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1999)가 620만 명 관객을 동원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도 이제는 옛 이야기다. 그 이후 100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효시로서, 잘만 만들면 국내 영화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음을 알려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러면 <쉬리> 이전까지 최다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는 무엇일까. 김두한의 젊은 시절을 다뤄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한 <장군의 아들>(1990)일까? 아니다. 그럼 서울 관객 102만 명을 동원한 <서편제>(1993)일까? 아니다. 정답은 비공식적으로 전국 최소 270만~30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했다는 심형래 주연의 <영구와 땡칠이>(1989)다.
남기남 감독 작품, <영구와 땡칠이>(왼쪽)과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 영화 포스터. |
<영구와 땡칠이>는 ‘한국의 에드 우드’, 또는 ‘한국의 로저 코먼’이란 별명을 가진 남기남 감독 작품이다. 남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 바로 “그럼 찍지, 남기남.”이다. 그가 영화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로부터 필름이 조금 남았다는 말을 듣고선 “그럼 (필름을) 찍지, 남기남?”이라며 조크를 날린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가 한 장소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 다음날로 촬영을 넘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기남 감독은 빨리 찍기와 몰아 찍기의 달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대부분 초저예산에, 엿새 만에 영화 한 편을 만들고 한창때는 1년에 9편을 만들다 보니 항상 ‘저질’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녔다. 이런 평가에도 그는 1970~1980년대 한국 영화 흥행감독으로서 그 이름 석 자를 당당히 올렸고 우리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기남 감독. 출처=네이버 인물DB |
남기남은 <내 딸아 울지 마라>(1972)로 데뷔한 후 10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했다. 그의 정확한 작품 수에 대한 설명이 제각각인데 그 자신도 정확한 작품 수를 혼란스러워한단다.
이렇듯 다작이 된 이유는 빨리, 싸게 찍기를 바라는 당시 제작자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1973년에 개정된 영화법의 희생양으로도 거론된다. 당시 영화법은 영화제작자들이 매해 5편 이상 제작을 해야지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따낼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의무제작 편수가 모자랄 때면 어김없이 남기남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겼고, 그때부터 그는 빨리 찍기의 대명사가 됐다.
단적인 예가 촬영 단 엿새 만에 완성된 심형래, 임하룡, 배삼룡 주연의 <철부지>(1984)다. <철부지>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촬영 6일째 되는 날 점심시간 무렵 스탭들이 “밥먹고 찍읍시다”라고 말하자 남기남 감독이 한마디 했다. “찍긴 뭘 찍어, 기계 치워.” 남 감독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촬영이 완료됐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1970년대 후반 한창 무협영화를 찍을 때 일이다. 대만의 어떤 절에서 영화를 찍기 위해 현지에 촬영허가를 신청해놓고 스탭과 출연진이 대만에 도착했다. 새벽 6시 절에 도착해 아침 10시까지 찍고 있는데 이 절의 주지가 촬영허가를 내준 적이 없다 하자 남 감독은 카메라를 돌려 영화에서 필요한 장면을 모두 다 찍고 제작진은 그날로 한국에 돌아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는 기억력이 매우 비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배우들이 대사를 잊어버리면 남 감독은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즉석에서 대사를 정확하게 말해줬다고 한다. 영화 콘티 전체를 머릿속에 넣고 있지 않으면 여러 장면을 동시에 찍을 수 없는데 남 감독은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NG를 선언하는 일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그는 자투리 시간까지 남기지 않고 찍는 기술과 집중력, 상황에 유연한 대처로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실례로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2003)를 찍을 당시, 갈갈이 삼형제가 산에서 내려오는 도입부를 찍은 뒤 남 감독은 삼형제에게 힘차게 제자리 점프를 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영화와 시작과 끝을 한 장소에서 동시에 찍은 셈이다. 피 흘리는 분장을 할 소품이 없자 빨간색 포스터 칼라를 급히 구해 배우들에게 발랐다는 일화도 전설이다.
남 감독은 전성기에는 흥행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이런 면에서 남 감독은, 흥행작이 없었던 에드 우드보다는 할리우드 저예산 B급 영화 제작의 대부이자 낭비 없는 촬영으로 유명한 로저 코먼에 더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로저 코먼은 런닝타임 103분짜리 <흡혈식물 대소동>(1986)을 단 이틀 만에 찍어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남기남은 한 작품으로 승부하지 않고 다작으로 흥행을 노렸다. 초저예산을 지원받아 빨리 찍기를 지속하다 보니 그의 필모그래피는 개그물이나, 액션물로 채워졌다. 1970년대 무술영화 <정무문> 시리즈, 이주일 주연의 <평양 맨발>(1980)로 흥행작을 꾸준히 쏟아냈고, 마침내 <영구와 땡칠이>(1989)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심형래는 당시 KBS2TV <유머 1번지>에서 1970년대 인기 연속극 <여로>(1972)를 코믹하게 패러디한 <영구야, 영구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남기남과 심형래의 의기 투합으로 <영구와 땡칠이>가 탄생했다.
영화 줄거리는 영구(심형래)가 사는 시골 마을에 이사 온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구미호, 늑대인간, 꼬마 강시의 요괴와 귀신 군단에 맞서서 영구가 뒷산 절의 지나가던 스님의 도움을 얻어 싸워 마을을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당시 초등학생이 이 영화를 안 보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 없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참고로 땡칠이는 영구네 집에서 기르는 개로 이 영화 포스터에서 심형래가 취하는 포즈는 개가 ‘헥헥’거리는 모습으로 대단히 유행했었다.
<영구와 땡칠이>의 정확한 관객수는 아무도 모른다. 극장에서 못 본 어린이들을 위해 마을회관과 체육관 등에서도 상영됐는데 이런 상황까지 포함하면 과장을 보태 500만 명을 넘었을 것이라는 후문도 있다. 어쨌든 <쉬리>가 기록을 깰 때까지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의 위치를 점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심형래는 <영구와 땡칠이>를 기획해 그해 6월 대원동화를 찾았다. 초등학교 방학이 시작되는 7월에 맞춰 한 달 안에 영화를 끝낼 감독이 필요했는데, 남기남만 한 인물이 없었다. 남 감독은 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도 또 하나의 신화를 쓴다. 세트를 짓느라 1주일간 여유가 생기자 미국으로 가 또 한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이 영화가 바로 신성일, 강석현 부자 주연의 <태권 소년 어니와 마스타 김>이다. 한미양국을 오가며 한 달 새 영화 두 편을 완성한 사람은 남 감독이 유일하며 현재와 같은 영화 풍토에선 앞으로도 나올 수 없으리라.
남 감독은 <영구와 땡칠이> 이후 계속되는 흥행 실패와 부도로 인해 1990년대 중반 큰 고통을 겪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부터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쏟아졌고, 이에 맞서기 위해 국내 영화도 물량공세에 나서면서 남 감독의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 작품 수도 눈에 띄게 줄었고,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거나 개봉하더라도 조기 종영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남기남을 한국영화의 명감독 반열에 올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척박한 한국 영화시장에서 ‘저비용, 고효율’이란 자신만의 영화 공식으로,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준 영화 장인이었고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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