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만 해도 우리집 거실 구석에는 플라스틱 재질의 기다란 ‘가구’가 하나 서 있었다. 수납 기능도 없으면서 장식 역할도 하지 못하는 애물단지였다. 며칠 정도 쓸모가 있을 만도 했지만 아내는 그 기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7월 하순부터 제 기능을 하고 있다.
그 ‘가구’의 이름은 에어컨이다. 작년만 해도 손도 못 대게 하던 아내가 올해는 에어컨을 켜는 가족을 나무라기는커녕 스스로 전원을 켜는 일이 일어났다. 올해 정말 덥다.
낮에 더운 거야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든 견디게 되는데 밤에 더우면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다.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워서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을 우리는 ‘열대야(熱帶夜)’라고 부른다. 우리는 학교에서 열대야를 배운 적이 없다. 정식 기상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열대야는 날씨를 소재로 수필을 쓰는 일본 작가 구라시마 아쓰시가 만든 용어다. 일본 기상청은 하루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을 열대야로 정의하면서 기상용어로 흡수했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2009년부터 밤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을 열대야라고 정의하고 있다.
잠 못 드는 밤, 서울시민들이 한강변에 나와 더위를 식히고 있다. |
#도시가 더 더운 이유
우리나라에서 열대야 일수가 가장 많은 곳은 서귀포시다. 열대야가 평균 25일이나 된다. 그다음이 제주시로 21일이다. 우리가 최고의 피서지로 꼽고 있는 제주는 사실 가장 더워서 잠도 자기 힘든 곳인 셈이다. 육지에서는 창원이 15일로 가장 많고, 서울시의 경우 연간 7일 정도에 불과하다. 이것을 보면 서울 사람들이 제주로 피서를 가는 이유는 열대야를 피하기 위해서는 분명 아니다.
그런데 올해가 정말로 유난히 더운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올해 7월 전국 평균 열대야 일수는 4일로 평년(2.3일)보다 1.7일 더 길었을 뿐이다. 기상관측망을 전국으로 확충한 1973년 이래로 7월 열대야 일수 6위다. 1위는 1994년(8.9일)이었다. 대부분의 독자는 올해 7월의 열대야 일수가 4일이었다는 데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국 평균일 뿐이다. 제주는 7월 18일부터 31일까지 14일 연속 열대야였으며, 부산·포항·목포·여수·창원은 24일부터 31일까지 8일 연속, 서울도 21일부터 31일까지 28일 하루 빼고 열대야가 열흘이나 되었다. 1994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열대야가 기록된 것이다. 그러니 올해 정말 덥다는 말은 맞다. 도시에서는.
남쪽 섬과 도시가 더운 것은 이해가 되지만, 남한에서 거의 최북단에 있는 서울이 평균 두 배나 많은 열대야를 겪은 까닭은 뭘까? 열대야는 기본적으로 무덥고 습한 수증기가 유입되고, 이 때문에 생긴 많은 구름이 낮에 달궈진 열을 밤에도 가둬두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같은 도시에는 여기에 더해 다른 이유가 또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도시 열섬(Urban Heat Island)’ 현상을 열대야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도시 열섬 현상이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지표면과 밀집된 인구가 사용한 각종 에너지가 열로 전환되면서 도시 내부의 기온이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는 열을 잘 반사하지 못한다. 도시는 녹지가 적어 증발과 증산작용을 통한 냉각효과가 적다. 또 높은 빌딩은 바람을 막아 대류에 의한 냉각화도 방해한다. 그리고 에어컨과 자동차가 뿜어내는 열기는 어마어마하다. 열섬 현상은 특히 여름밤에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
신촌물총축제에 몰려든 사람들. 도시는 더 덥다. |
매년 오르락내리락하기는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점차 오르고 있다. 기상청이 발행한 <한반도기후변화보고서>에 따르면 21세기 후반 한반도의 폭염 일수는 현재 11일에서 최대 40일까지 늘어나고, 열대야 역시 37일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의 열대야는 평균 8일이었는데 과학자들이 예측한 대로 10년마다 열대야가 8일씩 늘어난다면 2100년에는 열대야가 무려 70일이나 될 것이다.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비가 오는 며칠을 제외하면 매일 열대야인 셈이다.
술이 간에 끼치는 나쁜 영향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나보다 며칠이나 쉬지 않고 마셨냐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폭염 피해 역시 지속 일수에 좌우되는데, 열대야는 폭염의 지속 일수를 늘린다. 지진, 홍수, 태풍은 그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로 하여금 대비하고 조심하게 하지만, 폭염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에게 더 위협적이다.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가끔 이삿짐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독일은 인건비가 비싸서 웬만한 가정은 여러 날을 두고 가족끼리 짐을 나른다. 이삿짐 나르는 사람을 고용했다는 것은 꽤 부유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삿짐을 나를 때 가장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부탁받는 품목은 와인이다. 주인은 지하창고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와인 가운데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와인을 지목한 메모를 적어 주었다. 바로 빈티지(vintage) 넘버다. 빈티지 넘버란 포도를 수확한 해를 말한다. 햇빛 등의 조건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다르기 때문에 빈티지 넘버는 와인의 질을 말해준다.
19세기에는 기억할 만한 빈티지가 22개다. 거의 5년에 한 번꼴로 햇빛과 온도가 좋았다는 뜻이다. 20세기 전반기에는 12번으로 19세기와 별 차이가 없지만 20세기 후반기에는 20번이나 된다. 20세기 후반에는 5년에 두 번꼴로 햇빛과 온도가 좋았다는 뜻이다. 지구가 그만큼 더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구가 더워질수록 와인은 좋아지고 에어컨은 더 많이 틀어야 하며, 이를 위해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야 하고, 다시 지구는 더 더워지고 에어컨을 더 틀고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악순환이 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와인마저 맛을 잃는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때가 온다는 게 문제다. 그 악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시인인 고두현 기자의 말대로 더위로부터 달아나는 피서(避暑)보다 더위와 하나가 돼 그 자체를 잊는 망서(忘暑)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과학계의 소문난 입담꾼.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를 자처한다.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후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공생 멸종 진화>, <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 <과학하고 앉아 있네> 등 70여 권의 책을 쓰고, 감수하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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