원을 비롯한 일대를 보통 대릉원지구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아직은’ 아시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가 있다. 특이하게 쌓아 올린 건축 기법과 우물 정(井) 자로 끼워 놓은 장대석 덕분에 신라에서 일어났던 큰 지진에도 끄덕없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일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 경주는 특히나 그 열기가 유난해 가능한 밤에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밤이면 첨성대 주변에 경관 조명을 밝혀 은은한 운치가 제법이다. 예의 교과서에서 봐 왔던 것과 또 다른 정취와 마주하게 된다.

 

신비로운 여름밤의 궁궐 

경주에서 꼭 밤에 봐야 할 유적은 의외로 몇 곳 더 있는데, 그 가운데 ‘동궁과 월지’를 빼놓을 수 없다. 아마 40대 전후의 독자라면 ‘안압지’라는 이름이 더 귀에 익을 이곳은 신라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월성(반월성)의 동편에 자리하고 있고, 구불구불한 형태의 멋스러운 연못을 파고 왕의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동궁과 월지는 해질녘부터 폐장까지 늘 많은 관람객들로 북적이는데, 올해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특별히 야간 개장 시간을 30분 연장해 밤 10시 30분까지 밤의 궁궐을 둘러볼 수 있다. 조명을 받아 잔잔한 수면에 비친 누각과 연못 주변의 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물론이고, 전체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특한 건축 기법이 신비감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중앙의 누각에는 연못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는데, 섬세한 문양의 기와와 장신구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재미난 벌칙을 써놓고 놀이를 즐겼다는 일종의 신라식 주사위인 ‘주령구’ 같은 독특한 출토품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경주의 인기 먹거리 가운데 하나인 ‘주령구빵’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한여름 밤, 누각(왼쪽 위)과 첨성대(왼쪽 아래)가 아름답다. 국립경주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곳.

동궁과 월지 인근에는 고려 때 불탔다고 하는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나 지금은 황량한 터만 남아 안타까움을 절로 자아내는 황룡사 터가 있다.

너무나 익숙해 그냥 지나치곤 하는 대표적인 경주 여행지들에서 ‘국립경주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경주가 품은 그 오랜 역사를 한눈에 담기에 여기만 한 곳이 없다. 천천히 여유 있게 전시실들을 둘러보고 깊이, 가까이 마주한다면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비롯한 그 숱한 부장품과 유물들이 저마다 품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들려줄 것이다.

신기하게도, 오래전 학창 시절에는 들리지 않았던 그 이야기가 이제야 차근차근 살갑게 다가옴을 경험했다. 아마 지금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고, 함께 둘러본 아이가 지금은 그저 신기함에 그쳐도 언젠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같은 감흥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불국사를 넘어 동해로 이어진 신라의 길

신라 왕경의 중심지에서 벗어나더라도 ‘신라 보물’의 행렬은 변함이 없다. 경주 여행에서 정말 마음먹고 가야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바로 남산 일대이다. 해발 468미터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 자락 여기저기, 그리고 주변에는 알려진 것만 100여 곳의 절터와 80여 채의 석불, 그리고 60여 기의 석탑 등이 펼쳐져 있다. 남산을 등반하며 이 유물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남산의 40여 골짜기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불교 유적이 있는 삼릉골 따라가는 등산로가 인기 있는데, 비교적 가파른 산행 동안 마애관음보살입상, 석조여래좌상, 선각육존불, 선각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선각마애불 등이 다양한 조성 방식으로 신묘함을 전해 힘든 산행을 달래줄 것이다. 또 남산 자락을 둘러가며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담긴 우물인 ‘나정’과 통일신라를 마감한 현장인 ‘포석정’ 등 익숙한 곳들이 많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들러보기를 권한다.

여정은 잠시 시내를 벗어나 경주 여행의 상징과 같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두루 둘러보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중고등학생 이후로는 처음 이곳들을 찾았다면 그사이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풍광들을 마주하며 기억을 맞춰보는 시간을 즐겨도 좋겠다. 최근 보수 공사가 마무리된 석가탑을 다시 마주하는 감회도 새로울 듯하다. 그리고 볼 때마다 한결같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석굴암이 정말 경주 여행을 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할 것이다.

불국사 지구에서 동쪽으로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가면 경주 여행의 세 번째 여정, 바다의 길로 이어진다. 의외로 경주가 바다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경주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두른 고장이다. 다만, 우리가 쉬 떠올리는 동해의 기세 좋은 바다보다는 힘차되 겸손한 인상을 주는 바다이다. 그래서 곳곳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해안이 많고, 이곳들을 이어 해안 걷기 길(해파랑길)로 조성해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즐겨 찾고 있다.

   
최근 보수된 석가탑(위 왼쪽), 해안으로 가면 문무대왕 수중릉(위 오른쪽)과 주상절리도 볼 수 있다.

이 길에서 신라의 대표적인 해안 유적지인 ‘문무대왕 수중릉’을 만난다. 의외의 규모(?)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 의미를 앞세우는 것이 더 좋을 듯한 곳이다. 그런데 처음 이곳에 들렀다면 해변의 풍경에 적잖이 당황할지 모른다. 해안을 따라 곳곳에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고, 밤낮 구분 없이 바다를 향해 징과 북을 치며 제를 올리거나 물고기를 방생하는 이들의 모습이 이 바다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문무대왕의 영험함을 빌리려는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앞 바다의 작은 돌무덤보다 무속인들이 자아낸 광경에 더 흥미를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아빠를 절로 조심스럽게 만든다.

문무대왕 수중릉과 더불어 경주에서 만나는 보기 드문 해안 풍경으로 권하고 싶은 곳은 경주 일대가 (신라의 여러 문헌이 증언하듯) 옛 화산 지대였음을 증명하는 주상절리가 펼쳐진 양남면 해안이다. 지금까지의 문화 유적과 달리 이색적인 자연 경관이 색다른 감흥을 주는데, 해안과 맑고 푸른 동해의 파도 사이에 육각형의 기둥을 닮은 바위들이 부채를 펼쳐 놓은 듯 뉘어 있거나 비슷한 형태로 굳은 화산암들이 곳곳에서 바위군을 형성하는 진귀한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이 해안을 따라 포항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경주 최대의 어항이자 풍성한 해산물이 부려지는 항구인 감포항에 이른다. 경주에서 바다의 싱싱한 맛을 즐기는 이색적인 경험으로 여정이 마무리될 것이다.

 

#여행 정보

경주 여행 일반 정보: 경주 문화관광 054-779-8585, guide.gyeongju.go.kr

경주 교통편(서울 출발 기준)

기차: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하려면 동대구에서 환승해 경주역에 도착하는 편이 시내로 들어오기도 편하다. KTX는 신경주역에 정차하는데, 서울에서 2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어 편리한 반면, 시내에서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KTX 신경주 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의 대릉원과 첨성대로 가려면 60, 61번 버스를, 보문단지와 불국사로 가려면 700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시내버스 이용 문의: www.gumabus.com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서울-경주 간 고속버스는 강남고속터미널에 있으며 심야고속버스를 포함해 하루 약 17회 운행한다. 시외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데, 심야버스를 포함해 하루 약 20회 운행한다. 계절에 따라 운행 횟수가 다르다. 소요 시간은 4시간∼4시간 30분.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비즈한국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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