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가 깨지면 신뢰가 깨지고, 이것은 곧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화여대 상황이 그렇다. 학생들의 요구에 학교 측이 수긍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면 될 간단한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지금 이화여대 본부와 학생들의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만 있다.
지난 7월 5일, 이화여대는 교육부의 일-학습 병행제도의 일환이던 ‘평생교육 단과대학(평단)’ 설립 사업에 참여했다. 이 사업은 고졸 직장인 여성, 30세 이상 무직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라는 명분 아래 진행됐다. 참여하는 대학은 교육부로부터 30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화여대는 추가모집을 통해 선정됐기에 빠른 속도로 사업을 추진했다. 때문에 방학 동안 학제개편이 이뤄지면서 이화여대 학생들의 알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다. 심지어 ‘미래라이프대학’의 학제 운영방식은 2.5년에서 3년 정도 온라인수업, 주말수업, 야간수업을 통해 학생의 편의에 따라 학점만 이수하면 학위수여가 가능하다. 온라인수업만 들어도 4년제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학내에 돌았다. 설립되는 학과 또한 기존 평생교육원 과정과 겹치는 것이 많았다. 당연히 학생들로선 그럴싸한 명분으로 학위장사를 한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학생들은 교내 커뮤니티 사이트와 SNS를 통해 이 문제에 대응했고, 학교 측은 학생들의 항의를 무시했다. 결국 학생들은 학제개편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던 대학평의원회 회의장을 점거했다. 점거 과정에서 일부 보직교수들이 갇히긴 했으나, 학생들은 보직교수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면서 점거를 진행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최경희 총장과의 대화. 하지만 돌아온 것은 1600명이나 되는 경찰 병력 투입이었다.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2일 이대 정문 앞에서 ‘졸업장 반납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
이화여대 학생들은 분노했다. 총장과의 대화 요구는 총장 사퇴 요구로 이어졌다. 총장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학생들은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교수협의회 역시 졸속적인 사업 추진이라며 학생들을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반면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은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어 ‘외부세력이 개입됐다’, ‘학생들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시위를 할 리 없다’며 대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국 대학 학생회들이 지지성명을 발표한 이유
대학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90년대 이후 학생들이 주체가 된 운동에 경찰 병력이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대를 시작으로 한양대, 고려대, 경희대, 동국대, 연세대, 서울대, KAIST, UNIST 등 많은 대학의 총학생회가 경찰 병력 투입 및 이화여대의 졸속적인 학제 개편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화여대 내부의 사건은 전국 대학 전체의 사건으로 커졌다. 많은 대학들이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96년 5·31 교육개혁 이후 몸집을 불려온 대학들은 출산율 저하에 따른 학생 감소로 몸집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 청년실업난까지 가중되자 교육당국은 대학구조조정을 일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대학들은 교육부의 대학평가 사업이나 제정지원 사업 일정에 맞춰야 했다. 교육부에서 제시한 시일을 맞추지 못하면 지원서류조차 제대로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많은 대학들이 취업률을 기준으로 학과를 구조조정했다. 학생들의 참여는 보장되지 못했다.
#구시대적 구조조정과 제왕적 총장
이번 사건은 교육당국과 제왕적 총장의 합작품이다.
칼을 빼든 교육당국의 구조조정은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학 구조조정 사업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기한 내에 교육부 기준에 맞춘 대학들을 선발해 예산을 지원했다. 대학의 특성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화여대는 교육부의 일정에 맞춰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과의 소통은커녕 교수협의회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 정보도 공유되지 않았다. 대화 테이블에 참여하지 못한 학생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또 제왕적 총장이라는 한국 대학의 특성도 간과할 수 없다. 총장은 구성원과 호흡하면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학 총장들은 총장에 뽑히는 순간 대학 정책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KAIST 서남표 전 총장이 그랬고, 연세대 정갑영 전 총장이 그랬다.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파빌리온/웰컴센터 건설, 성적장학금 폐지, 프라임 사업 강행 등 많은 논란 속에서 일방적으로 대학을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수업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거나, 학교가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이는 곧 불만이 됐고, 불만은 분노로 나타났다. 많은 대학 학생회가 이화여대 학생들의 농성을 지지하고, 이화여대의 일방적 구조조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유다.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반납한다며 정문 쪽에 붙여둔 졸업증서를 학생들이 보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
#이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이화여대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당국은 구시대적인 대학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단기적 정책 수립 및 추진 방식을 고쳐야 할 것이다. 대학이 정원을 줄이면서 특성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형태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다. 또 대학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대학평의원회의 권한을 확대하고, 구성원들의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는 ‘제왕적 총장’이 아닌 가급적 많은 구성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중재자 총장’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운영에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구성원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인혜 대학가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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